박석환, 이현세, 지옥의 링, 동아일보, 2008.01.05


챔피언 최요삼이 끝내 세상을 떠났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프로권투의 재건과 부흥을 갈망했던 챔피언은 은퇴 시기를 늦추며 링에 올랐다. 이종격투기에 빼앗긴 관중을 되찾아 와야 한다는 책임감 때문이었다고 하니 안타까움을 더한다. 

언론을 통해 공개된 일기장에는 맞는 것에 대한 공포와 함께 글쓰기를 통해 두려움과 싸웠던 챔피언의 속내가 담겨 있다. 아무리 맞아도 쓰러지지 않던 맷집왕이 ‘맞는 것이 두려웠다’고 말하는 대목은 이현세의 걸작 만화 ‘지옥의 링’을 떠올리게 한다. 

주인공 까치는 고아 출신으로 어린 시절 함께 자란 엄지를 찾아 상경한다. 하지만 엄지는 재벌 2세 사업가 동탁과 결혼을 꿈꾸며 까치를 홀대한다. 일과 사랑 앞에서 당당해지고 싶었던 주인공은 링에 오른다. 하지만 엄지의 변심만큼이나 도시의 인심은 사나웠고 스포츠 비즈니스의 세계는 냉정했다. 스승과 제자, 챔피언과 도전자, 사랑과 열정, 꿈과 성장 같은 전통적 스포츠 서사의 재미는 찾을 수 없다. 그 대신 돈을 중심으로 구조화된 물질 만능의 사회가 있고 그 속에서 ‘익숙한 척 살아가기’ 위해 목숨까지도 소비해 버리는 등장인물이 있을 뿐이다. 

1980년대 급속한 도시산업화 시대가 만들어낸 씁쓸한 풍경이다. 하지만 이를 스포츠와 비즈니스 소재에 녹여 서술한 작가의 저돌적 시선은 여전히 매력적이다. 육중한 체구와 강력한 펀치로 초반에 경기를 끝내는 중량급 권투와 달리 경량급 권투는 강인한 정신과 지구력을 요구한다. 죽은 듯 쓰러졌다가도 다시 일어나서 주먹을 교환하는 것이 경량급 권투의 흥분 요소다. 체중을 맞추기 위해 허기진 상태에서 링에 올라 12라운드를 뛴다. 그러고도 승부를 못 내 판정을 기다린다. 주먹 한 방으로 끝내는 ‘사건’이나 ‘맨주먹 신화’가 아니라 매회 유효타를 계산하며 일희일비(一喜一悲)해야 하는 인생이자 처절한 생존 경쟁이다. 

이현세는 경량급 권투의 특수성을 중심으로 승자만이 신화가 되는 산업화 사회의 기업논리를 격정적 연애담으로 풀어냈다. 고도의 스포츠 정신이나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한 열정 같은 요소는 독자가 읽고자 하는 긍정적 요소일 뿐이다. 작가가 전하는 것은 물질적 성공을 통해 사랑을 얻고자 했고 이를 위해 매 맞는 일을 견딘 ‘막장 인생’이다. 

이 만화는 올해 한일 합작 드라마로 제작된다. 세상의 변화에 따라 작품의 핵심 요소였던 경량급 권투가 이종격투기로 바뀌고 현역 선수들이 출연한다. 비인기 종목이 된 권투와 고인이 된 최요삼의 고민을 실감할 수 있는 부분이다. 계체량, 12라운드제, 기권규칙 등 프로권투는 기술이나 규칙에서 이종격투기와는 다르다. 

‘지옥의 링’이 시대를 넘어 읽히는 콘텐츠가 되고 독자의 흥분과 감동을 이끌어 낸 것은 이 규칙을 통해 이야기가 전개됐기 때문이다. 규칙이 달라진 이야기는 어떤 모습일까. 원작의 감동을 먼저 경험해 볼 것을 권한다. 


박석환 (만화평론가, www.parkseokhwna.com )


2008.01.05, 동아일보 

이미지 맵

Parkseokhwan

만화평론가 박석환 홈페이지. 만화 이론과 비평, 웹툰 리뷰, 인터뷰, 보도자료 등 게재

    'Critique/리뷰' 카테고리의 다른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