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우리 만화는 어느 해보다 다양한 스펙트럼을 펼쳐 보였다. 만화를 원작으로 한 영상물의 잇단 히트, 인터넷을 무대로 끝없이 등장하는 신진작가군, 폭과 깊이를 더해가고 있는 교양만화, 열성적 국내 지지층과 함께 해외 무대에서도 선전하는 순정만화 등. 초대형 베스트셀러나 특정 장르가 주도했던 과거의 만화시장과는 달라졌다.
편향성과 획일성을 걱정할 정도로 시장을 지배하는 장르가 없어졌다는 점은 아쉽지만 다양한 포트폴리오를 구비하게 됐다는 점은 매우 긍정적이다. 올해보다 내년의 성과가 더 기대되는 만화계다.
김진의 ‘바람의 나라’ 역시 내년이 더 기대되는 작품이다. 1992년 순정만화잡지 ‘댕기’에 첫 연재된 이 작품은 그간 3부 22권이 출간됐다. TV드라마로 폭발적 시청률을 기록했던 ‘주몽’을 잇는 소재로 일찍부터 드라마 제작이 기대됐다. 주몽의 아들 유리왕과 그 아들 대무신왕(무휼) 그리고 손자 호동왕자까지. 3대에 걸친 왕조사이자 정복사이고 아버지와의 대립과 화해, 이루어질 수 없는 적국 여인과의 사랑을 담은 대형 서사극이다.
온라인 머드게임으로 제작되기도 했고 작가가 직접 2권의 소설로 재구성하기도 했다. 서울예술단에 의해 뮤지컬로 제작되어 올해 앙코르 공연도 열렸다. 장기 연재와 다양한 미디어믹스 전략으로 높은 지명도와 열혈 팬을 확보한 작품이지만 시련도 컸다. 잡지 폐간, 출판사 사업정리 등으로 인해 수차례 연재 중단과 재개를 거듭했다. 급기야 강도 높은 저작권 침해 시비까지 겪었다.
고구려 광개토대왕을 주인공으로 한 TV드라마 ‘태왕사신기’가 이 작품의 주요 설정을 차용했다는 시비가 있었지만 법원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고분벽화의 사신을 의인화해 주인공의 조력자로 삼은 설정이 역사적 사실에 기인한 작가의 아이디어에 불과하므로 이 부분은 법적으로 보호받을 수 없다는 판결이었다.
이 덕분에 ‘태왕사신기’는 다양한 화제와 함께 판타지사극이라는 새로운 이정표를 세운다. 반면 ‘동일 소재 이야기’로 전락한 이 작품은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됐다. 팬들은 아쉬운 정도겠지만 다른 방송사와 드라마 판권 계약을 협의하던 작가는 자식을 도둑맞은 것만큼이나 분했을 것이다. 무엇보다 수년간의 고증과 연구를 통해 구체화시킨 작품의 고유한 설정이 단순한 아이디어로 평가절하되면서 창작 의욕도 한풀 꺾였을 법하다.
그럼에도 작가는 인터넷을 통해 연재를 재개하고 올해 23, 24권째 이야기를 출간했다. 또 일부 내용을 다시 그린 ‘바람의 나라 SE’ 버전도 선보였다. 그 같은 열의와 팬들의 한결같은 사랑 탓일까. 내년이면 이 작품을 TV드라마로 볼 수 있게 됐다.
고구려 사극 열풍을 잇는 모양새지만 원작의 방대하고 탄탄한 스토리 그리고 서정적 연출과 판타지 한 소재들이 빛을 발한다면 어떤 작품보다 값진 성과를 이뤄낼 것으로 전망된다.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는 법이다.
박석환( 만화평론가, www.parkseokhwan.com )
동아일보, 2007. 12.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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