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존감 잃은 왕따 소녀의 현실과
수호천사로 나선 뱀파이어의 판타지
학교에서는 같은 반 친구들에 의해 집단 따돌림을 당하고 가정에서는 무관심한 홀어머니 아래서 숨죽여 사는 소녀가 있다. 늘 혼자인 소녀지만 온라인 공간에서 만큼은 활달하고 능력 있는 아마추어 소설가로 필명을 날리는 중이다. 현실세계는 한 시도 머물기 힘든 곳이지만 온라인이라는 비현실세계는 소녀가 현실을 버틸 수 있는 정서적 힘이 됐다. 하지만 이도 잠시. 비현실세계로 회피할수록 현실의 괴로움은 커졌고 소녀는 자존감 제로의 인간이 되어갔다.
동양의 마녀, 서양의 흡혈귀를 만나다
소녀는 커튼처럼 내려 온 머리칼로 얼굴을 가리고 스마트폰이 보여주는 세계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보낸다. 온라인상에서는 많은 추종자들을 거느리고 있는 파워블로그였지만 현실 공간에 있는 소녀는 반 친구들의 집단 따돌림과 학교 폭력에 시달리고 있는 ‘찌질 한 고딩’이다. 그런데 이 고딩의 이름은 ‘신내림’, 무당의 딸이다. 자신들과 다른 운명을 타고난 소녀를 가해자들은 ‘깡마른 마녀’라 부르며 괴롭혔다.
‘마녀’라 불리는 소녀와 학교폭력의 가해자들이 수학여행을 갔던 어느 날이다. 소녀는 관 속에 봉인되어 있던 페테슈를 만나게 된다. 페테슈는 인간보다 비범한 능력을 지닌 흡혈귀(뱀파이어)였고 늙지도 죽지도 않는 꽃미남이었다. 그런데 인간이 되고 싶어 한다. 흡혈귀가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마녀의 피를 먹어야 한다. 하지만 페테슈가 살던 곳(16세기 유럽으로 추정)에서는 대대적인 ‘마녀사냥’과 ‘마녀화형식’이 벌어졌다. 마녀가 몰살되자 페테슈는 ‘동양의 마녀’라 할 수 있는 ‘무당’을 찾아 500년 전 쯤 한국에 왔다가 누군가에 의해 봉인된 것이다.
소녀 연애담에 부조리한 현실을 담다
<허니 블러드>는 왕따 소녀와 꽃미남 흡혈귀의 연애담을 그린 ‘틴에이저 로맨스물’이다. ‘능력자 남자친구(흡혈귀)’ ‘선생님이 되어 돌아 온 교회오빠’ ‘훌쩍 커버린 코흘리개 옆집 동생’ 등 사춘기 소녀의 가슴을 설레게 할 요소가 가득 담겨 있다. 물론 그 반대편에 선 인물도 있다. 송진아로 대표되는 ‘숨어있는 가해자’들이 달달해야 할 이 연애담을 질투와 분노, 복수 같은 갈등의 드라마로 만들어 간다. 그리고 이 작품을 그저 그런 로맨스물에서 우리 사회에 대한 비판적 시선을 담은 문제작으로 확장시켜 낸다.
중학생 시절 내림의 학교로 전학 온 진아는 누가 봐도 모범적 가정에서 바르게 큰 예쁜 소녀였다. 그런데 이 소녀는 자신과 정 반대편에 있거나 아래에 있다고 생각되는 내림이 ‘교회오빠’ ‘옆집동생’ 등의 관심을 받는 것이 싫었다. 진아의 질투와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꾸며진 상황들은 고교생이 된 내림을 ‘무당의 딸’ ‘찌질 한 왕따’로 만들어 버렸다. 진아가 꾸민 거짓 상황에 몇몇 친구들이 동조했고 감시자가 되어야할 선생님과 부모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무관심으로 동의했다. 마치 16세기 유럽에서 마녀로 몰려 재판에 서고 화형까지 당했던 여자들처럼 지금 이곳에서 내림이 ‘마녀사냥’을 당하고 있다.
마녀로 몰린 이들을 위한 수호천사 판타지
<허니 블러드>는 마녀사냥 식 따돌림과 학원 폭력에 내몰린 소녀의 이야기이다. 겉모습은 ‘뱀파이어와의 로맨스’라는 달콤한 소재로 쌓여있지만 ‘마녀사냥’이라는 역사적 사건과 ‘인터넷 사회의 모순된 현실’ 그리고 이런 상황이 그대로 재현되고 있는 대한민국의 교실 안 풍경을 그려낸 작품이다. 아직 우리 사회는 왕따와 학교폭력에 대해 둔감하다. 다른 환경에서 다르게 성장한 아이들이 단체 생활에 어울리지 못해서 발생하는 우발적 상황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하지만 작가가 그려낸 교실 안 풍경과 가해자들의 태도는 이런 인식이 얼마나 낭만적이고 편의주의적인 것인지 알게 한다.
누구에게나 벌어질 수 있는 아주 작은 상황과 대응 과정을 나열하면서 어떻게 교실 안에서 왕따가 탄생하고 집단적 광기와도 같은 학교 폭력이 성장하는지를 또박 또박 그려낸다. 그리고 아직은 누구도 그들을 위해서 나서지 않고 있다는 점도 명확히 한다. 그래서 그들을 위한 수호천사가 필요하고 그들을 위한 해방구와도 같은 판타지가 여기 있다고 강조한다. 주목해야 할 작품이다.
글/ 박석환(만화평론가, 한국영상대학교 교수)
1997년 스포츠서울 신춘문예로 등단한 후 만화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만화콘텐츠기획자, 만화정책기획자, 만화전시기획자 등으로 일하다가 2013년부터 한국영상대학교 만화콘텐츠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저서로는 <코믹스 만화의 세계>, <만화리뷰쓰기> 등이 있다. 홈페이지는 www.parkseokhwan.com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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