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석환, 나가토모 겐지의 ‘바텐더’, 동아일보, 2007.04.14


손님이 환자라면 바텐더는 의사 - 아픈 영혼 어루만질 칵테일 처방


나가토모 겐지의 ‘바텐더’는 술 소재 만화 열풍을 잇는 작품이다. 미식가 만화에서 출발한 술 소재 만화는 술을 만드는 장인을 거쳐 술 판매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평론가로 이어졌고 급기야 제조된 술을 혼합해서 손님 앞에 내놓는 기술자의 이야기로 확장되고 있다. 만화 ‘명가의 술’이 일본 전통주의 제조법을 다루고 있다면 ‘신의 물방울’은 ‘10만 가지 맛’이 있다는 와인을 다룬다. 반면 ‘바텐더’는 수백만 가지 맛을 낼 수 있다는 칵테일의 세계를 다룬다.

수많은 칵테일만큼이나 다양한 성격과 상황에 처한 사람들이 바(술집)의 무거운 문을 열고 들어온다. 바텐더는 바의 무거운 문은 손님이 들어오기 어렵지만 그만큼 바깥세상을 잊을 수 있기 때문에 진짜 자신과 마주할 수 있는 은신처가 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지친 손님에게 ‘흑맥주를 베이스로 토마토 주스를 섞은 원기회복용 칵테일’을 권한다. 친구와 서운한 관계에 빠져 있는 손님에게는 ‘피카소의 고독을 어루만지고 치유해 줬다는 스즈 김렛(용담 뿌리를 베이스로 한 황금색의 리큐어)’을 내놓는다. 용담의 꽃말은 ‘너의 슬픔을 함께하는 것’이라며 어려울 때 힘이 됐던 친구를 잊지 말라는 식이다.

만화 ‘바텐더’는 바에 찾아오는 다양한 계층의 손님들을 통해 다종다양의 칵테일을 소개하는 미시 서사를 바탕으로 유학파 바텐더의 귀국 성장기를 거시 서사로 다룬다. 여기에 ‘손님을 지배하는 맛’을 주장하는 바텐더와 ‘손님에게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바텐더를 적대자로 등장시켜서 극적 긴장을 유지한다. 미시 서사가 단 시간에 마시는(쇼트드링크) 맨해튼처럼 짧고 강한 인상을 남긴다면 거시 서사는 긴 시간 동안 마시는(롱드링크) 진피즈처럼 다양한 변화를 느낄 수 있다.

무엇보다 이 작품이 지닌 미덕은 주인공 사사쿠라 류가 보여주는 직업 정신이다. 류는 세상에는 절대로 손님을 배반해서는 안 되는 직업이 두 가지 있다고 말한다. 하나는 의사이고 또 다른 하나가 바텐더란다. 배반은 손님과의 대화를 다른 사람에게 말하는 것이다. 이를 지키는 것에 이야기가 집중됐다면 류는 융통성 없는 확신형 인물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러나 류는 의사와 바텐더를 동일시한다. 손님들은 류를 하찮은 술집 종업원으로 대하지만 류는 쉬지 않고 손님을 관찰하고 손님의 이야기를 경청한다. 관찰과 경청으로 손님의 상황을 진단하고 아픈 영혼을 치유할 수 있는 칵테일을 처방한다. 스스로 의사가 됨으로써 술꾼을 최고의 정신요법을 받으러 온 내담자로 상승시킨다.

맛으로 손님을 굴복시키려는 고집도 서비스로 손님을 현혹시킬 욕심도 없다. 술에 취해 문제를 잊는 것이 아니라 칵테일의 맛과 의미를 통해 손님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돕는다. 그러기 위해서 의사가 된다. 손님을 위해서 나를 높이는 것이다.


글. 박석환(만화평론가, www.parkseokhwan.com)


동아일보 2007-04-14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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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평론가 박석환 홈페이지. 만화 이론과 비평, 웹툰 리뷰, 인터뷰, 보도자료 등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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