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이있다. 겨드랑이가 가렵다
독자들에게 좋은 만화를 추천하기 위해 글을 쓴 것이 올해로 11년째다. 연차가 길어 지다보니 5월이면 가정의 날, 6월이면 호국의 날 특집 프로그램을 편성하는 방송사마냥 해당 월의 이슈에 따라 추천만화의 성격을 규정하는 일이 잦아졌다. 미디어의 국민통합 기능 같은 것을 만화리뷰에도 적용한다는 입장 따위는 없다. 다만 국민적 공감대 형성이 필요한 시기에는 그에 준하는 키워드를 지닌 만화작품을 찾아 읽을 정도의 여유는 있어야겠다는 생각에서다.
물론 하루에도 수 십 권씩 쏟아지는 신간만화를 모두 검토할 수 없다는 현실적 어려움 때문에 검토의 폭을 좁히고 생산적 글쓰기를 하기 위해 수립한 필자의 묘책이다. 그때그때 글감이 될 작품을 찾다가 정작 소개해야 할 작품이 아닌 다른 만화작품에 푹 빠져서 마감 시간을 맞추지 못한 경험이 쌓이면서 신간이라는 제품의 시기성이 아니라 작품 자체의 시의성에 더 집중하기로 한 것이다.
그렇다고 인터넷서점의 세세한 분류기준과 추천 리스트처럼 뭐뭐할 때 읽어야 할 추천 만화리스트를 따로 관리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좋은 만화작품을 만나면 몇 월에 소개하면 좋을지를 기록해두는 정도다. 이런 방식을 택하면서부터 매년 4월에는 장애인을 소재로 한 만화를 추천하고 있다. 혹 다른 이슈와 기념비적인 신작이 출판된다고 하더라도 4월의 추천만화는 장애인 이야기를 찾는다. 장애인의 날(매년 4월 20일) 하루만이라도 그들의 이야기를 찾다보면 그만큼 그들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 늘어날 것이고 비장애인들이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색다른 시선과 삶의 태도를 통해 새로운 통찰을 얻게 된다면 우리 사회가 좀 더 여유로워지지 않을까하는 소박한 마음에서다.
하지마비 장애인들의 일과 사랑
올해 4월에는 장애인 만화가 이해경의 <겨드랑이가 가렵다>를 소개한다. 이 작품은 7명의 하지마비 장애인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중증소아마비인 이해경은 스무살 때 동생 등에 업혀 서울에 올라와서 만화가의 꿈을 이룬 도전자다. 최근 절정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만화가 허영만과 데뷔동기이지만 이른바 인기만화가는 아니다. 작품보다 장애를 극복하고 만화가가 됐다거나 한번도 정규교육을 받은 적이 없지만 만화가 지망생을 가르치는 교수가 됐다거나 하는 입지전 스토리로 더 유명하다.
이해경은 비장애인도 이루기 어려운 것들을 차곡차곡 이뤄냈지만 여전히 새로운 것에 도전한다. 그래서 다 늦은 나이에 자동차 운전을 배우겠다고 장애인 재활센터에 입원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불의의 사고로 하지마비 장애인이 된 사람들을 만난다. 장애인이 된 것에 대한 분노와 한탄도 들었지만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은 작가 자신처럼 장애인으로서 살기 위해 많은 준비를 하고 있었고 작가는 이들을 소재로 만화를 그렸다. 높은 자립의지를 지닌 7명의 장애인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작가 스스로가 장애인임만큼 각 주인공들에게 투영된 작가의 모습도 읽을 수 있다.
‘아기가 있어요’ 편에 등장하는 건우 엄마는 남편의 외도로 심적 고통을 받던 중 창문 청소를 하다가 밖으로 떨어져 하반신 마비 장애인이 된다. 남편이 찾아오지만 국가의 치료비 보조 혜택을 받기 위해 남편과 이혼하고 홀로서기 위한 준비를 한다.
‘이젠 하늘이 보여’ 편에 등장하는 현수는 집안의 희망이다. 그런데 대학교 MT에서 사고로 하반신 마비가 된다. 가난한 집안의 골칫덩어리가 된 현수는 절망의 나날을 보내다가 형의 희생적 간호에 힘입어 장애에 따른 정신적 휴유증을 극복하고 형과 함께 서기 위한 준비를 한다. 이처럼 각각의 에피소드는 사고로 인한 하반신 장애 발생, 마비된 신체와 변화된 현실에 대한 두려움, 장애 극복과 미래에 대한 자신감 회복 과정을 보여준다.
또 하나의 금기, 장애인의 성
이 작품이 지닌 미덕 중 하나는 장애인의 고단한 일상이나 벅찬 성공의 과정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이른바 ‘불쌍한 장애인’, ‘고난극복의 장애인’이라는 판에 박힌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하지 않는다. 어찌 보면 밋밋하다 싶을 정도로 덤덤하게 장애인의 일상에 집중한다. 그 덕에 그만한 감동을 찾을 길 없지만 장애인의 생활에 대한 이해가 차분하게 정돈되고 그들이 안타까워하는 문제에 접근하게 만든다. 과하게 외치지 않고 유머를 잃지 않으면서 장애인의 모습을 담아낸 까닭이다. 그리고 그간 논의 자체가 꺼려졌던 장애인의 성, 그중에서도 하반신 마비 장애인의 성적 욕망과 방식에 대한 에피소드가 차례대로 소개된다.
‘이방인’ 편에서는 섹시한 장애인 여성과 그에게 연정을 품은 상수가 등장하고, ‘잘됐어 잘 된 거야’ 편에서는 대기업 임원으로 격무에 시달려 가족을 챙기지 못했던 남편이 약물을 이용해 부부 관계를 유지하는 모습이, ‘첫날밤’ 편에서는 그토록 원했던 연인과의 첫날밤을 하반신 마비 장애인이 된 이후에 치루는 모습이 그려진다.
사랑하는 마음은 성관계, 임신, 출산, 육아로 이어지고 자립 능력이 없는 장애인이 육아부담을 지닐 수 있겠는가하는 문제로 귀결된다. 그래서 장애인의 신체적 활동 능력과 상관없이 장애인의 성은 논의대상이 되지 못했다. 보호 대상일 뿐 보호의 주체가 될 수 없다는 현실적 논리인 것이다. 반면 이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장애인들은 비장애인과 동일하게 연정을 품고, 욕망을 지니고, 사랑하는 마음을 확인하고자 한다. 장애인의 성에 대한 에피소드에서 임신과 육아의 문제를 묘사하고 있지는 않지만 다른 에피소드들이 장애인의 자립을 다루고 있는 만큼 장애인도 비장애인과 같은 만큼의 일과 사랑에 대한 열과 정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선천성 장애인도 모르는 후천성 장애인들의 이야기
모든 이야기는 누군가에게는 교훈이 되기도 하고 누군가에게는 삶의 모델이 되기도 하며, 누군가에게는 세상을 보는 지혜가 되기도 한다. 소아마비라는 선천성 장애를 지녔던 작가는 태어나면서부터 장애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성년이 된 후에 장애를 지니게 된 이들의 번민과 고통에 대해서 알지 못했다고 한다. 비장애인처럼 모든 것을 해봤고 할 수 있었던 입장과 장애인으로 태어나 장애인으로서 성장한 이들의 시각에는 많은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을 터. 마치 장애인에 대한 비장애인의 이해가 편협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작가는 후천성 장애인의 고통을 선천성 장애인의 시각으로 이해하고 있었다고 고백한다. 그를 통해 걸려진 이야기는 비장애인들이 하지마비 장애인의 삶을 이해하는데 소중한 지름길이 된다.
작가는 이들의 자립의지를 이상의 소설 ‘날개’에서 찾아낸 ‘겨드랑이가 가렵다’는 문구로 정리한다. 이들의 몸에서 돋아나는 날개는 새로운 환경과 변화를 받아들이고 성공적인 첫발을 내딛은 이들이 쟁취한 자신감이라는 자격증이다. 그들이 얻은 자립의지라는 자격증을 공인해줘야 하는 책임은 비장애인에게 있다. 비장애인은 알 수 없지만 장애인이 되면 비장애인이 누리고 있는 특권이 무엇인지를 말할 수 있다. 그래서 그들의 이야기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하고 비장애인의 특권을 하나씩 장애인에게 돌려줘야 한다. 특히 후천성 장애는 비장애인 누구에게나 생길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준비가 필요하다. 4월 한 달, 20일 하루만이라도 그들의 이야기에 머리와 마음을 맡겨 보기 바란다.
글. 박석환(만화평론가, www.parkseokhwan.com)
컬쳐뉴스, 민예총, 2007. 04. 18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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