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만화 ‘로맨스킬러’의 주인공 R는 청부살해업계의 지존이다. 로얄킬러라는 별칭을 지닌 그는 한 여자를 죽여야 한다. 그런데 표적 앞에서 꽃향기에 취하고 만다. 여느 유행가 가사나 익숙한 누아르 영화의 한 장면처럼 ‘사랑해선 안 될 사람을 사랑하는 죄’를 범하게 된다. 딸 하나 딸린 ‘꽃향기 여인’과의 7년이 쏜살같이 흐르고 킬러는 마흔 살 배불뚝이 아저씨가 됐다.
그러던 어느 날 딸아이의 학교를 찾은 킬러는 딸의 친구에게서 그 시절의 꽃향기를 맡는다. 이 부적절한 로맨스로부터 원조교제, 동성애, 근친상간, 살부 등 온갖 터부로 장식된 잔혹극이 펼쳐진다.
‘로맨스킬러’는 만화가 강도하의 두 번째 인터넷만화다. 인터넷 연재를 위해 세로로 길게 작업됐던 작품이 책의 규격에 맞게 재구성되어 출판됐다. 화려한 장정과 부피, 세심한 편집만큼이나 무게감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사실 대형 히트를 기록한 전작 ‘위대한 캣츠비’는 언더그라운드 만화계의 ‘위대한 도전자’였던 강성수(작가의 본명)를 기억하는 이들에게는 말랑말랑한 통속극이었다.
물론 절정을 넘어서는 단계에서 화풍을 바꿔 가며 보여 줬던 형식적 실험과 반전을 이끌어 내는 서사 구조는 여느 만화와 다른 매력이 짙었다. 그러나 만화라 이름 지어진 모든 것에 도전하고 저항하며 전시만화, 설치만화, 행위만화라는 맥락들을 생산해 낸 작가의 이력에 비춰 봤을 때 아쉬움이 있었다.
속된 말로 그 시절에 비해 나이도 들었고 가족도 꾸렸으니 말랑해졌다는 품평이 튕겨져 나오기도 했다. 그런데 ‘담배는 끊는 것이 아니라 참는 거잖아요’라고 묻고 답하는 ‘로맨스킬러’의 여고생처럼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참았던 전위만화가 강성수의 화려한 귀환을 알린다.
한 치의 오독도 허용하지 않을 듯 촘촘하게 구성된 서사와 삶의 무대에서 건져 올린 생생한 대사, 저 너머 세계를 탐닉하는 특별한 개인의 관념 그리고 작화에 쏟아 부은 공력과 투자가 어느 한쪽에도 치우침 없이 ‘로맨스킬러’라는 이름의 작품에 용해됐다. 제대로 관리된 웰메이드급 대중서사만화의 표본이다.
그런데 작품은 읽으면 읽을수록 새롭고(new), 예외성(exceptional)으로 가득하며 특유의 진지함(elitism)과 함께 뭔가 깊고(deep), 어렵다(difficult). 우리 만화계에서 쉽게 만나기 어려웠던 모더니스트, 아방가르드적 엘리트 아티스트의 모습 그대로다.
전직 킬러를 주인공으로 하지만 액션 활극은 아니고, 관습적 가족관이 만들어낼 수 있는 폭력성과 해체된 가족을 말하지만 사회비판극도 아니다. 늙어빠진 수컷도 ‘사소한 욕망’을 지닐 수 있다고 말하지만 섣부른 욕망을 용서할 만큼 ‘쿨’하지도 않다. 그 대신 작심한 듯 얼굴을 바꾸려 하지 말라고 한다. 처음과 다른 것, 의심 없이 달라지는 것, 상처가 있다고 변하는 것은 용서하지 않겠다는 투다.
죽어서라도 지켜야 할 것이 심장을 쿵쾅거리게 했던 그것임을 잊지 말라고 한다. 잊지 말아야 할 첫 울림. 이미 그게 뭔지도 모르는 삶을 살고 있는 탓에 이 작품의 울림이 더욱 강한지도 모르겠다.
글/ 박석환(만화평론가, www.parkseokhwan.com)
동아일보, 박석환의 만화방, 2007. 05.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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