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석환, [2006년 만화 결산] 만화불사(漫畵不死), 12척의 배가 있다, 컬쳐뉴스, 2006.12.27

무시무시한 적들이 떼로 몰려온다. 개인 문화소비 지출은 쪼그라들고 있는데 적들은 오색찬란한 빛을 발산하며 아군까지 유혹한다. 어쩔거나. 올해도 문제인데 내년은 또 어찌할까. 걱정 반, 믿음 반으로 코믹스(만화전문출판사), 대본소(만화방용 만화), 온라인(웹툰), 서점(일반출판사) 만화의 올해 이슈를 분석해보고 내년을 예측해본다. 꼽다보니 한숨이 절로 나오는 전함 12척 꼴이지만, 12척의 면면을 살피니 이순신의 12척인지라 정해년(丁亥年) 만화대전도 두렵지만은 않다.



1척, 만화상 하나 못 받은 코믹스


대원씨아이+학산문화사, 서울문화사로 양분되어 우리 만화를 대표하고 있는 코믹스계(A5판형의 만화책)는 올 해도 우왕좌왕(右往左往) 했다. 일본만화를 수입해서 번 돈으로 경쟁력 있는 한국만화를 기획, 창작하고 만화잡지를 발행한다는 주장도 이제는 뜬 금 없게 들린다.

올 해 만화계를 대표하는 3대 만화상에서 코믹스계 만화의 실적은 대표선수라고 하기에는 미비한 수준이다. 순위 없이 3편을 선정하는 오늘의 우리만화(한국만화가협회 주최)에서 박중기의 <단구>(학산문화사)가 뽑혔고, 부천만화대상(부천만화정보센터 주최)에서 코믹스계 순정인 유시진의 <그린빌에서 만나요>(서울문화사)와 전세훈의 <슈팅>(삼양출판사)이 대상과 청소년만화상을 수상한 정도이다. 문제는 한 해를 마감하는 가장 큰 만화상인 대한민국 만화대상(문화관광부, 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 공동주최)에서 코믹스계 만화는 단 한편의 본상 수상작도 탄생시키지 못했다는 점이다.


2척, 온라인과 독립만화계의 전진


총 5편이 선정되는 대상(대통령상)과 우수상(문화부장관상상)에서 온라인계로 분류되는 양영순의 <천일야화>(파란닷컴 연재), 박기홍・김선희의 <불친절한 혜교씨>(파란닷컴 연재), 박종원・심유수의 <골방환상곡>(네이버닷컴 연재)이 수상했고, 독립만화계에서 석정현의 <귀신>(길찾기), 장경섭의 <그와의 짧은 동거>(길찾기)가 수상했다.

특별상인 신인상과 인기상 부분에서 강형규의 <장화림>(만화잡지 ‘영챔프’ 연재 중), 박소희의 <궁>(만화잡지 ‘윙크’ 연재 중)이 선정되어 체면을 유지한 수준이다. 이쯤 되면 만화판의 우왕(右王), 좌왕(左王)이 바뀔 형국이다. 해당 출판사와 편집자들이 내년에는 더욱 바빠지겠다. 무관을 면하기 위해서라도 우리 만화의 신규 창작에 더 많은 공력을 기울이지 않겠는가. 만화판 외부까지 파도칠 수 있는 도전적 시도가 있을 것이다.       


3척, 구관이 명관이니 골라 찍는 복간작 히트


출판계의 불황이 장기화되고 도서시장 전반에 쉬운 책 읽기 열풍이 불면서 출판의 엄숙주의를 유지해왔던 일반출판사들이 만화를 찍기 시작했다. 이들에 의해 의미 있는 만화문화적 진전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기획출판이라기보다는 골라 찍기에 바빴다고 봐야겠다. 일반출판사들이 고급장정에 색다른 편집과 판형으로 걸작만화를 다시 찍기 시작하자 코믹스계 만화전문출판사들은 이를 흉내 내어 애장판이라는 이름으로 판형 바꿔 찍기에 나섰고, 대본계에서는 표지만 바꿔 찍기에 돌입했었다. 좋은 만화가 다시 읽히는 것이 어찌 불편할까. 그러나 이로인해 만화소비 시장 내에서 신작의 비중이 축소되고 신인작가의 발굴이 지연되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재판 발행이 비용 대비 손익 측면에서 효율적일 수 있으나 신인들의 데뷔가 지연되거나 기존 출판 시장에서 거부됐던 만화가들이 인터넷 등 다른 출구를 찾는다. 코믹스계의 하락, 온라인계의 상승이 괜히 일어난 현상은 아니다.


4척, 복간의 힘으로 얻은 파워를 대형 만화기획으로


내년에는 다시 찍고 싶어도 그럴만한 작품이 없다. 구석구석 찾아보면 모자를 수준은 아니지만 쓸 만한 작품은 모두 한번쯤 다시 나왔으니 골라 찍어서 효과보기가 쉽지 않다. 일반출판사들이 팔리는 책 찍어서 의미 있는 책 만들겠다는 신념을 지니고 있음을 안다. 그런데 만화 중에서 팔리는 책을 찍어 일어섰다면, 만화에게 의미 있는 책을 내는데 노력해야 할 것이다. 만화 찍어서 돈 벌고 인문서 내서 죽 쓰고, 만화 찍어서 만회하고 외서에 배팅했다가 자빠지고 하다보면 만화독자들이 등을 돌릴 것이다. 만화독자들은 일반출판사가 내는 만화들이 코믹스계 출판사가 하지 않고 있던 부분을 메워줬다고 믿는다. 만화독자들이 일반출판사의 책을 선택한 것은 더 큰 아쉬움을 메워달라는 요구임에 분명하다. 코믹스계 출판사와는 다른 접근방식의 재생산, 신규 창작에 매진해야 할 상황이다. 이미 몇몇 대형 기획들이 꿈틀거리고 있으니 기대해 볼 일이다.


5척, 학습・교양만화 한계 돌입


불황의 출판계와 힘 빠진 만화계가 일으켜 세운 시장이 학습만화분야이다. 생산자의 요구와 독자의 요구가 접점을 이루면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부분이다. 그런데 초기 이 시장을 일군 <만화로 보는 그리스로마신화>나 <마법천자문>은 학습요소가 있었으나 서사가 중심이 됐는데 지금의 학습만화는 학습이 중심이 되면서 유사 출판물의 홍수에 빠져 있는 형국이다. 교양만화로 분리되는 코믹스계의 전문 소재만화도 종수를 늘려가고 있으나 일본만화에 의존하고 있다. 허영만의 요리, 이상무의 골프, 이원복의 역사, 강철수의 바둑 소재 만화 등이 여전히 지식정보와 감동서사를 동시에 담아낼 수 있는 만화의 그릇을 상징할 뿐 그에 비할 만한 우리 작가의 시도는 미흡하다. <십자군 이야기>를 그렸던 김태권이 참여한 <삼인삼색 미학오딧세이>, <MBL카툰>을 그렸던 최훈의 <삼국전투기> 등이 아쉬움을 달랜 정도다.

문제는 내년이다. 학습을 전면에 내세운 에듀테인먼트 스토리텔링으로서의 만화는 그 익숙함 탓에 외면 받고 있음을 모두 알았을 것이다. 서사를 통한 통찰 없이 그저 만화로 그려진 핵심정리 사항은 더 이상 독자의 선택을 받지 못한다. 그런데 만화라는 것이 서사를 담기 시작하면 한두 권으로 끝나지지 않는다. 한 권짜리 ‘만화 천자문’이 즐비하지만 <마법천자문>은 총 20권에 400자 밖에 담지 않았다. 에듀가 엔터테인먼트가 되어 성공하려면 이쯤의 파격이 필요함을 생산 주체들이 독자의 선택을 통해 알아가고 있으니 그만한 신규 기획이 쏟아질 때다.


6척, 만화 끼리 경쟁하는 시대는 끝났다


서점의 한 쪽 귀퉁이에서 점정 중앙으로 진출하며 그 영역을 넓혀가고 있는 만화는 이제 만화책 끼리 경쟁하던 시절을 훌쩍 뛰어 넘었다. 이미 대본계 만화는 게임방과 경쟁하면서 자리를 내줬고, 코믹스계 만화는 인터넷, 핸드폰, MP3, 지하철무가지와 경쟁하면서 힘을 뺐다.

지금 서점에 웅크리고 있는 만화는 이제 같은 매대에 놓인 만화책끼리 경쟁해서는 곤란하다. 다른 매대에 꽂힌 활자로 된 인문서, 자기계발서, 경제경영서와 싸워야 한다. 제목과 품평, 마케팅으로 승부하는 인터넷서점에서 이미 그 싸움은 현실이 됐다. 그들과 겨루기 위해서는 단순 지식과 정보만 전달해서는 부족하다. 서사를 통한 감동과 이에 따른 깊은 통찰을 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에듀테인먼트로(학습)서의 서점만화가 아니라 엔터테인먼트(오락)로서의 만화, 익사이트먼트(흥분)로서의 만화가 서점으로 가야한다. 물론, 책이 지닌 근원적 가치를 포기한 흥분물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7척, 무크지를 통한 자가발전


만화무크지가 재등장했다. 비정기적으로 발행되는 무크는 그 형식적 특징 상 여러 만화가가 특정 이슈를 중심으로 창작한 단편만화를 수록하거나 지향점이 같은 또래 만화가들의 모음집 형태를 취했다. 90년 대 말 만화잡지 붐과 함께 시도됐던 만화무크는 일종의 보너스 같은 것이었다. 시장 판매는 기대하지 않지만 만화가들에게 연재만화 창작의 피로함을 잠시 잊게 해주고 일부 독자들에게는 해당 만화가의 색다른 시도를 보여주고자 했던 출판사의 배려 또는 편집자의 노력의 산물이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때는 그 정도의 여유를 보여도 괜찮을 만큼 넉넉했다.

그런데 시장 변화의 거친 파도 위에 몸을 실은 올해의 만화무크 붐은 좀 다른 모양이다. 새만화책의 ‘새만화책’, 거북이북스의 ‘밥’, 프로젝트그룹마노의 ‘국제강한연구소’, 여성만화인협회의 ‘세나클’ 등이 무크에 준하는 형식을 취해 발표됐다. 간단히 정리하자면 만화대학 출신 작가진이 주축이 되는 차세대 만화 생산자 그룹이 등장했으나 코믹스계의 불황 등이 이유가 되어 작품 지면이 줄어들다보니 단편만화 모음 및 만화가 연대의 모양으로 도출됐다고 봐야 할 것이다.


8척, 휴일창작자의 등장과 단편만화의 매력


단편만화의 문제는 연재만화가 지속적인 창작지면과 창작동력(원고료)을 제공하는데 비해 일회적이라는 부분이다. 이에 따라 좋은 만화가가 있다 해도 전업 만화가로서 생활을 영위할 수 없게 된다. 이미 다수의 창작자들이 게임일러스트나 출판일러스트로 생계를 유지하고 만화는 휴일 창작 거리로 삼고 있다. 그러나 이 같은 문제 요소에도 불구하고 만화가들의 여유로운 결실이 뭉쳐지는 만화무크의 발행은 그 자체로 많은 의미를 지닌다. 특히 단편만화는 만화가들이 장편 만화에서 시도하지 못했던 다양한 소재와 새로운 시도가 가능하다. 반복적인 싸움이나, 비비꼬는 연애심리로 쌓아올린 서사의 탑보다 좋은 단편만화가 던지는 화두와 통찰은 강렬하다. 또한 사회적 현안에 대한 만화가와 편집자의 발언을 직접적으로 담을 수 있다. 아쉬운 심정 반, 기쁜 마음 반으로 만화무크 속 단편 만화의 재미를 기대해 보자.


9척, 당연하게 지속되는 만화원작산업


이제 만화 원작을 소재로 영화나 드라마가 탄생하고 게임이나 소설이 만들어지는 일에 그다지 놀라지 않아도 된다. 소설을 영화화 하면 당연한데, 영화를 소설로 내면 뉴스가 되는 그런 세상이 아니다. 언론은 올 한 해 만화가 영상매체로 탈바꿈한 것에 대해 관행적인 형태의 보도를 내보냈다. 강풀 원작의 만화 대부분이 영화화 계약을 체결했고 허영만의 만화가 영화화되어 대박 사례를 만들었다. 이현세, 김수용, 신영우, 천계영, 신지상 등의 작품이 내년 시즌에 개봉을 준비하고 있거나 방영이 결정됐다. 형민우의 작품은 허리우드에 판권이 팔리기도 했다. 그런데 이 같은 매체 간 영역파괴와 근접조우, 공동마케팅은 만화와 영상매체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이미 방송인이라는 모호한 정체성이 확립된 것처럼 가수가 연기도 하고 개그도 한다. 음반 내용을 소재로 한 만화가 씨디로 팔리고, 만화 내용을 소재로 한 음반이 책으로 팔리는 그런 세상이다. 그러니까 아주 당연하고 더욱 활발해질 자연스런 현상을 더 이상 과장할 이유는 없다.


10척, 새로운 매체와의 조합과 저작권


언론의 관행적 보도가 아쉬운 대목은 이 같은 현상을 필요이상 강조함으로서 영화화를 염두에 둔 만화창작, 게임제작을 염두에 둔 만화창작이 성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특정 장르와 형식, 동일 소재 만화가 칸칸이 쌓이는 만화편의점을 만들 뿐이다. 이제 우리 만화판은 좀 더 색다른 조합을 찾아내야 한다. 그리고 이 같은 조합이 만들어내는 가치에 대해 공정한 배분율을 재정립해야 한다. 현재 만화계는 부단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불법서버에 올라와 있는 수많은 스캔만화들을 어찌하지 못하고 있다. 이처럼 영화, 드라마 등으로 성장하고 있는 작품에 대한 정당한 판권료 책정 룰도 고민하지 못하고 있다. 또 하나는 만화의 젓줄로 성장한 다른 매체가 있다면 새로운 만화작품을 만들고 여기에 가치를 부여하는 일에도 함께 나서야 한다.


11척,  온라인으로 뛰어드는 만화가들


올해 만화 생산 진영에서 쏘아올린 최대의 이슈는 코믹타운 개장이다. 11월 3일 만화의 날을 기해 베타오픈 한 코믹타운은 만화가협회장인 이현세가 만화 관련 단체와 인력들을 중심으로 제작한 만화포탈사이트이다. 코믹타운은 정부 및 관련 기관, 외부 업체의 참여 등을 만화가들이 직접 유치하여 추진한 프로젝트이다. 만화가들이 온라인에 작품을 등록하고 자체적으로 이를 관리 할 수 있도록 하는 플랫폼을 제공한다. 창작지원금을 조성하여 신규 창작을 지원하고 참여를 확대할 방침이다. 이 같은 방식은 출판사의 전략에 의지해야 했던 만화가들에게는 독립선언에 가까운 것이다. 매체 환경의 거대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근시안적 미봉책과 한치 앞 사정만 토로하는 만화출판사와 만화포탈 서비스업체에 대한 창작진영의 반격이다. 이미 인터넷을 중심으로 이른바 웹툰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젊은 만화가들이 다수의 성공 사례를 지니고 있고 공유와 참여를 주도하고 있는 웹 환경이 일반화되고 있어서 중견만화가들의 결정도 빨랐다. 이미 500여 명의 만화가들이 이 사이트에 작품을 올리기 위한 준비를 끝냈다.


12척, 만화책에서 만화로 인식전환


코믹타운의 소식이 전해지면서 만화판의 디지털화 요구도 거세졌다. 온라인만화에 부정적인 시각이 지배적이었던 만화출판사들도 만화잡지를 만화웹진으로 전환했고, 유명 포탈사이트를 유통망으로 한 만화웹진을 창간하기도 했다. 포탈사이트가 직접 만화웹진의 창간을 주도한 사례도 있고 만화포탈 서비스업체의 경우는 사라졌던 온라인 연재만화를 속속 부활시키고 있다. 종이만화를 중심으로 구축된 사고체계가 환경의 변화에 맞춰 하나둘씩 변하더니 종이에 대한 철학 자체가 달라지고 있는 것이다. 잘됐다. 애당초 만화를 종이에 그렸고 종이책으로 냈으니 ‘만화+책’인 것 아닌가. 우리 만화가 버리지 말아야 할 것은 ‘만+화’이지 꼭 종이 책이어야 할 필요는 없는 일이다. 올 해의 이 같은 인식 변화는 매체 환경의 진보적 발전과 함께 한차례 더 소용돌이 칠 것이다. 와이브로 인터넷과 유비쿼터스 전자책 환경, 개인형 미디어기기의 진화가 차례차례 이루어지고 있으니 올해의 전진은 뒷북이 될 수 있다. 그럼에도 첫 걸음을 내디뎠으니 두려울 일이 무엇인가. 한 걸음 내딛으니 만화2.0의 시대에 들어와 있지 않은가 말이다.


글. 박석환(만화평론가, www.parkseokhwan.com)


컬쳐뉴스, 민예총, 2006. 12. 27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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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평론가 박석환 홈페이지. 만화 이론과 비평, 웹툰 리뷰, 인터뷰, 보도자료 등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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