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석환, 허영만 만화는 영상세대의 문학이다, 만화규장각, 부천만화정보센터, 2006.11


또 하나의 원 소스 ‘타짜’


영화 ‘범죄의 재구성’으로 호평을 받았던 최동훈 감독의 두 번째 작품 ‘타짜’가 관객몰이에 성공하면서 만화 원작의 영상화 작업에 대한 가치가 높아졌다. ‘타짜’는 개봉 이전 작품적 성취와 관계없이 흥행이 어려울 것이라는 관측이 있었다. 개봉 일정이 영화계의 흥행 시즌 중 하나인 추석에 잡혀서 대작 영화들과 힘겨루기를 해야 했고 극중 몇몇 씬 때문에 미성년자 관람불가를 받아서 가족 관객을 포기해야 했다. 더군다나 ‘바다이야기’라는 사행성 오락게임 파문으로 전국이 도박의 사회적 문제로 들 끊고 있던 터라 영웅적 주인공의 도박 소재 이야기를 대중이 선택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그러나 일각의 걱정과 달리 영화 ‘타짜’는 박스 오피스 1위를 기록했고 미성년자 관람불가 영화 중 역대 2위의 관객을 동원하는데 성공했다. 

색다른 소재와 전형적 캐릭터, 강력한 서사성과 지식정보로 대표되는 허영만의 만화는 이미 십 여 편 이상이 영화나 방송 드라마로 제작됐고 대다수의 작품이 기록적인 흥행 성과를 낳았기 때문에 또 하나의 흥행 실적을 이슈화 시킬 까닭은 없다-허영만 만화를 원작으로 한 파생상품이 흥행에 성공하는 것은 이제 당연한 일 아닌가. 주목할 것은 영화 개봉 시즌에 감독과 배우보다 그리고 원작보다 허영만에 대한 보도 기사가 넘쳐났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영화사의 마케팅 전략도 한 몫 했겠다. 도박으로 세상이 시끄러운 통에 일확천금을 노리는 주인공들의 탁월한 스펙(Spec)을 홍보한다는 것이 부담스러웠을 터. 때문에 도박 소재(素材, material)가 아니라 독특한 소재, 영화 주인공이 아니라 허영만이라는 만화가를 영화 홍보의 중심에 두었다고 봐야할 것이다. 


우리 시대의 문화 아이콘 ‘허영만’


다수의 만화가가 그렇지만 유독 허영만은 ‘독특한 소재’라는 부분에 집중되어 있는 창작자이다. 허영만이 다룬 만화 소재는 30여 년 간의 창작기간 만큼이나 넓고도 깊다. 작가 역시 기회 있을 때마다 새로운 소재를 찾기 위해 쉬지 않고 현장취재에 임하는 모습을 노출했다. 이 때문에 독자들은 그의 이야기가 지닌 매력만큼이나 이야기에 담긴 소재에 대한 깊은 지식과 정보를 섭취해왔다. 그리고 이번 시즌에 대중은 ‘허영만 만화’가 아니라 ‘허영만’이라는 대중문화사적 이미지 자체를 양껏 소비했다. 최근 공개된 허영만의 소주 광고는 이현세의 전성기 시절 맥주 광고만큼이나 매력적이었다. 새로운 도전으로 자기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유명인을 모델로 내세우고 있는 이 소주광고는 허영만을 ‘만화를 예술로 승화시킨 만화가’라고 소개한다. 예술이라는 단어에 거부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 만화를 소수 문화에서 다수의 문화로 확장시켰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수사로 읽으면 될 것이다-이즈음에 예술은 더 넓고 객단가가 높은 소비층을 지닌 표현물을 분류하는 지칭에 불과하다. 

30년 간 그의 작품을 소비한 우리 시대에게 ‘허영만’은 단순한 만화가가 아니라 통과의례적 추억일 것이다. 그리고 각자의 추억만큼이나 편리하게 잊혀졌다가도 찡하게 떠오르는 현실 너머의 세계이다. 이 아이콘은 누구에게나 기억되고 어디에서나 재생되어 각자의 용도에 맞게 활용되고 있다. 마치 지금 만화가 우리 대중문화계의 구원투수이자 멀티플레이어가 되어 콘텐츠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처럼 ‘허영만’이라는 아이콘은 무한 가능성의 준말이 되었다. 미디어 철학자 마셜 맥루한은 ‘인간의 오감을 확장시켜주는 모든 매체는 새로운 비전과 인식을 제공해준다’고 했다. 이 말을 좀 빌리자면 지금의 허영만은 우리문화의 오감을 확장시켜주고 새로운 비전과 인식을 제공해주고 있다 할 것이다. 


30년의 미덕, 첫 번째 수용자를 움직이는 힘 


유럽에서는 만화가가 사고를 치면 철학자가 이를 해결하고 과학자와 장사치들이 돈을 번다는 이야기가 있다. 매우 창의적인 만화가의 상상력 가득한 작품이 철학적 화두를 만들고 이 논의가 과학적 성과물로 생산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이는 그간의 허영만 만화에 대한 논의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의 만화가 대중사회에 하나의 트랜드를 만들어내고 언론과 학계는 이에 대한 의제를 설정하고 있으며 문화산업계는 이를 통해 이득을 취한다. 이는 문화산업 이론 중 하나인 원 소스 멀티 유즈의 시간축, 생산축과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이 과정에서 허영만 만화는 익숙한 설화가 되고 허영만은 기존의 만화와 다른, 자신의 전작과 다른 신작을 창작하기 위해 노력하는 혁신리더의 모습으로 신화화 된다. 그래서 우리사회에서 허영만이라는 브랜드는 ‘새롭고 흥미로운 이야기’라는 브랜드가치를 생산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허영만 만화와 허영만만 있는 것이 아니다. 브랜드 활동의 주체인 수용자의 입장이 있다. 특히 콘텐츠로서의 허영만을 논하기 위해서는 허영만 만화를 다른 매체 상품으로 재해석해서 일반 수용자에게 전달하는 매개자, 즉 첫 번째 수용자에 집중해야 한다. 스포츠신문 광고주와 편집장이 가장 선호하는 연재만화 작가는 단연 이현세, 허영만이라고 한다. 여기에는 높은 인기도와 활동시기만큼의 신뢰도가 작용하고 있다 할 것이다. 두 사람 외에도 다수의 능력 있는 중진 작가가 스포츠신문 일간연재 경험을 지니고 있지만 언제나 1선에서 논의되는 것은 두사람이다. 즉, 광고주와 편집장에게 선택되어야 대중에게 수용될 기회를 얻게 된다. 

허영만 만화는 극장용 애니메이션, TV 애니메이션, TV드라마, 영화, PC게임, 모바일게임 등으로 제작됐다. 연재만화의 흥행이 실패로 끝났다면 이 같은 파생 상품의 생산은 불가했을 것이다. 그러나 만화의 소비층과 공중파 방송의 소비층이 그 규모를 달리한다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마지막 수용자가 아니라 첫 번째 수용자, 즉 매개자로 나선 기획자나 PD의 입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할 것이다. 허영만 만화를 발견하고 ‘새로운 비전과 인식을 제공’ 받아 재해석된 상품을 개발한 이 첫 번째 수용자 그룹을 일찌감치 정의하자면 ‘영상세대’이다. 

이전 세대가 문자에 의한 지식의 축적과 사고의 성숙, 직접적인 커뮤니케이션 활동에 나섰다면 이들은 영상에 의한 지식과 사고의 체험, 은유적인 커뮤니케이션 활동에 익숙한 이들이다. 이들에게 만화는 영상과 문자 사이에 놓여있는 정영상으로 이해되고 있고, 영상이 실제적 재현의 어려움과 비용의 제약을 지니고 있는 것과 달리 만화는 어떠한 제약도 없는 자유로운 표현 형식으로 이해된다. 또한 책의 형식을 취한 만화는 수용자의 의지에 따라 메시지와 서사를 임의로 조정할 수 있는 비선형성을 확보하고 있다. 이는 현재적 의미의 사이버커뮤니케이션, 디지털 스토리텔링의 특성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허영만 브랜드로 승부하는 멀티 유즈 전략


영상세대는 문자, 정영상, 영상, 멀티미디어, 하이퍼미디어 등 전혀 다른 형식의 미디어에 대한 경험치를 고루 지니고 있다. 스토리와 텔링에 있어서 연속그림 이야기와 책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만화의 효용성과 가치에 대한 인식이 높다. 이들에게 있어서 마술처럼 현실을 재현하고 환상적인 시청각적 체험을 가능하게 했던 영상이 그 압도적 위용으로 인해 ‘수동적인 응시(passive contemplation)’를 강조하는 미디어였다면 문자와 만화는 ‘능동적인 사고(active thinking)’가 바탕이 되는 미디어였다. 특히 문자의 엄숙성과 거리를 두고 있던 만화는 면과 칸, 각종 기호들의 집합으로 수용자의 적극적인 소비 의지가 개입되는 참여의 예술이다. 

현상학자 로만 잉가르덴이 문학을 전제로 논한 것과 같이 ‘미결점을 채우기 위한 보완적 결정(complementing determination’)이라는 독자의 주도적 의지가 있어야 해독 가능한 것이 곧 영상세대에게 있어서의 만화이다. 특히 이 미결점에는 작품이 전달하는 메시지의 전체로부터 독립될 수 있는 자율적인 의미 층인 이야기가 존재한다. 이 이야기는 그것을 전달하는 기술로부터 독립적이다. 그것은 그 본질적인 특성들을 상실하지 않은 채 한 매체로부터 다른 매체로 재해석되고 파생될 수 있다. 즉 만화의 이야기는 표현방법을 가리지 않고 어떤 매체로의 변환도 가능하고, 미결점 채우기 식의 자유로운 수용도 가능하다. 

스토리텔링으로서 만화가 지닌 이 같은 장점과 이에 대한 경험치를 지니고 있는 문화기획자 그룹이 만화 스토리텔링의 새로운 가치를 발견해내고 있는 것이다. 허영만은 이들에게 우리문화의 새로운 비전과 인식을 만화에서 찾도록 인도하는 우리만화의 등대이다. 


글/ 박석환(만화평론가, www.parkseokhwan.com)


만화정보, 부천만화정보센터, 2006. 11/12월호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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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평론가 박석환 홈페이지. 만화 이론과 비평, 웹툰 리뷰, 인터뷰, 보도자료 등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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