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석환, 검정 선과 하얀 면이 만화의 색, 코코리뉴스레터, 1998.06.25



- 만화의 칼라화, '꿈꾸기'의 걸림돌이 될 수 있다. -


까치가 입었던 청자켓의 색깔을 궁금해한다. 자켓의 이름에 규정돼 있듯 청색일 뿐인 것을 여러 밤을 세워 고민한다. 

그가 가진 머리칼과 피부색 역시 그처럼 궁금하다. 컬러TV와 영화에서 받은 느낌이 그대로 전이된 까닭일까? 영상이 지닌 다양한 색감(色感), 그것에 대한 경외감 탓일까?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만화의 여백, 누리끼리한 그 공간이 주는 느낌 탓이다. 


만화는 두 가지 색을 지녔다. 


그 시절의 만화는 그랬다. 만화는 두 가지 색을 지녔었다. 선(線)의 색과 면(面)의 색. 검정과 하얀 색뿐이었다. 스크린 톤의 사용이 지금 같지도 않았다. 기껏해야 라인과 도트, 그리고 이를 응용한 그라이데이션 정도가 사용됐다. '신경 좀 썼는데'하는 컷에서야 손수 만든 패턴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때의 선과 면에는 수많은 색감이 있었다. 지정하지 않음으로 인해 독화자(讀畵者) 스스로가 선택하고, 꿈꾸게 하는 놀라운 색감이 검정 선과 하얀, 또는 검정 면에서 읽혀졌다. 아마도 작가는 이를 읽어내는 독화자를 위해 등장인물의 표정과 몸짓, 성격 등을 더욱 디테일하게 묘사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독화자의 능수 능란한 상상력에 당위성을 주기 위한 장치로서 사실보다 사실에 가까운 묘사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작가들은 색감을 통해 독화자와 이야기하는 방법을 잃어버렸다.


작가의 창작물이 지닌 색과 독화자가 꿈꾸는 색


까치를 비롯한 수많은 영웅들이 그들만이 지닌 고유한 색을 잃어버렸다. 출판물의 고급화에 따라 칼라인쇄물이 등장하면서 등장인물들은 색을 지니게 됐다. 책표지 일러스트로 제한되던 것들이 속지에도 사용됐다. 그리고 캐릭터의 상품화는 모든 만화주인공들에게 색을 지닐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그것은 독화자의 영웅이 지닌 색이 아닌 작가의 창작물이 지닌 색으로 나타났다.

독화자는 저마다의 일상과 공상을 통해 작품을 읽고, 저마다의 방법으로 등장인물을 이해한다. 여기에 독화자가 만화매체의 색으로 여겨왔던 검정 선과 하얀 면은 중요한 요인이 된다. 만화의 칼라화는 결국 독화의 한 방향성을 차단하는 것이다. 작가들이 만들어준 색은 채색이 가능한, 인쇄물에서 가능한 색일 뿐이지 독화자가 읽어낸 색과는 거리가 있다.

까치의 청자켓은 확신형 인물이었던 『공포의 외인구단』에서와 비확신형 인물이었던 『지구에 매달리기』 등에서 같은 색으로 나타난다. 가령, 등장인물이 검정 선과 하얀 면만으로 표현되었을 때, 『공포의...』에서 오혜성의 자켓은 너무 오래 입어 색이 다바래고, 굴곡 많은 삶을 대변하듯 숱한 얼룩이 묻어있는 색일 거라 믿게 된다. 그 믿음은 이야기전개를 위한 작가와 독화자의 합의와도 같다. 그러나 칼라원고에서 오혜성이 입고 있는 자켓은 독화자의 팬시 취향을 만족시킬 뿐, 작품 내적인 어떤 역할도 해내지 못한다. '이렇게 해맑은 파란색의 자켓을 입은 사람에게 이런 혹독한 삶은 어울리지도 않아' 하는 식의  숱한 경계 감만을 주는 것이다.

요즘 한창 소년 만화계의 '짱'으로 자리잡고 있는 『짱』의 현상태 역시 이러한 의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존재다. 작품을 벗어난 현상태는 일러스트 화보, 포스터 등 각종 팬시용품들 속에서도 존재한다. 그러나 그가 이러한 공간에서 존재할 때는 묘한 거리감을 느끼게 한다. 마치 실재 톱스타들이 사진촬영만을 위해 좋은 옷을 입고, 한껏 폼을 잡고 있는 듯한 모습이다.

인천을 주무대로 활동하는(?) 현상태는 자타가 공인하는 스트리트파이터다. 시쳇말로 의리 빼면 시체라고 할만한 인물이며, 싸울 때를 제외하면 적당히 어수룩하기도 하고, 모범생 흉내를 내기도 한다. 그런 인물이 힙합바지를 입고, 쫄티에 고글을 끼기도 한다는 설정은 결국 '만화니까!'하는 식의 이해를 요구한다. 물론, 만화작품과 팬시상품을 전혀 별개의 무엇으로 인식할 수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하지만 대중은 그렇지도 못하다. 작품 속에서나 과자봉지 속에서도 둘리는 여전히 아기공룡이고, 최민수는 언제나 터프가이일 뿐이니까 말이다.


당대의 고민을 표현 가능한 색의 나열로 종결짓지 말라.


세상이 얼마나 변했을까? 아니 사람이 얼마나 변했을까?

98년 6월 현재 웬만한 만화의 등장인물들은 저마다의 색을 지니고 칼라풀한 모습을 선보인다. 책표지, 화보용 브로마이드, 전통적 셀 애니메이션, 팬시상품 등을 통한 2D일러스트를 시작으로 애니메이션, 컴퓨터게임 등을 통한 3D일러스트에서 까지.

그러나 여전히 출판만화는 그 제작공정의 어려움이나 경제적 고려에 의해 단색 출판이 지배적이다. 하지만 이제 독화자는 더 이상 기존의 방식으로 작품 감상에 임하지 못한다. 여러 경로를 통해 인식한 등장인물의 고정화된 색을 대입하며 작품에 접근한다. 즉, 표현 가능한 색을 지닌 나름의 영웅과 만나게 된다. 이는 표현 가능한 꿈으로 연계되어서 독화자의 꿈꾸기를 막는 요인이 된다.

  물론, 만화의 칼라화가 보편화된다면 다시 이야기는 원점으로 돌아가도 좋다. 만화의 칼라화는 분명 '발전중' 임을 알리는 까닭이고, 이 글은 변화하는 작법을 따르지 못하는 자의 넋두리에 불과한 까닭이다.

그러나 문제는 '검정 선과 하얀 면'의 칼라풀한 대체만에 있는 것은 아니다. 즉, 검정 선과 하얀 면에서 색감을 이끌어내기 위한 '당대의 고민'이 '표현가능한 색의 나열'로 종결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과거의 작가들이 검정 선과 하얀 면을 통해 사실성을 이끌어내기 위해 활용해왔던 작품 내적인 장치들-연출의 묘를 통해 색감을 이끌어내는 노력 등의 움직임-은 더욱 진지한 고민을 통해 형상화 되야 할 것이다. 


글/ 박석환(만화평론가, www.parkseokhwan.com )


코코리뉴스레터, 한국만화문화연구원, 1998. 6. 25

만화시비탕탕탕, 초록배매직스,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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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석환(만화평론가, 한국영상대 만화콘텐츠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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