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언더그라운드(under ground)와 오버그라운드(over ground)의 경계가 만들어지고 있다. ‘새로움’, ‘도전적’, ‘독창적’ 등의 휘황찬란한 어휘를 온 몸에 두르고 ‘언더그라운드’가 등극하고 있다. 얼마 전까지 '작가주의', '비주류'라고 회자되던 이들도 이젠 케케묵은 ‘오버’가 된다. 그를 밀치고 ‘그라운드’를 차지하려는 ‘언더’의 목소리가 너무도 큰 탓이다. 그들의 주장은 한결같다. ‘오버’는 그저 ‘나쁨’과 동의어 정도라 표한다. ‘언더’는 그들의 원류에 무엇이 있었든지 간에 자기만의 그라운드를 차지하기 위해 ‘오버’를 규정하고 분리한다. 그런데 또 이건 무슨 일인가? 그 어떤 외압에도 굴하지 않고, ‘자기들만의 방’을 지키고 있던 ‘오버’들의 반격인가? 만화판이 다시 짜여지고 있는 느낌이다. 그렇듯 당당하던 잡지만화들도, 숨어있기만하던 만화방 만화들도, 피해의식에만 사로잡혀 있던 서점용 만화들도 창작형식에서부터 유통구조까지를 바꾸고 있다. ‘언더’의 전략을 흉내내고 있는 것이다. ‘언더만화’의 이야기하기, 그림 그리기 등을 따라하고, 또는 ‘언더’의 대표주자들을 영입하면서, ‘오버’의 율법에 맞는 ‘新언더’를 조작해낸다. 즉, ‘언더’라는 상품성을 사고 파는 새로운 시스템이 지금 운영되고 있는 것이다. 무엇도 바뀌지 않을 것 같던 만화판을 더없이 혼란스럽도록 바꾸어버린 ‘언더’들. 혼란을 제공한 이들을 알아보자. ‘언더’를 알아보자.
그때, 언더가 잉태되고
그렇다. 다시 80년대를 이야기하는 수밖에 없다. 우리에게 현대는 80년대를 시작으로 작용한 것처럼 믿어도 좋을 만큼 그 시기의 이야기들은 풍성한 실타래와 같다 - 물론 뒤엉켜버려 그 많은 고민들을 만들어냈지만.
80년대는 잔혹한 일상을 되새김질하는 것으로 기억된다. 민중과 군사정권의 격돌, 노동자와 자본가의 가열찬 대립은 새로운 세기에 대한 희망의 국면(?)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러나 반공이데올로기와 산업화의 땀방울은 시대의 요구를 부당한 것으로 간주했다. 이런 와중에 애끓는 국민의 정서를 다독일만한 문화정책들이 의도적, 또는 자생적으로 일궈지며 90년대를 오라 했다. ‘우리가 사랑하는 만화’도 그와 다르지 않게 다가왔다. 군사정권의 대국민 위안책 중 초기 히트작이었던 프로야구는 이현세 등을 위시한 야구만화의 전성기-이전 고교야구를 소재로한 만화가 오동촌, 이상무 등을 통해 창작되기도 했었으나 단체경기를 통한 우정과 화합이 주를 이루었다-를 만들어냈고, 이는 곧 만화방 만화의 전성기였다. 피끓는 복수와 애증이 이율배반적인 협력관계를 지속시키게 했고, 절대자와의 대립이 힘의 논리를 최상의 해법으로 만들면서 출판만화의 고유한 형식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심심풀이 오징어 땅콩’보다 나을게 없던 만화가 대중적인 히트를 통해 새로운 의사소통로로 각인됐다. 새로운 문화예술장르로 이해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사랑했던 만화의 또 다른 모습이 움터오고 있었다. 그들의 영역은 지상이 아닌 지하였으며, 그들의 자양분은 햇님이 아닌 달님이었다. 소위 ‘민중만화’라 규정되며 혼란의 시대를 가늠하는 척도로 자리잡기 시작한 것이다. 80년대 말경 민중문화운동을 전개하고 있던 이들과 학내 외 운동권들에 의해 단순하고 직설적이면서도 은유로 그득한 ‘만화’가 지목되기 시작했다. 마당그림, 작화공방 등을 필두로 만화의 매체적 특징을 활용한 ‘민중운동’이 펼쳐진 것이다. 이들 만화운동은 국내 정치상황의 불안요소로 인해 대중적인 지지도를 만들어냈고, 만화매체의 효용성에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게 했다.
지상으로의 첫발
80년대 말 가장 성공적인 만화전문지로 기록되는 《만화광장》과 《주간만화》는 우리만화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틀을 제공한다. 만화제작 시스템의 기형적 발달로 인한 만화방용 만화의 저급한 수준은 잡지만화의 본격적인 개막으로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게 된다. 만화방용 만화가 대여를 목적으로 제작 유통되었던 것에 비해 잡지만화는 가판판매라는 새로운 유통구조를 제시했다. 《만화광장》은 만화의 대중성과 작품성을 동시에 수용하기 위한 많은 노력을 기했다. 여기에 ‘성인용’이라는 성적은유로 그득한 장르구분용어를 ‘성년의 사고력을 지닌 이들을 위한’ 것으로 전환시키려는 의지도 함께 보였다. 이 과정에서 소위 리얼리즘 작가로 치부되는 이희재, 박흥용, 오세영 등이 등장하게 된다. 《만화광장》은 만화이론가들을 통한 평론작업과 이론화 작업에도 열띤 모습을 보였다. 90년 초입으로 접어들면서 민중문화운동가 출신이었던 만화이론가들은 우리만화의 새로운 본령을 대중에게 제안하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그것이 이른바 ‘만화평론’이었고, 만화의 가벼움이 아닌 진지함을 보이기 위해 노력했다. 이들에게 일반적으로 알려진 스타작가의 위상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차라리 그들과 상반된 새로운 작가를 제시하여 만화에 대한 인식의 틀을 깨고자 했던 것이다. 그렇게해서 다시 한번 비주류작가들의 전성기가 구가된다. 그리고 그들이 대중적인 영향력을 권고히하게 되었을 때, 우리만화에 ‘언더그라운드’라는 지명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즉, 시장의 성장과 대중적 인식의 변화가 언더그라운드를 도출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새소년》, 《어깨동무》, 《소년중앙》등 초창기 잡지만화의 독자가 작가로 전환되는 시점과 《보물섬》을 이후로 급격한 성장세를 보였던 출판만화가 영역확장을 이루는 전후시기를 통해 만화애호가들의 창작집단이 생성됐다. 극화가 주류를 이룬 만화판에서 비주류로 통하던 카툰은 민중문화운동 진영에 의해 ‘민중만화’라는 형태로 활용됐다. 만화방 만화의 전성시기에 사장될 처지에 놓여있던 순정만화가 일반의 관심을 고조시키며, 독특한 장르만화로 기록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만화의 가벼움을 넘어서려는 작가들의 기운찬 문제의식이 새로운 만화실험을 이끌었다. 하지만 그들에게 표현의 장을 제공하기엔 우리만화의 시장과 대중적 이해도는 아직 미흡했다.
‘언더’여 연대하라
국내의 ‘언더그라운드’ 만화작가군은 대개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첫째, 기존의 상업출판사를 통해 등단한 이후 국내 창작 풍토에 적응하지 못하고 듬성듬성 작품활동을 하는 층. 둘째, 동호회 활동과 동호지를 통한 창작만을 고집하는 층. 프로를 지향하는 아마추어 작가군, 또는 만화가 수련생을 언더그라운드작가에 포함시키는 이들도 있지만 국내의 상황과는 맞지 않는다. 이들은 상업만화시스템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상업만화지로의 유입을 경계하는 이들이다. 셋째, 만화계와는 별개의 공간에서 만화의 매체적 특성을 빌어 활동하는 층을 들 수 있다. 이들의 만화가 보여주는 것은 ‘다름’으로 대표된다. 그것은 다양한 형식실험을 통해 이루어지기도 하고, 제한적이지 않음으로 인해 제한받고 있는, 만화스토리의 다양성으로도 표현된다. 그러나 이런 움직임과는 별개로 일반 대중과 언론이 만화를 대하는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만화는 언제나 아이들 곁에서 존재하고 있었지만, 언제나 아이들을 해하는 흉물스런 매체로 오도됐다. 이에 불끈한 비주류작가군에서 ‘바른만화연구회’를 결성하는가 하면 ‘우리만화협의회’로 해쳐모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이들은 서서히 지하공간에서 벗어나기 시작한다. 물론 군정의 종말과 시대의 변화는 이들 진영이 지하공간에서 가졌던 ‘쓸모’를 무의하게 만들었다. 결과적으로 이들은 자신들의 또 다른 ‘쓸모’를 인정받기 위해 대외 공간으로 나선 것일 수도 있다. 이제 이들의 진영은 둘, 또는 셋으로 규정된다. 그 하나가 우리만화협의회가 발전적으로 해쳐모인 우리 만화 발전을 위한 연대 모임(우만연)이 될 것-물론, 이 단체의 성격을 언더로 규정한다는 것은 위험천만한 발상이다. 그러나 그들을 움직이는 힘과 동력은 분명 ‘언더’의 그것이다-이고, 다른 하나는 ACA(전국아마추어만화가 협의회)가 될 것-이 역시 어떤 형태로든 만화판에서 이름 석자 남기겠다는 국적불명의 창작 혼을 지닌 이들과 그렇지 않은 이들이 혼재되있다. 이 곳에서도 역시 작품이 아닌 그들의 활동력에 주안점을 두어야 할 것이다-이다. 그리고 이들의 게릴라적인 특징처럼 숨어있거나 뭉치길 원하지 않는 집단 정도가 있을 수 있다.
‘언더’에서 ‘오버’로, 그리고 다시 ‘언더’에게
95년 신일섭은 강성수, 오영진 등과 《만화실험 봄》을 만들어냈다. 모해규는 김동고 등과 함께 《화끈》을 만들어낸다. 이후 《히스테리》가 창간된다. 그리고 숱한 만화동호지들이 불특정 다수의 대중들에게 전달, 또는 판매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동시다발적으로 증폭된 만화에 대한 산업적인 관심과 이를 극점으로 승화시킨 ‘서울국제만화페스티벌’은 절대적인 지지자의 역할을 했다. 전시행사를 위한 새로움의 소개. 스펙터클한 이벤트를 위한 젊은 일꾼들. 주최측의 목적에 가장 다소곳하게(?) 부합하는 이들은 바로 그들이었다. 비주류라 얘기되는가 하면 작가주의라고 말해지기도 하고, 언더그라운드라고 지명됐다가 최근엔 독립-, 마이너- 등으로 얘기되는 만화가들. 바로 그들 언더그라운드 만화가인 것이다.
이들은 서울국제만화페스티벌을 통해 더욱 확정적으로 이름 값을 지니게 됐다. 그리고 이들은 쉽게 일반 만화출판사에 편입되지 않고, 나름의 영역을 권고히 했다. 물론, 일반만화출판사 자체적으로 그들의 접근을 꺼리던 풍토가 강했던 것이 사실이다. 팔리는 만화를 실어야 하는 입장에 처해있는 편집진들에게 그들의 만화는 유혹이라기 보다는 짐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전년도를 정점으로 만화를 읽는 이들의 시각에 또 다른 변화가 생겼음이 감지된다. 신진작가들의 득세에 의한 것일 수 있으나, ‘언더’의 효용성을 발견할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즉, 국내에서 일본만화풍의 장기적인 득세는 기존 출판만화의 스토리구조와 화풍의 동일화를 이루게했다. 『드래곤볼』, 『슬램덩크』로 대표되는 ‘더욱 강한자와의 대결을 통한 이야기 전개’에 식상함을 느꼈던 것이다. 그에 대한 반발은 상업출판만화 자체에서도 이를 정형성으로 만들었고, 정형성을 파괴하는 쪽의 작가군을 대두시켰다. 그리고 아직 심의의 벽에서 허우적대는 작가군들이 기존의 강자들과의 대결을 위한 방법으로 ‘더욱 더 폭력적인 것’을 포기하고, 만화에서의 일반화에 대한 ‘낯설음’을 제시하고 나선다. 그것, ‘만화에서의 일반화에 대한 낯설음’이 바로 언더그라운드 작가군들이 제시해왔던 전략적인 방법중 하나이다. 이는 특정작가의 창작성향에 기인하는 것일 수도 있으나, 거대 상업시스템에 대한 게릴라적 반격으로 이해되기도 했다. 바로 그러한 전략들이 최근 일반 출판만화에 의해서 시도되고, 재생산되고 있다. 그리고, 이들의 전략에 동참하는 언더그라운드 작가군들도 쉽게 찾을 수 있게 됐다. 지난 2월3일 《동아일보》는 독립만화에 대한 특집을 실었다. 물론 이 기사는 자보에 실리고 있는 「도날드 닭」을 위한 홍보페이지에 불과한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직시해야 할 것은 메이저 신문사에서도 이들 만화가 지니는 효용성을 인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출판만화 전반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는 야컴이 호러잡지 《아디》를 통한 실험적인 도전-으로 끝났지만-에서 ‘언더’ 계열 작가의 성향을 보여주는가 하면, 서울문화사가 색다른 여성만화지 《나인》에서 ‘언더’작가의 위상에 기대고 있음을 보여준다.
거대 출판만화사들의 이러한 전략은 소수, 저예산 만화출판사들의 몫을 훔치는 행위일수도 있다. ‘언더’가 ‘언더’로서의 기능을 수행하기 위한 최소한의 공간을 그들이 빼앗는 행위에 다름 아닌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한가지 확실한 것은 지금 만화판에서 ‘언더’의 명패를 지닌 이들에게서는 더 이상 ‘언더’의 공간을 할애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미 ‘오버’의 세계에 나가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이제껏 해왔던 ‘언더’의 창작방법 역시 다르게 제시되야 한다. ‘언더’의 몫은 끊임없이 대안을 발견해내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거대시스템을 지닌 이들은 ‘언더’를 사칭하지 않는 일만이 남아있다. 그것만이 ‘오버문화자’들이 ‘언더문화자’들을 배려하는 길이다.
아직 언더그라운드 만화가를 개념화하기는 쉽지 않다. 다시 정리하자면, 프로가 되기 전의 수련기에 있는 아마추어만화동호인이 있고, 상업지를 통해 등단후 작품성격의 부적응으로 상업지 연재를 거부하는 작가군이 있다. 그리고 언더그라운드만화지를 통해 데뷔한 후 그곳에서만 작품활동을 하는 이들이 있고, 상업지에 연재를 하고, 대중적 인기도도 지니고있지만 일반성향이 아닌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작가군이 있다. 이들을 도저히 하나의 개념, 몇 가지 분류어로 나타낼 수는 없다. 그저 그들이 우리 만화계의 창작환경에 ‘낯설음’을 제공하고 있다는 것만을 강조할 수 있을 뿐이다.
글/ 박석환(만화평론가, www.parkseokhwan.com )
만화동네, 한국만화가협회, 1998. 8. 1
만화시비탕탕탕, 초록배매직스,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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