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석환, 공포장르만화의 판타스틱한 집권기, 코코리뉴스레터, 한국만화문화연구원, 1998.09.25

 

우리 대중문화 속에 등장하는 귀신은 80%이상이 원한을 품고 있다 해서 원귀로 분류된다. 귀신은 서구의 경우처럼 신(God)과 물령이라고 번역되는 스피릿(spirit), 마귀를 뜻하는 데몬(demon), 사령을 뜻하는 고스트(ghost) 등의 개념을 지닌다. 초인간, 초자연적인 귀신의 유형이 이 구도 안에서 결정되고 원귀의 복수와 화해가 주 내용으로 설정된다. 

귀신물(horror)은 판타지물(fantasy)의 범주에서 이해할 수 있다. 판타지는 ‘터무니없는 백일몽’으로 이해되다가 새로운 수용 계층을 만나면서 있을 법한 ‘기이한(grotesque)` 이야기로 발전했다.



공포통치의 또 다른 전개, 일본산 요마만화


최근 우리만화에서 나타나는 귀신물은 일본 ‘요마(妖魔)만화’의 영향에서 찾을 수 있다. ‘다신교 바탕 위에 세계 각지의 설화와 신화가 혼재된 대상’이 일본 만화에 등장하는 귀신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귀신(요괴, 악마 등)들은 원한보다는 지배욕 등의 목적을 지니고 나타난다. 귀신은 또 다른 인류로 대접받기 위한 싸움을 요구하고, 주인공도 귀신을 달래서 원인을 제거하기보다는 싸워서 이기는데 주력한다. 이들 작품은 미스테리한 이야기 전개보다는 끝없는 격투와 잔혹한 귀신 제거 방법을 보여주는데 충실한 퇴마물이다. 


인간계와 마계의 구분이 뚜렷하게 이뤄진 이러한 유형의 작품들은 기실 극히 이분법적인 사고에서 출발한다. 미국과 소련으로 대표되던 냉전 구도의 신물나는 풍자와 재해석에 다름 아닌 것이다. 물론 작품의 연재 횟수가 길어질수록 이런 구도는 또 다른 층위를 만들면서 발전해 간다. 그들에게 당근과 채찍을 번갈아 제공하며 끝나지 않는 이야기를 만들어가게 하는 이들은 바로 천상계라는 공간의 신들이다. 몇몇 작품들에선 이 세 계층의 피범벅된 싸움을 만들어 가기도 한다. 그리고 그들의 싸움을 종식시키는 방법은 극히 동화적이며 판타스틱(?)할 정도로 유치하다. 


한국적 공포만화의 실험(?)


국내에는 <소마신화전기>의 양경일이 이 장르를 대표한다. 무협물과 대전 격투물의 형식을 혼합한 전작을 통해 튼튼한 독자층을 확보하고 있는 양경일의 <아일랜드>는 공포와 퇴마물의 특성을 미스테리한 분위기로 이끌어 낸 수작이다. 악마적 카리스마를 발산하는 주인공 반과 요한의 귀신 퇴치가 속도감있게 전개되는 이 작품은 제주도 설화 속의 귀신을 등장시키고 있다. 섹시하지만 좋아하기 힘든 여자 원미호에 대한 반의 애착 등에서 당위성이 부족하고, 독창적이지 못한 요마 캐릭터 등은 해결해야 될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태왕북벌기>의 형민우는 <프리스트>를 발표하며 공포만화의 새로운 특성들을 열거하고 있다. 마카로니 웨스턴 같은 도입부에서부터 거친 펜선과 연필선만으로 괴기스런운 느낌을 전달한다. 

<마치 영화처럼>의 임형묵도 <교무의원>에서 낯선 터치와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연출로 이색적인 공포물을 그려내고 있다. 이들 작품들은 근간에 주류 창작 장르로 떠오르고 있는 판타지 장르만화의 특성을 혼재한 양식을 보여준다. 


일반적으로 판타지는 호러, SF, 동화, 모험 등의 네 가지 범주를 포괄하는 장르로 인식된다. 판타지 만화는 이 네 요소를 총합하면서 시공간의 개념을 와해하고 원형적인 요소의 다층 구성 방식을 취한다. 


깜찍한 공포, 판타지의 이름으로 


만화는 무의식과 꿈의 세계를 욕망의 이미지로 형상화하면서 ‘판타지(장르의 개념상)한’ 성격을 확보하고 있는 창작 매체이다. 그러나 청소년에게 유해한 매체로 감시받고 있는 만화는 ‘표현 제한’ 영역을 지니고 있다. 만화가들은 금기시 되어있는 장르나 코드가 필요한 작품을 희망할 때 표현 가능한 장르와의 접목이나 대체물을 통해 이를 은유하곤 한다. 과폭력성(hard-gore)과 과선정성(hard-core) 코드가 남발하는 판타지 장르의 출현은 표현에 대한 억압과 이의 수용과정에 대한 억압의 극한에서 도출된 것이다. 


미소녀 캐릭터를 등장시켜 사신들과 범무리들의 싸움을 그린 <사신전>(푸르뫼/강태준 작), 엘리트 퇴마사를 양성해서 악의 무리들에 대항하는 <마법학원 아테나>(손희준 작)와 <까꿍>(이충호 작), <다이어트 고고>(조재호 작), <12지 전사>(손태규 작), <토이솔져>(이태호 작) 등의 작품이 다양한 장르 혼합에 의해 도출된 판타지물이다. 이 작품들은 시공간에 대한 개념을 파괴하고, 현세 인류와 외계 종족과의 왕래를 가능하게 한다. 때에 따라서는 당연스럽게 공동생활을 하기도 한다. 지구 밖이나 지구 내에 존재하는 동식물계 외의 생명체(혼령이기도한)에 공동으로 대응하기도 한다. 이들의 대응(격투)은 대개가 눈물날 정도로 우습고, 기가 막힐 정도로 정겹게 이루어진다. 이들 작품은 폭력성과 선정성 표현에 대한 시비가 끊이지 않는 우리만화계의 상황에서 적절하게 도출된 판타지만화라 할 수 있다. 


미소녀 전사가 집단으로 등장해서 악마와 싸우는 <세일러문> 류(類)가 일본에서는 한 장르를 이루지만, 우리의 경우는 격투시의 잔혹성을 희석시키기 위한 장치로 사용된다. <마계전사>식의 퇴마물이나 <유유백서>같은 대전 판타지물도 3등신 캐릭터를 등장시켜 폭소만화와 연결한다. 심지어 청춘 연애물과 학원물의 형식 속에 요마를 개입시키기도 한다. 악에 대한 응징일지라도 지나친 폭력이 금기시 되는 탓에 만화가들은 요마들과의 색다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장치를 만들어내도록 강요받는다. 


작가의 의도나 독자의 요구에 의해 다양한 형태의 혼성된 판타지물이 우리식으로 발전하고 표현되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기괴하고 공포스러운(fantastic)’ 것 보다는 ‘기호나 취향(fancy)’에 맞는 작품들이 수요자의 수에 지배받고 있는 듯한 양상은 창작물의 다양성 구축에 실패한 ‘한국만화전략’의 또 다른 모습으로 비친다. 




글 : 박석환 (만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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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kseokhwan

만화평론가 박석환 홈페이지. 만화 이론과 비평, 웹툰 리뷰, 인터뷰, 보도자료 등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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