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석환, 양은냄비 속의 애니메이션, 코코리뉴스레터, 1997.07.21


괜한 망상에 젖어 흐르는 시간에 대한 책임을 회피한다. 쉽게 새벽이 돼 있었다. 한웅큼 꺼져 있던 배가 투정을 부리는 통에 웅크리고 있던 라면 한 봉을 찾아내 허기를 채우려한다. 싱크대 문을 열고 식기를 찾았다. 갑작스레 아침으로 흘러버릴 시간이 안쓰러워졌다. 내 값비싼 망상의 시간을 빼앗고 있는 듯했다. 가장 쉽게 열을 낼 수 있는 양철냄비를 찾았다. 그것만이 공기를 단축하고 기쁨을 줄 수 있을 법했다. 예상대로 다른 때보다 1분 가량 빨리 덜컹대는 냄비뚜껑을 봤다.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라면과 수프를 넣었고, 잘 익은 면발을 끌어당겨 봤다. 제대로 된 맛이었다. 이제 식탁으로 냄비를 옮기고 가장 빠르게 먹기만하면 된다. 냄비의 손잡이를 잡고 식탁 쪽으로 몸을 돌리는 순간 잊고 있던 것이 생각났다. 양철냄비는 다른 것처럼 플라스틱 손잡이가 없다는 것. 낭패감을 느낀 인식의 작용은 귀뒷볼로 손끝을 가져갔다. 물론 냄비는 아래로 낙하했으며, 뚜껑을 헤쳐내고 뛰어오르는 샴페인처럼 라면발은 냄비를 벗어났다.


안시에 다녀간 다섯, 또는 19개의 웃음거리


금년 8월 14일로 예정 된 3회 SICAF는 정부주관 행사에서 민간주도 행사로 변모했다. 이 행사를 준비중인 단체가 밝힌 작년도 공식 수입은 3억5천만원. 분명 흑자인 것만은 확실하다. 하지만 정부의 비공식적 압력으로 마련되었던 협찬금을 제외하면 양상은 달라진다. 작년이 어찌되었건 그건 중요하지 않다. 문제는 올해 개최될 행사에 있다. SICAF의 과도한 대중 동원력은 이현세의 『아마게돈』이 실패하자 밀려났던 기대감을 다시 이끌어왔다. 문화방송이 애니엑스포를 주최하고, 춘천시가 애니타운 페스티벌을 연다. 이외에 동아-엘지 국제만화대전과 동아시아만화 축제도 열릴 예정이다. 이는 상당히 고무적인 현상일수 있다. 하지만 이들 행사에 내보일 수 있는 우리의 작품들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여서 허탈감만 준다. 지난 5월 프랑스 남부의 작은 동네에서 열린 제21회 안시 애니메이션 페스티벌에서 세계 최초로 열린 애니메이션 견본시 MIFA에는 위 행사 관계자 외에 부천국제판타스틱 영화제 측에서도 작품 섭외에 나섰다. 안시에서 공식 상영된 우리 작품은 19편, 그중 몇몇 단편은 논의 할 가치도 없는 것들이었으며, 비디오로 출품된 것도 있었다. 이런 토양에서 총 다섯 팀의 행사 관계자가 경쟁적으로 작품을 섭외하고 다닌다. 금방 같던 사람도, 또 들이닥치는 사람도 거대한 행사규모를 자랑하고 간다. 한 나라에서 엇비슷한 시기에 열리는 행사일정을 말하면서.


아이들의 꿈, 어른들의 꿈(돈?)

SICAF 는 남는 장사다. 그 소문은 보다 무성하고 잡다하게 와전됐다. 아니 『블루시걸』의 치고 내빼기식 전략으로 시작된 한국애니메이션 시장은 꾼들의 응집소가 되 버렸다. 더 이상의 신 영역을 찾지 못한 투자자들이 영화에서 일구지 못한 이윤창출의 대업을 위해 끼여들기부터 매달리기까지, 종목 구분 없이 참가하고 있다. 97년 한국에서 개최되는 세계적 규모의 애니메이션 관련 행사는 메머드급만 3개. 여름방학 성수기를 맞이해 개봉되는 극장용 애니메이션도 3편이다. 하지만 안시에 참가한 우리 선수단(?)에 대한 평가는 낯뜨거울 정도였다. 집행위원장 장 뤼크 지베라스는 '한국만화회고전을 통해서 본 카툰은 아주 인상적...그렇지만 『한국의 애니메이션』이란 이름으로 공식 상영된 작품은 솔직히 수준이 떨어지는 작품들이 많았다.'고 말했으며 애니메이션 행사 소식에 대해서는 '한마디로 우스운 일이다. 그 중에서 두세군데는 담당자와 만나거나 통화를 했는데 아직도 왜 한꺼번에 그렇게 많은 행사가 열리는지 이해를 할 수 없다. 우리는 2년마다 행사를 준비하는데도 버거운데...'라고 말했다. 만화관련인들 사이에 오가며 하는 인사말은 '애니메이션이 잘돼야 될텐데...'이다. 어느 누구도 기대에 대한 확신은 없지만 이왕에 들러붙은 장사치들을 내칠 수 없는 까닭이다. 그들이 조금은 자구하는 듯한 입짓으로 내뱉는 말은 하나같이 '생고생해서 남 좋은 일만 시킬 수 있냐. 우리도 할 수 있는 인력이 있다.'로 한정 돼있다. 하지만 그들의 황금램프에선 도무지 '지니' 처럼 신통방통한 놈이 나타나서 원하는 것들을 들고 오지 않는다.


3 번의 실패, 1번의 성공. 그리고 다시

여름 성수기를 기해 개봉 될 우리 애니메이션은 3편. 95년 말 3편의 극장용 애니메이션이 한꺼번에 선을 보인 후 주춤했던 것이 작년 여름 『아기공룡 둘리』의 미약한 성공(이것이 교과서적인 모범답안일순 없다)으로 또 다른 실험대를 마련한 것이다. 7월 19일 동시 개봉될 쌍용씨네드림의 『전사라이언』, 한길프로덕션의 『난중일기』, 스톤벨의 『임꺽정』이 그것이다. 『전사라이언』은 유벤타라는 행성에서 펼쳐지는 SF어드벤처물. 셀애니에 CGI를 병합했다. 초등학생을 주 관객층으로 펜시사업도 진행할 방침인 이 작품은 망가풍 캐릭터로 즐비한 선화가 거슬리지만 스틸을 통해 드러난 세련된 색지정과 메카닉 연출 등이 수준급 임을 알 수 있다. 장르혼합의 열풍으로 대두된 칵테일 무협물이 새로운 활기를 맞고 있긴 하지만, 너무도 교육적인 뉘앙스를 지닌 이순신과, 부모의 동행을 염두에 둔 듯 드라마의 인기를 애니로 몰고 간 임꺽정이 상업성을 겸비할 수 있을지 의문시된다. 아직 시사회도 열지 않은 실정이라 성급한 판단은 금하겠다. 우선적으로 들 수 있는 이들 작품의 공통점은 95년(헝그리베스트5, 아마게돈, 홍길동)의 상황과는 달리 어린이를 주 관객층으로 삼고 이야기 전개의 도입부를 과감하게 축약, 핵심 사건을 묘사함으로서 전대의 실패를 답습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볼 수 있다. 이외에 『오돌또기』, 『꼬마대장 망치』등 서너 작품이 다음 시즌을 목표로 준비되고 있다. 하지만 이 몇 편의 작품이 다섯 개나 되는 애니메이션 행사에 동승, 일반의 기대를 증폭시킬 수, 아니 유지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더군다나 우리 관객들이 너무도 호의적인 디즈니의 『헤라클레스』가 앞서 개봉돼 들러리 서고 마는 것 아니냐는 생각마저 든다. 세계적인 애니메이션 호황에 발빠르게 대응하고 있는 것이 잘 못 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호기가 출판만화의 경우와 다르지 않은 국면으로 치닫을까 우려하는 것이다.


양은냄비적 사고는 버려라

한때 2만여개가 넘었던 만화방의 활성은 결국 우리 작품의 고갈을 낳았다. 수요를 맞추려는 업자들에 의해 일본만화 공급이 아무렇지도 않게 이루어졌다. 그리고, 다시 만화전문잡지의 전국시대가 도래한 지금 '일본만화가 1/3이상이 되지 않는 잡지는 경쟁력이 없다'는 것이 정설이 됐다. 이는 '만화의 활성이 곳 우리만화의 활성은 아니다'라는 자책 투의 해석과도 동일하다. 내실 없는 행사, 아니 내실을 남의 것으로 채우려는 행사가 꼭 필요한 때인가? 애니메이션 산업에 대한 장밋빛 기대는 분명 가져 볼만 한 것이다. 하지만 빈 수레의 요란한 모양새를 세계만방에 펼쳐 보이겠다는 의도를 알 수 없다. 우리는 어느날 갑자기 코엑스라는 어마어마한 공간에서 열린 SICAF를 만났다. 기형적 발전만을 거듭하던 만화라는 매체를 정상인들과 같은 곳에 위치시키는 작업이었다. 성공적이긴 했으나 그조차 기형적인 발전을 도모한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도 다 채우지 못해 부산 됐던 기억은 모두 숨겨 놓은 건가?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 공권력은 갑옷과도 같다. 갑옷을 벗어 던지고 맨몸으로 민간의 손에 넘어온 SICAF. 그를 지키기에도 부족한 일손이다. 단언하건대 그 외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문화행사일 수 없다. 너무 빨리 끓어오르길 바라는 양은냄비적 사고는 버려야 한다. 괜한 성급함은 엄청난 시련과 원점만을 제공한다고 앞서 말하지 않았는가? (끝)


한국만화문화연구원, 코코리뉴스레터, 1997. 7.21 발표

박석환, 만화시비탕탕탕, 초록배매직스, 1999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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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석환(만화평론가, 한국영상대 만화콘텐츠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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