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타테스트 같은 현재를 살고 있는 미래의 일기
게임에 빠져 겨울 방학을 보낸 장미래. 엄마의 무관심보다 게임에서 미처 하지 못한 일들이 아쉽다. 개학과 함께 중학교 3학년이 됐지만 아는 얼굴 하나 없는 외톨이 신세. 처음 본 아이들 끼리 허물없이 이야기를 나누고 쉽게 옆 자리에 앉는 것이 신기 한 미래. 혼자서 핸드폰 문자를 주고받으며 친구가 있는 흉내를 내기도 한다. 개학 첫날이라 일찍 끝났지만 특별하게 할 일도 없다. 낮 시간 대에 아빠가 집에 있으면 놀이터에서 시간을 죽이다 아무도 없을 때쯤 집으로 향한다. 다른 집에서 풍기는 찌개 냄새를 맡으며 ‘행복하지 않은 저녁때의 가정’으로 복귀한다.
여중생A로 명명된 미래의 삶
며칠에 한번 집에 오는 아빠는 매일 술에 취해 있다. 저녁 늦게까지 일 하고 들어오는 엄마는 매일 지쳐 있고 아무 힘도 없다. 그래서 그런지 아빠는 기회 있을 때마다 엄마를 때렸고 어느 때는 그 주먹이 미래를 향하기도 했다. 한번은 아빠의 가정폭력 앞에 대항해보기도 했고 그 덕에 ‘혼자만의 시간’을 가져보기도 했지만 그 뿐이었다. 반복되는 폭력 앞에 미래가 대응할 수 있는 방식은 그저 숨는 것이었다. 소리 없이 사는 것, 보이지 않고 사는 것, 있는 듯 없는 듯 여중생A라는 익명으로 사는 것이 미래가 선택한 방식이었다. 학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중학교 1학년 때 미래를 챙겨주던 친구가 있었다. 하지만 친구라는 것이 여간 불편한 존재가 아니었다. 친구가 있어서 원하지 않는 것을 같이 해야 하는 일들이 있었고 공개하고 싶지 않은 자신의 형편이 드러나기도 했다. 거부 의사를 분명히 했음에도 불구하고 친구 또는 학교의 관심과 배려는 미래를 따라다녔다. 그러는 사이 미래는 가난한 아이, 음침한 아이, 답답한 아이가 되어갔다. 어떤 것은 감출수가 없었고 어떤 것은 굳이 아니라고 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미래는 주변의 상황과 판단에 맞춰 자기 자신의 행동과 태도를 결정했고 ‘아무도 함께 해주지 않는 아이’라는 삶에 익숙해졌다. 하지만 게임 속 세계에서 미래의 모습은 달랐다. 집에서 보살핌 받지 못하는 아이, 학교에서 따돌림 당하는 아이가 아니었다. ‘원더링 월드’라는 게임 속에서 미래는 다크666이라는 아이디를 쓰는 최고 레벨의 남성 캐릭터였다. 게임 유저들이 모인 길드의 주축 멤버로 다른 이들을 보살펴주고 길드원들을 리드해 목적하는 바를 이루는 능력자였다.
선택하지 않았지만 거부할 수 없는
집과 학교에서 미래의 현재는 자아존중감이 전무한 아이다. 누구에게도 사랑 받지 못했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아이다. 하지만 게임 속에서 미래의 현재는 달랐다. 길드 멤버들은 언제나 미래가 오기를 기다렸고 미래는 고급 아이템과 능력치로 많은 것들을 수행해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컬러로 표현된 게임 속 미래의 행동과 태도는 흑백으로 묘사된 현실 공간에 오면 달라졌다. 간혹 게임 속 미래가 현실 속 미래와 겹쳐지기도 하고 게임과 현실이 연결되기도 하면서 ‘자존감을 회복하는 미래’가 그려지기도 한다. 하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미래를 억압하는 흑백 현실은 아주 작은, 잠시간의 총천연색 꿈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처럼 미래에게 주어진 삶은 박복했다. 스스로 원한 바 없지만 주어진 가정은 행복하지 않았고 가정의 불행은 학교생활로 이어졌다. ‘그저 나인 게 잘못인건가’라고 느낄 정도로 그의 삶은 온갖 문제로 가득했다. 대부분은 자신의 잘 못이 아니었지만 결국 자신의 존재가 주변의 상황을 나쁘게 만들고 있다고 생각했다. 다른 많은 문제들이 주변사람들에게 있었지만 결국 이런저런 문제의 중심에 미래가 있었다. 그래서 거리를 두고, 그래서 도망치고, 그래서 숨어있기로 한 것이다. 게임이 위안이 됐고 책읽기나 영화보기가 혼자 있을 수 있는 이유가 됐다. 미래에게 이번 삶은 싫어도 적극적으로 싫다고 하지 않고 아닌 것도 굳이 따져서 아니라 하지 않는 삶이었다. 진짜 삶은 아직 시작되지 않은 ‘베타테스트’ 같은 것이었다.
일기체 형식으로 보는 여학생 서사
<여중생A>는 중학교 3학년 여자아이의 일상을 그려낸 작품이다. 서툰 듯 간략한 묘사로 주변으로부터 억압 받고 있는 여자아이의 불안한 심리와 정서를 세밀하게 묘사하는데 성공한 작품이다. 통상 여학생을 주인공으로 한 서사물은 가정이나 학교에서 벌어지는 비일상적 사건들로 인해 상처 받고 이를 치유해주지 못하는 사회적 구조와 억압으로 인해 고통을 겪는 주인공을 그리곤 한다. 이를 학원로맨스물의 형식으로 풀어내는 경우는 풋풋한 소녀의 감성이 만들어내는 상쾌한 일상이나 아직 성숙하지 못해 겪어야 하는 갈증과 아픔 같은 것이 그려지고는 한다. <여중생A> 역시 여느 여학생 서사 같은 이 같은 요소를 담고 있다. 그런데 이 작품은 그동안의 여학생 서사와 다른 전형을 만들어내고 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짧은 에피소드를 중심으로 한 생활툰 같은 형식의 그림체이다. 일명 ‘순정만화’라고 하는 여학생 대상의 만화는 화려한 장식미를 강조한 그림체가 특징이다. 그런데 이 작품은 얼핏 개그만화로 보일만큼 단순한 그림체와 간결한 구성을 취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물간의 갈등 양상이나 서서히 드러나는 역할 관계는 치밀한 스릴러물을 보는 듯 높은 몰입감을 제공한다. 포털사이트에 웹툰으로 연재되는 동안 또래 독자들의 공감과 함께 공분을 만들어낸 것 역시 여느 작품에서 볼 수 없던 현상이다. 독특한 작가의 이름만큼이나 특이한 성격의 작품으로 문화체육관광부가 선정한 2016년 오늘의 우리만화이기도 하다.
글/ 박석환(만화평론가, 한국영상대학교 교수)
1997년 스포츠서울 신춘문예로 등단한 후 만화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만화콘텐츠기획자, 만화정책기획자, 만화전시기획자 등으로 일하다가 2013년부터 한국영상대학교 만화콘텐츠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저서로는 <코믹스 만화의 세계>, <만화리뷰쓰기> 등이 있다. 홈페이지는 www.parkseokhwan.com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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