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사는 사회, 함께 여서 발생하는 위협과 공포
샤워중인 남자. 등 뒤에서 들리는 여자 목소리에 놀란다. 주변을 둘러보지만 아무도 없다. 그 때 더 선명하게 들리는 말소리. 윗집 부부가 다투는 소리다. 남자는 경비실로 찾아가 아파트의 방음과 소음 문제를 이야기한다. 경비원의 반응은 시큰둥하다. 오히려 남자의 예민함을 탓한다. 소음으로 인해 윗집 아랫집 간 분쟁을 원하지 않았던 남자는 귀마개를 해보기도 했지만 더욱 커지는 소리를 참지 못하고 윗집을 찾아간다.
갈등의 시작과 회피가 만든 재앙
남자는 웹툰 스토리작가 하송신이다. 유명 포털 사이트에 작품을 연재하고 있다. 다소 예민한 성격이어서 혼자 조용히 작업할 곳을 찾던 중 적요산아파트에 세를 얻어 입주했다. 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는 한 동짜리 아파트, 교통이 불편하고 인근에 소·돼지를 키우는 축사가 있다. 시설이나 주변 환경이 좋지 않은 대신 임대료가 쌌다. 불편한 점이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밖에 나갈 일이 많지 않고 밤낮으로 집에서 글을 써야 하는 터라 ‘혼자 조용히 작업’하기에 좋을 거라 판단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 판단이 잘 못된 것임을 알게 됐다. 적요산아파트 202호에 살고 있는 하송신은 4인 가족이 살고 있는 302호의 생활소음으로 인해 불면증에 시달리게 됐다. 제대로 잠도 자지 못하고 마감을 맞춰야 하는 작업에도 집중하지 못했다. 여자 친구와 만난 자리에서는 환청이 들리기도 하고 환각을 보기도 한다. ‘혼자 조용히 작업’할 수 없게 된 상황. 302호를 찾아가 따져보기도 하고 203호 여자의 도움을 받아 맞대응을 한답시고 천장에 스피커를 설치해 크게 음악을 틀어보기도 했지만 상황은 더욱 안 좋아졌다. 포털 사이트에 웹툰을 연재하는 유명인이 가벼운 생활소음 문제로 윗집 사람을 괴롭힌다는 인터넷 게시물이 올라왔고 SNS를 통해 빠르게 퍼졌다. 더 이상 연재를 이어갈 수 없게 되자 하송신은 아파트를 비우고 고시원으로 들어간다. 갈등을 해결하기보다 회피하는 쪽을 선택한 것. 송신의 이 선택은 적요산아파트 전체에 큰 재앙을 불러온다.
미묘하게 커지는 문제와 잘 못 된 규칙이 만드는 위협
<재앙은 미묘하게>(현 4권 발행)는 층간 소음으로 인해 촉발된 이웃 간의 작은 갈등이 거대한 재앙으로 확산되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조금 참고 무시했으면 좋았을 일, 아니면 초기에 대화와 타협으로 문제해결을 위해 노력했으면 좋았을 일인데 등장인물들은 그런 해결책을 찾지 않았다. 마치 우리 사회에 빈번하게 발생하는 많은 문제들이 제대로 해결되지 못하고 더 큰 부실과 불신으로 확대되는 것처럼 적요산아파트는 소음으로 인한 갈등과 인간의 이기적이고 악한 본성이 어떻게 집단적 광기를 만들어내는지는 보여주는 무대가 된다. 주인공은 윗집의 행동을 통제하려 했고 윗집은 오히려 피해자 행세를 하며 문제를 키웠다. 윗집과 아랫집 간의 다툼으로 끝날 수 있었던 일은 옆집 여자를 통해 입주민 전체와의 불화로 확대됐다. 소음이 날 때 소음을 내지 말라고 한 신호가 더 큰 소음이 되고 소음으로부터 자기 자신과 가족을 지키기 위해 한 행동 또는 화를 참지 못하고 한 맞대응이 더욱 더 큰 소음을 만들어내는 상황이 반복됐다. 급기야 아파트 소음이 인근 축사에까지 들리게 되고 잘 크던 가축이 소음으로 인한 스트레스로 때죽음을 당하는 일이 발생한다. 법원은 아파트 입주민 전체가 축사에 5억 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린다. 가구당 1천6백만 원 가량을 배상해야 하는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입주민들은 회의를 통해 가장 소음을 많이 발생시킨 10가구가 5천만 원씩 내기로 하고 각 가정마다 소음측정기를 설치해 매주 1가구씩을 선정하기로 한다. 소음을 막고 배상금을 모으기 위한 규칙이었다. 하지만 이 규칙은 이웃 간의 소음 전쟁을 본격화 시키는 원인이 된다.
작은 갈등으로 촉발된 일상 스릴러
생활소음이 층간소음 분쟁으로 확대되고 소음 피해로 인한 송사로까지 번지면서 예기치 않았던 배상금까지 물어야 하는 상황에 놓인 아파트 입주민들. 이들의 작은 갈등은 아파트 전체를 위기에 몰아넣고 사회적 위협과 실질적 재앙을 불러온다. <재앙은 미묘하게>는 제목처럼 이런 위협과 재앙을 순차적으로 드러내면서 극의 긴장과 독자의 참여를 유도해낸 일상 스릴러물이다. 작가 안성호는 포털사이트에 연재한 <키스우드> <노루> 등의 작품을 통해 판타지적 세계관을 매력적인 화풍과 연출로 구축해내 호평 받은 바 있다. 전작에서 보여줬던 비현실적 세계가 이 작품에서는 매우 현실적인 세계로 이동했지만 ‘위기에 봉착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라는 테마는 여전하고 그림은 한결 더 성숙해졌다. 다만 등장인물들의 너무도 현실적인 묘사와 이기적 행동이 독자들을 화나게 하고 한번 읽기 시작하면 결말을 보지 않고는 손을 땔 수 없다는 의미에서 <찌질의 역사> <손의 흔적> 등과 함께 대표적 ‘발암(암을 유발할 것 같은) 웹툰’으로 불리고 있다.
글/ 박석환(만화평론가, 한국영상대학교 교수)
1997년 스포츠서울 신춘문예로 등단한 후 만화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만화콘텐츠기획자, 만화정책기획자, 만화전시기획자 등으로 일하다가 2013년부터 한국영상대학교 만화콘텐츠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저서로는 <코믹스 만화의 세계>, <만화리뷰쓰기> 등이 있다. 홈페이지는 www.parkseokhwan.com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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