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야기 좀 할까. 나는 시골에서 태어났어. 어른들은 새벽부터 농사일하러 나가고 누나랑 형은 아침을 챙겨먹고 학교로 향했어. 유치원이나 어린이집 같은 곳이 없었기 때문에 꼬맹이들은 마을회관에 모였어. 이곳에 작은 서가가 하나 있었어. 한글을 모르던 다섯 살 무렵이니까 서가의 책을 읽을 수는 없었지. 또래 친구들은 책과 잡지의 표지에 집중했어.
제일 먼저 발견한 사람이 두꺼운 종이를 찢어서 네모딱지를 만들 수 있었거든. 그런데 나는 잡지 속 내용이 궁금했어. 네모란 칸이 여러 개 있고 그 안에는 그림과 글이 있었어. 글을 읽지 못했지만 연속적으로 그려진 여러 개의 그림이 그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설명하고 있는 것 같았지. 그림이 말을 하고 화를 내기도 했어. 서로 힘을 겨루기도 하면서 뭔가 흥미 있는 일을 벌이고 있었지. 만화였어. 만화를 처음 만나게 된 거야.
그 때 일이 다 기억나지 않지만 그 잡지를 집으로 빌려가서 누나나 형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읽어 달라고 했어. 한 달에 한번 연재되는 짧은 내용이라 금방 읽어버리고 아쉬워했지만 다음 달을 기다리면서 만화 속 내용과 주인공의 이야기를 되새겨봤지. 만화주인공이 라이벌과 야구 시합을 펼치는 것처럼 딱지치기 라이벌과 승부를 벌였고, 강타자와 대결하기 위해 연구하고 노력했던 것처럼 살얼음이 언 저수지를 건너는 모험에 도전하기도 했어. 만화를 보며 한글을 익혔고 만화를 보면서 바른생활과 탐구생활을 배웠으니 만화책이 내게는 교과서 역할을 한 셈이지. 그 교과서는 나중에 알고 보니 <머털도사> 시리즈로 유명한 이두호 선생님의 <바람처럼 번개처럼>이었어.
초등학교 입학과 함께 서울로 이사를 오면서 ‘나의 만화읽기’도 본격화 됐지. 동네에 만화방이 있었는데 부모님이 주는 용돈을 모아서 만화책을 빌려보거나 사서봤어. <꺼벙이> <로봇찌빠> <요철이>를 만났고 <태권브이> <황금날개> <로봇킹> 등을 알게 됐지. 당시 만화책과 만화방은 내게 테마파크였어. 꿈과 모험, 환상이 가득한 곳이었지. 이상무, 이현세, 허영만 등의 유명 만화가를 알게 됐고 만화가의 전작읽기에 도전하기도 했어.
고등학생 시절에는 그 유명한 일본만화 <드래곤볼>과 <슬램덩크>에 푹 빠졌어. 요즘 인기 있는 <원피스> <나루토> <블리치>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선풍적이었지. 유명 만화가의 만화나 일본만화가 인기를 얻은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어. 그 작품들 속에는 그 시대가 요구했던 ‘가치’가 담겨있었지. 그 시기의 독자들은 우정과 사랑, 도전과 노력, 승리와 열정 등의 가치를 만화작품에서 찾았던 거야. 하지만 만화작품이 인기를 얻을수록 만화에 대한 사회적 문제가 불거졌어.
만화 때문에 학생들이 공부에 집중하지 못하고 어떤 만화는 청소년들을 병들게 한다고 했어. 어른들의 걱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지. 실제로 어떤 만화작품은 내가 봐도 문제가 있었어. 그래서 만화에 대한 자료들을 찾아 읽었지.
이원복의 <세계의 만화, 만화의 세계>, 손상익의 <한국만화통사>, 김창남의 <대중문화의 이해>, 원용진의 <대중문화의 패러다임> 등 만화에서 출발해서 대중문화와 문화연구 관련서들을 읽었어. 그러다보니 대중문화의 역사에 대해 알게 됐지. 회화‧연극‧소설‧영화 등 지금 우리가 예술로 생각하는 모든 분야도 초창기에는 사회문제가 됐었고 이를 보편적 대중문화와 예술로 받아드리게 하는 논쟁의 과정이 있었음을 알게 됐지.
그 때 생각했어. 내게는 교과서였던 만화책이 다른 이에게는 다른 역할을 할 수도 있다는 것을. 그리고 만화를 가치 있는 예술로 받아드리게 하려면 수많은 비평 활동과 이론 연구결과가 나와야 하고 사람들에게 재인식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도. 그런데 이런 활동을 하는 이들이 많지 않으니 내가 이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지. 그렇게 나는 어른이 됐고 만화평론가가 됐어.
나중에 안일이지만 일본의 유명 만화잡지 중 <소년점프>(1968년 창간)라는 것이 있어. 이 잡지의 전설적인 편집장 중 한명이 나가노 다다스야. 이 사람이 설문조사를 해보니 아이들이 가장 마음에 들어 하는 것은 ‘우정’,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은 ‘노력’, 가장 기쁜 것은 ‘승리’였데. 그래서 이 사람은 소년을 대상으로 한 만화 작품에 이 세 가지 주제가 들어가도록 했고 대성공을 거뒀어. 이후 많은 만화와 잡지가 이를 따라했고 ‘소년만화’라는 하나의 장르가 만들어졌지.
내가 소년기에 본 만화들 역시 우정을 쌓으며 성장하고 노력하면서 꿈을 찾고 승리를 위해 질주하는 내용이었어. 만화에는 원래부터 ‘재미’만이 아니라 ‘가치’가 들어가 있던 거지. 그런데 만화에서 ‘재미’만 찾으려는 사람에게는 ‘가치’가 보이지 않고, ‘가치’만 찾으려는 이에게는 ‘재미’가 부족해지지. 이를 잘 조정해야해. 과하다 싶으면 조금 거리를 두는 것도 현명한 만화소비 방식이 될 거야.
글. 박석환(만화평론가, 한국영상대학교 만화창작과 교수)
유년시절 이두호의 만화로 한글을 깨우치고 이상무의 만화로 울지 않는 법을 배우며 성장했다. 이현세의 만화를 보며 도전하는 남자의 매력을 알았고 허영만의 만화를 통해 현명한 어른으로 사는 방법을 찾았다. 성균관대학교에서 언론학석사 학위를 받았고 세종대학교에서 예술학 박사과정을 공부하고 있다. 스포츠서울 신춘문예로 등단해 만화평론가로 활동하고 있고 대학에서 만화를 가르치고 있다. 저서로는 <코믹스만화의 세계>, <만화리뷰쓰기> 등이 있다. 홈페이지는 www.parkseokhwan.com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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