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만화 산업은 위기인가. 최근 만화계에서 논의되는 주제다. ‘열혈강호’로 유명한 만화가 양재현씨는 인터넷 팬카페에 장문의 글을 올려 “넉 달 동안 만화를 그려도 손에 쥘 수 있는 건 80만원뿐”이라며 생활고를 토로했다. 반면 ‘식객’ 등의 작품을 통해 만화 콘텐츠의 영상화 지평을 연 허영만 작가나 1000만부 이상 판매된 만화 시리즈 ‘마법천자문’ ‘먼 나라 이웃나라’ 등의 사례를 들어 한국 만화 산업이 호기를 맞고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1997년 스포츠서울 신춘문예 만화평론부문에 당선돼 등단한 뒤 꾸준히 만화 작품과 관련 산업을 분석해온 필자의 글을 통해 한국 만화 산업의 오늘을 진단한다.
만화 ‘열혈강호’의 작가 양재현(40)씨는 최근 인터넷 팬카페에 글을 올렸다. ‘연재 분량에 대한 반성 및 변명입니다’라는 제목의 이 글은 ‘열혈강호’의 연재 시기와 분량이 불규칙하다는 독자들의 항의에 답변하는 내용이다.
“최근 들어 적은 분량과 연이은 원고 펑크로 인해 많은 분이 분개하고 계신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도저히 지금의 한국 만화판에서 연재를 한다는 게 힘이 나질 않는 상태입니다. …그때(처음 연재를 시작할 때)는 노력과 운과 신의 가호가 있다면 권당 10만부를 팔 수 있는 시장이었기에 힘이 나는 노력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리 발버둥쳐도 3만5000부가 최고네요. …다른 만화는 1만부도 안 팔리는 시장입니다.”
양씨의 글이 눈길을 끈 건 ‘열혈강호’가 우리나라에서 인기 있는 만화 중 하나이기 때문. 1994년 만화잡지 ‘영챔프’에서 연재를 시작한 이 작품은 2009년 ‘영챔프’가 온라인 매체로 바뀐 뒤 온라인으로 자리를 옮겨 계속되고 있다. 한국 만화사(史)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장기 연재물로, 정통 무협 만화의 코드에 코믹과 멜로 요소까지 가미해 폭넓은 독자층을 갖고 있다. 지금까지 52권의 단행본이 출간돼 400만부가량 판매됐을 정도다. 이런 작품의 작가가 ‘한국 만화판에서 연재를 계속하는 건 너무 힘들다’고 털어놓았으니 화제가 되지 않을 리 없다.
베스트셀러 만화가의 눈물
양씨는 한 걸음 나아가 자신의 수입까지 상세히 공개했다. 한 달 연재 원고료로 216만원을 버는데 스토리작가 고료, 어시스턴트와 문하생 급여, 화실 운영비 등을 제하면 ‘남는 게 없다’는 설명이다. 그는 “1년에 세 권 정도 단행본을 펴내 받는 인세가 넉 달에 80만원꼴”이라고 덧붙였다. “생활의 곤란함과 함께 건강상의 문제도 있다. …‘열혈강호’를 원작으로 제작된 온라인 게임 로열티가 없었다면 벌써 만화가 생활을 접고 다른 직업을 택했을지도 모른다”는 게 양씨의 변이다.
인기 만화가의 이 같은 고백은 ‘열혈강호’ 팬뿐 아니라 일반 네티즌들에게도 큰 충격을 줬다. 팬 카페의 일부 회원은 ‘연재 펑크에 대한 변명’이라고 일축했지만, 상당수 네티즌은 국내 출판 만화 산업의 위축에 공감하며 이 글을 블로그에 퍼 날랐고, 자연스레 이 문제에 대한 토론이 벌어졌다.
그렇다면 정말 한국 만화는 심각한 위기에 직면한 것일까. 객관적 지표를 통해 살펴보면 꼭 그런 것 같지는 않다. 한국의 만화 산업은 크게 4개 영역으로 분류된다. 만화출판업, 온라인만화제작·유통업, 만화책임대업, 만화도소매업이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시장조사를 통해 2008년 현재 4개 분야의 매출 합계가 7232억원이라고 밝혔다. 이는 2001년의 7598억원에 비해 5% 가량 감소한 수치다. 그러나 자료를 꼼꼼히 살펴보면 만화 산업 전반의 매출이 감소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만화책임대업의 매출이 그 사이 5140억원에서 732억원으로 급격히 감소한 반면, 다른 업종의 매출은 모두 큰 폭으로 증가한 것이다.
그 사이 출간된 만화책의 수도 줄지 않았다. 한국만화영상진흥원이 발표한 2009 한국만화연감에 따르면 2008년 국내에서 출간된 만화책은 9433종이다. 이런 형식의 통계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2001년 현황을 파악하기는 쉽지 않지만, 대신 2001년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가 펴낸 ‘간행물심의보고서’를 보면 이 시기에 만화분과에서 심의한 만화도서의 수량이 9234종인 걸 알 수 있다. 전수 심의가 이뤄지지 않았을 수는 있으나 큰 차이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발간된 만화책 수가 비슷한 반면, 표에서 보듯 만화출판업계의 매출액은 이 기간 동안 2배 가까이 늘었다. 이는 만화 작품당 판매 부수가 크게 늘었음을 의미한다. 통계를 종합해 볼 때 한국 만화 산업은 7000억원대의 시장 규모를 유지하고 있고, 만화출판업 분야의 매출 규모는 오히려 성장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할 수 있다.
코믹스의 위기
기실 ‘만화산업 불황론’, ‘만화시장 위기론’은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비슷한 시기에 작품 활동을 시작한 다수의 만화가가 ‘과거와는 다른 오늘’을 이야기한 바 있다. 만화잡지 ‘아이큐점프’에 ‘힙합’을 연재하며 밀리언셀러 만화가로 불린 바 있는 김수용은 2008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100만부를 팔았던 제가 집 가스비를 못 낸다면 믿겠습니까”라며 위축된 만화 산업의 현실에 안타까움을 표했다.
반면 ‘만화산업 호황론’의 논거가 될 만한 사례도 적지 않다. 허영만의 경우 그의 만화를 원작으로 한 영화, 드라마의 잇단 히트로 ‘허영만 만화 원작의 경제적 파급 효과’를 논해야 할 만큼 강력한 브랜드 파워를 형성하고 있다. 온라인을 중심으로 색다른 서사만화를 펼치며 주목받는 작가로 성장한 강풀도 있다. ‘먼 나라 이웃나라’ ‘마법천자문’ ‘WHY’ 등의 만화 시리즈물은 스테디셀러로 꾸준히 인기를 모으며 각각 1000만부를 넘는 경이적인 판매고를 기록하고 있다. 만화가 21세기의 대표적인 문화상품으로 성장했음을 증언하는 실례들이다.
문제는 동시대에 불황을 겪는 창작자 진영과 호황을 누리는 창작자 진영이 공존한다는 점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만화 산업은 전체적으로 볼 때 앞서 검토한 것과 같이 예년의 규모를 유지하고 있다. 다만 시장 내부에서 불황을 겪는 분야가 명확하고, 이들과 호황을 누리는 이들의 격차가 나날이 심해지고 있는 것이다.
한국 만화 불황론을 펼치는 양재현, 김수용 등의 만화가는 이른바 ‘코믹스’라 불리는 분야에서 성장하고 일가를 이뤘던 작가들이다. 코믹스는 1990년대 초 형성된 만화 분야로 일본 만화와 같은 편집과 제작 관습을 취했던 장르다. 주간지 형식의 만화 정기 간행물에 작품을 연재하고, 일정 분량이 되면 이를 묶어 단행본으로 판매한다. 코믹스는 1990년대 이후 한국 만화 산업의 성장과 더불어 미래를 상징하는 장르로 평가받으며 발전 양상을 보였다. 그러나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시장 위축의 징후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우선 한때 40여 종에 달하던 만화 잡지가 잇따라 폐간되면서 힘을 잃었다. 급속한 시장 위축의 요인으로는 책 대여점의 성장과 대여 중심의 만화 유통구조, 인터넷·휴대전화·게임기의 확산, 청소년보호법 등 국가 차원의 통제정책 등이 꼽혔다. 최근에는 코믹스의 주독자층이던 초·중고생이 급격하게 감소한 것에서 근본적인 원인을 찾는 이들도 있다.
달라진 만화 생태계
어쨌든 현재 우리의 만화 산업은 과거 시장의 중심을 형성했던 코믹스가 위축되고 ‘코믹스와는 다른’ 장르가 등장해 규모를 유지하는 형국이라고 볼 수 있다. ‘코믹스와는 다른’ 장르를 대표하는 키워드가 바로 허영만, 강풀, ‘마법천자문’이다. 이들은 각각 코믹스를 대체할 만한 대안적 요소를 지니고 있다. 먼저 허영만은 코믹스의 위축 요인으로 꼽혔던 대여 소비 문제를 신문 연재 후 서점용 단행본 발행이라는 새로운 작품 유통 과정을 통해 극복했다. 강풀은 인터넷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서사만화인 웹툰을 구축했다. ‘마법천자문’으로 대표되는 일련의 시리즈물은 코믹스에 비해 학습성을 강조했다는 측면에서 사회문화적 차원의 응원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이 세 키워드의 약진에서 보듯, 최근 한국의 만화 산업은 매우 역동적인 시장으로 변모하고 있다. 특히 학습만화는 과거의 코믹스를 대체할 만한 핵심 상품군으로 성장했다. 물론 코믹스가 변화의 흐름 속에서 위축되고만 있는 것은 아니다. 시장의 변화와 함께 코믹스계 만화가들 역시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있고 일부는 가시적 효과를 달성하기도 했다. 양씨는 팬카페에 올린 글에서 만화 그리기의 어려움을 고백한 뒤 “동료 작가들은 일본으로 가서 다시 도전하라고도 하고 어떤 작가들은 아무리 어려워도 한국에 남아 자존심을 지켜달라고도 합니다. …같이 잡지에서 연재하던 작가들이 일본으로 가서 노력 끝에 최소 저희의 5배 이상의 결실을 이뤄내는 것을 보고 있자면 아무리 초심을 외쳐봐도 마음잡기가 힘이 듭니다”라고 적었다.
2000년 이후 위축기에 접어든 코믹스계 만화가들이 코믹스의 본고장이랄 수 있는 일본 시장에 도전장을 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 박성우, 박무직, 양경일, 임달영 등 다수의 코믹스 작가가 한국에서의 인기를 뒤로하고 일본의 신인 만화가로 출발해 현재는 중심 작가로 성장했다. 또 일본 만화의 세계화 흐름을 본받아, 유럽이나 북미권 수출을 목표로 하는 코믹스 창작에 도전하는 작가들도 있다. 우리나라 코믹스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박산하, 이충호, 문정후 등은 새롭게 떠오른 학습만화 분야에 집중하면서 새로운 성과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양영순, 윤태호, 조재호 등의 만화가는 새롭게 등장한 웹툰 형식에 맞춘 작품을 발표하며 또 다른 전성기를 맞았다.
한국형 산업 모델
이처럼 다양한 모색이 이뤄지면서 만화 산업에 참여하는 기업의 모습도 달라지고 있다. 코믹스 중심 시장에서는 만화잡지를 출판하는 기업이 산업을 주도했다면, 현재는 특정 매체를 지니지 않은 단행본 출판사, 포털사이트, 에이전시 전문 기업, 멀티콘텐츠 기획사 등이 각자의 지분을 갖고 만화 산업을 이끌고 있다. 기존의 만화 기업들 역시 책 판매 중심의 매출 구조를 개선하기 위해 영화영상, 게임캐릭터 분야의 사업부를 신설하고 저작권을 판매하는 등 매출 다각화를 시도하고 있다. 반면 변화의 흐름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했거나 전통적인 만화 형식과 시장을 고수하고자 했던 만화가와 기업은 취지의 순수성이나 긍정성과 무관하게 지속적인 위기 앞에 놓여 있기도 하다.
현재 한국의 만화 산업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다양성을 바탕으로 미래 시장의 가능성을 확대해가고 있다. 학습만화나 웹툰, 만화를 원작으로 한 게임영상콘텐츠 분야의 성공이 우리나라처럼 눈부시게 나타나는 사례가 없다. 코믹스가 위축된 것은 사실이지만 새로운 만화장르가 활성화되고 있고, 코믹스 출신 만화가들의 활동이 위축된 것은 사실이지만 상당수 코믹스 만화가가 해외시장과 인터넷매체를 중심으로 의미 있는 성과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점에서 필자는 한국 만화의 오늘을 비관하지 않는다.
인쇄매체에 대한 소비 수요의 축소, 만화의 최대 소비층인 청소년 인구의 감소 등이 우려스럽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한국만화계는 이미 스마트폰이나 태블릿PC 등 새로운 전자매체에 적응해가고 있고, 내부시장의 불안을 수출이나 해외 현지화 방식을 통해 풀어가고 있기도 하다. 그래서 한국의 만화 산업은 현재 위기라기보다 기회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과거의 만화 산업이 일본 만화계를 참조해 구축됐다면, 최근의 만화 산업은 지극히 한국적인 모델로 재정비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 만화의 미래 가능성은 더욱 높다 할 것이다.
박석환│만화평론가, 한국만화영상진흥원 콘텐츠팀장 comicspam@naver.com
[신동아](2010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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