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도영, 한국만화의 표현 기법과 수사법을 찾아내다
한국만화의 탄생은 일본의 반 식민지 상태였던 1909년 6월 2일 창간된 <대한민보>와 함께 한다. 서화가 출신의 젊은 애국지사였던 이도영이 ‘삽화’라는 제목으로 일제에 의해 매체가 강제 폐간 될 때(1910년 8월 31일)까지 현재적 의미의 시사만화를 연재했다. 첫 회 연재분은 <대한민보>의 창간 취지를 설명하는 홍보용 일러스트로 볼 수 있으나 단순화된 인체 묘사와 과장된 표정, 말풍선 역할을 하기도 하고 시간의 경과를 나타내기도 하는 ‘네 줄의 선’ 등은 이 작품을 현재적 의미의 만화로 꼽기에 손색이 없게 만든다. 특히 2회 연재분부터는 당시 시국상황을 통렬하게 비판하는 본격 시사만평을 선보였다. 이도영의 작품에서는 칸나누기, 동작선, 말풍선의 응용 등 다양한 표현 기법과 비유, 대비, 풍유, 언어유희 등 현대적 만화 수사법을 찾을 수 있다.
2. 언론 검열과 만화탄압에 항거한 독자투고만화의 전통
일제는 갖은 방식으로 신문과 잡지를 검열했다. 검열에 걸린 기자는 고초를 당해야 했고 매체는 발행정지 처분을 당하기도 했다. 이 같은 이유로 이도영 역시 <대한민보> 연재 당시 총독부와 친일 매국노를 향해 강도 높은 실명비판을 할 때 필명을 사용하기도 했다. 1920년 창간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역시 필명이나 무기명 만화를 다수 게재했다. 한편으로는 이 같은 부담을 경감하는 차원에서 소속 매체의 기자나 시사만화가가 그린 그림을 ‘독자투고만화’라는 명칭을 붙여 게재하기도 했다. 어떤 것이 먼저였는지 알 길은 없으나 ‘진짜 독자’들이 그린 비판적 만화도 게재했다. <동아일보>는 1923년 만화현상공모를 실시했고 일요판에 독자투고만화를 정기 게재했다. <조선일보>는 1924년 신춘작품모집을 통해 만화를 공모했다. 신예작가를 발굴하는 한편, 민의를 살피고 반영할 수 있는 이 같은 대중매체의 공모제도는 현재까지 우리 만화계의 인제 발굴 시스템으로 활용되고 있다.
3. 종합만화인 김동성, 연재만화의 창작시스템을 제시하다
미국에서 신문학을 전공하고 <동아일보> 창간 멤버로 활동했던 김동성은 밭전(田)자 형태의 만화 등 다양한 형식의 신문만화 창작 형식을 제안했고 직접 작가로 활동하기도 했다. 이후 1924년에는 <조선일보> 발행인 겸 편집인으로 자리를 옮겨 본격 기획창작만화라 할 수 있는 눈목(目)자 형태의 <멍텅구리 헛물켜기>를 탄생시켰다. 스토리는 이상협과 안재홍이 맡았고 그림은 노수현이 그렸다. 한량들의 애정행각을 소재로 한 슬랩스틱 코미디 만화인 이 작품은 <멍텅구리>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되기도 했다. <멍텅구리 헛물켜기>가 인기를 끌자 <동아일보>는 안석주의 <허풍선이 모험기담>을 연재했다. ‘만화를 앞세운 매체 간 경쟁’의 첫 사례로 볼 수 있다. 김동성은 언론인으로 출발해서 정치인이 되기까지 만화가, 만화이론가, 만화기획자 등의 역할을 하며 초기 한국만화의 마당을 마련했다. 특히 최초의 만화작법 이론이라고 볼 수 있는 ‘만화 그리는 법’을 연재하는 등 만화창작의 저변을 넓히기 위해 노력했다. 김동성의 제안으로 출발한 스토리와 그림작가의 분업 창작, 삼각연애 중심의 매체 연재형 이야기 구조, 만화원작의 영화화, 매체별 톱작가 기용 등은 현재까지 유효한 시스템으로 작동하고 있다.
4. 아동을 향한 만화의 키워드, 계몽과 오락만화의 출발
일제의 식민 지배는 후기로 갈수록 더욱 폭력적으로 변했고 언론은 사회비판적 시사만화를 더 이상 게재하지 못했다. 초기 민족지를 자임했던 매체들도 사세확장 등을 이유로 친일적 매국행위를 자행하기도 했다. 이에 따라 신문만화는 본래의 비판적 기능보다는 계몽적 역할과 오락적 기능에 충실한 작품을 게재하기 시작한다. 정치나 사회에 대한 직설적인 비판보다는 ‘모던’으로 대표되는 현대화 과정의 웃지 못 할 풍경을 구수한 글솜씨와 그림으로 풍자하는 ‘만문만화’'가 유행하기도 했다. 또 당대의 신문은 성인남성의 전유물에서 어린이, 여성 독자를 위한 지면을 제공하며 대중매체로 발전하기 위해 노력했다. 신문은 본지 또는 별지를 통해 아동 대상의 다양한 만화작품을 게재하며 독자층을 넓혀갔다. 한편, 이렇게 넓어진 독자의 요구를 신문이 모두 수용하지 못하면서 잡지만화의 인기도 높아졌다. 30년대 중후반부터 해방 이전까지 성인과 아동 대상의 만화를 두루 창작하며 빼어난 활동을 전개한 작가로는 김규택, 안석주, 최영수 등이 있다. 이들이 주목했던 ‘계몽과 오락’이라는 아동만화의 키워드는 현재 ‘교양학습, 지식탐험’이라는 거대한 아동만화 장르의 산을 만들어냈다.
5. 만화의 기능성을 발견하고 대중파급력을 확인하다
1945년 해방과 함께 통제됐던 말과 글이 풀리면서 신문과 잡지, 도서가 쏟아져 나왔다. 하동안 자취를 감췄던 만화도 인쇄매체의 폭발적 증가와 함께 재등장했다. 임홍은, 김규택 등 기성작가군과 김용환, 김의환 형제, 신동헌, 김성환 등 신진작가군의 활약이 펼쳐졌다. 아동문학협회를 중심으로 계몽적 성격이 강한 고전소설이나 전래동화 등이 '이야기그림책'이라는 이름의 만화로 출판되어 호평을 받았다. 세태풍자 중심으로 흐르던 신문만화도 신문의 다양화와 함께 본래의 정치풍자 기능을 되찾았다. 만화를 중심으로 편집된 신문 <만화뉴스>가 발행되며 당대 최고의 판매기록을 수립하기도 했고, <신세대>, <어린이> 등 다양한 잡지가 만화를 게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950년 한국전쟁이 벌어지며 만화는 또 다시 위기에 처한다. 당대의 신예 스타 ‘코주부’ 김용환과 ‘고바우’ 김성환은 육군본부 등에서 대민 살포용 삐라와 선전용 만화책, 포스터 등을 그려야 했다. 만화라는 형식이 지닌 ‘연상작용’의 기능성과 대중파급력을 확인할 수 있는 사건이었지만 아쉬운 역사의 한 장면이다.
6. 만화에 찍힌 낙인, 쉽게 지워지지 않는 ‘저질’과 ‘왜색’ 시비
한국전쟁을 전후한 시기에도 만화는 다양한 역할을 수행했다. 혼란스런 정국을 호되게 비판하기도 했고 피로한 대중에게 새로운 세계에 대한 열망과 희망을 전하기도 했다. 시대극화의 전범을 보여줬던 김종래, 박광현, 박기당과 함께 기발한 상상력으로 명랑만화의 세계를 구축한 임수, 신문수, 김경언 등이 50년대 중후반 등장해 만화계에 활력을 더한 작가들이다. <만화소년>, <만화세상>, <만화세계>, <아리랑> 등 교양과 오락 기능에 충실한 잡지의 창간 소식도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한편으로는 이 시기에 우리 만화 역사 중 가장 치욕적인 부분인 ‘저질 만화와 일본만화 표절’ 사건이 발생한다. 만화를 선호하는 대중의 기대 심리를 악용한 저속한 관행이 시작 된 것이다. 만화붐이 일자 일부 출판업자들은 저급한 필력을 지닌 작가의 그림을 받아 조악한 종이에 출판한 이른바 ‘딱지만화’를 출판했다. 또, 일본만화를 표절하거나 무단으로 번역해 한국작가 이름을 붙여 출판하는 사례도 있었다. 이중 최근까지 당대의 소년들에 의해 기억되고 있는 작품이 일본만화 <소년 케냐>를 베낀 <밀림의 왕자>이다. 저질만화와 일본만화 무단복제는 이 시기에 시작되어 수 십 년간 이어졌고 ‘무단 복제한 일본만화의 폭력성과 선정성’은 곧 ‘우리만화의 폭력성과 선정성으로 부각’되며 만화를 사회적 지탄과 경계의 대상으로 만들었고 사전검열과 심의의 기준이 되기도 했다.
7. 만화방의 추억, 만화방의 후회 : 대량생산과 소비 시스템
1957년에는 국내 최초의 만화총판인 서울총판이 문을 열었다. 서울총판은 출판사로부터 만화책을 받아 각 지역별 총판에 공급하고 지역총판은 중간도매상을 통해 이를 전국의 만화방에 유통시켰다. 1959년 통계에 의하면 당시 만화방은 전국적으로 2000여 곳에 이를 만큼 번성했다고 한다. 돈을 내고 입장하거나 만화책 권당 얼마의 돈을 내고 현장에서 열람하는 방식의 만화방 시스템은 만화책의 유통과 소비를 대규모로 확산시키는 역할을 했고 서사만화 장르의 다양성을 이끌어냈다. <도전자>의 박기정, <라이파이>의 산호, <싼디만>의 오명천, <악동이와 영팔이>의 방영진 <울 밑에 선 봉선이>의 권영섭 등이 스포츠, SF, 서부극, 학원명랑, 순정 등 새로운 만화장르를 탄생시키면서 만화 대중화를 주도했다. 만화방 시스템이 상업적 성공을 거두자 1966년에는 이 시스템을 장악하고 만화책의 생산과 유통을 독점한 합동문화사가 설립되기도 했다. 독점체제의 폐해는 작가에 대한 압박과 작품, 출판물의 저질화로 이어지면서 많은 문제를 양산했다. 만화가들은 이에 대항하기 위한 작가출판 시스템을 도입하는 등 활로를 모색하기도 했으나 오래가지 못했다. 이 시스템은 ‘독고탁’의 이상무, ‘이강토’의 허영만, ‘까치’의 이현세를 등장시키며 화려하게 80년대를 열었고 박봉성, 고행석, 하승남, 야설록, 황성 등 액션과 무협 장르에 특화된 작품을 도출시키며 현재까지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만화하면 만화방을 떠 올릴 만큼 이 시스템은 우리 만화를 대표하는 공간적 개념이지만 한 작가가 한 달에 30여 권 이상의 만화책을 생산하는 등 기형적 형태로 발전되다가 변화하는 독자의 요구를 수용하지 못하고 좌초했다.
8. 만화전문잡지, 만화의 대량생산과 대량소비 시스템을 변화시키다
1967년 <어깨동무> 창간 이후 <새소년>, <소년중앙> 등의 아동교양잡지가 주목받기 시작했고 연이어 <선데이서울>, <일간스포츠> 등 성인을 위한 오락매체가 창간되면서 만화는 인쇄매체의 핵심 요소가 됐다. 신문과 잡지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작가군과 만화방 중심 유통구조에서 과도한 생산성을 요구받던 작가군이 자연스럽게 나뉘면서 경쟁 구도를 형성하기도 했다. 만화방 만화의 경우 아동만화자율심의위원회, 간행물윤리위원회 등의 사전, 사후심의에 휘둘리면서 만화 소재나 내용의 다양성에 제한을 받았던 반면, 거대 언론사의 그늘 아래 있던 잡지만화의 경우는 상대적으로 심의에서 자유로웠고 이 같은 ‘자유 창작 환경’은 우리만화의 질적 경쟁력을 높이는 역할을 했다. 신문수, 길창덕, 김원빈, 강철수, 방학기, 김삼, 고유성 등의 작가가 이 시기를 전후로 등장했다. 잡지만화는 1981년 <보물섬>의 창간과 함께 만화전문잡지 시대를 만들어냈고 김수정, 김형배, 황미나, 이희재, 윤승운 등의 작가를 탄생시키기도 했다. 특히 군사정부의 대중문화 확산 정책과 88서울올림픽 등으로 인해 문화예술장르에 대한 표현 수위가 높아지면서 성인을 위한 만화잡지 <만화광장>, <주간만화> 등이 등장해 호평을 받았다. 1988년에는 일본만화산업의 중추를 형성하고 있는 주간만화전문잡지 시스템을 도입한 <아이큐점프>가 창간되고 이후 <소년챔프>가 등장해 경쟁구도를 취하면서 새로운 만화 붐을 주도했다. 곧이어 순정만화잡지, 성인만화잡지 등이 생겼고 잡지연재 만화를 서점판매용 단행본으로 발행한 이른바 ‘코믹스’가 만화출판의 새 모델이 됐다. 박산하, 이충호, 김수용, 이명진, 양재현, 양영순, 천계영, 윤태호 등이 신예작가군을 형성하며 화려하게 등장했고 ‘100만부 판매’ 작가가 다수 등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1997년 경제의 거품이 제거되고 외환위기에 이은 장기 불황 사태가 이어지면서 만화방과 유사한 형태의 만화책대여점이 등장했다. 만화책 유통은 구매소비로 전환되는가 싶더니 얼마 가지 않아 대여소비로 돌아섰고 만화책대여점은 만화시장 붕괴의 원죄를 뒤집어 쓴 채, 한 때 2만여 개였던 것이 현재 2천 여 개만 운영되고 있다.
9. 만화대중화와 산업화의 두 얼굴, 정부의 진흥과 통제
1995년 정부는 문화산업의 경제적 효과에 집중했고 만화진흥정책을 발표하는 한편, 관주도의 대규모 만화축제를 시행한다. 서울국제만화애니메이션페스티벌은 1회 행사에서 15만명 이상의 관람객을 유치하며 만화에 대한 국민적 관심과 산업계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이후 유사 행사가 이어지고 지방자치단체가 지역형 특화산업으로 만화를 주목하면서 만화는 급격히 산업화 단계로 접어들었다. 과거에도 만화는 출판시장의 노른자 역할을 했으나 이 시기를 이후로 만화는 출판이라는 제한된 영역 안에 존재하지 않고 독립적인 문화산업 장르라는 점을 확인 받기에 이른다. 잡지 연재, 단행본출판을 시작으로 캐릭터와 스토리를 중심으로 한 연관 문화상품 개발이 정형화 되면서 ‘원소스멀티유즈’라는 새로운 산업 용어를 탄생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정부의 진흥정책을 중심으로 활성화됐던 만화산업은 곧이어 진행된 통제 정책에 의해 반쪽짜리로 전락하고 만다. 1997년 시행된 청소년보호법은 만화를 청소년유해매체로 규정해 일반 유통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등 확대일로에 있던 만화산업의 숨통을 죄기 시작했다. 만화계는 이에 반발해 1997년 11월 3일 규탄대회를 열기도 했으나 실효를 거두지는 못했다. 만화계는 이 날을 ‘만화의 날’로 제정, 매년 관련 행사를 열고 있다.
10. 만화100년, 한국만화계의 발명품 ‘웹툰’
2000년 만화계는 달라진 매체 환경에 맞춰 종이만화를 디지털로 전환하여 인터넷에서 열람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마련한다. 다수의 업체가 인터넷에서 만화전문잡지를 발행했고 젊은 만화가들은 인터넷 환경에 적합한 형식의 만화를 창작하기 시작했다. 권윤주, 심승현을 시작으로 강풀, 강도하, 양영순 등이 이 분야를 대표하는 작가로 활동 중이다. 웹툰은 출판만화산업의 위축기에 등장해 출판만화산업이 구축한 기존의 모든 시스템을 재구축하고 있다. 타블렛 컴퓨터로 그리고 컴퓨터로 인터넷에 접속해 마우스의 스크롤 기능을 이용해 열람하도록 한 웹툰은 창작과정과 소비방식 전체를 ‘정보통신 강국 한국’이라는 정체성 아래 도출시킨 한국만화계 100년의 발명품이라 할 수 있다.
글/ 박석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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