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석환, 불멸의 까치를 만들다 만화가 이현세, 한국인, 네이버캐스트, 2009.04.17


이현세는 우리 만화계를 대표하는 아이콘이다. 1982년 [공포의 외인구단]에서 보여줬던 주인공 까치의 열정과 외사랑은 당대의 젊은이가 지녀야 할 가치였고, 패배자들의 재기 드라마는 각박했던 그 시절의 날개였다. 그리고 보리 숲 속에서 맥주를 마시며 지평선을 응시하던 맥주 CF 속 이현세의 모습은 배경 음악으로 사용됐던 루이 암스트롱의 투박한 음색과 함께 강한 사내의 모습으로 대중에게 각인됐다.



약력

1954  경북 울진 출생(주민등록상 1956년생)

1974  서울 상경, 순정만화가 나하나 문하로 입문

   명랑만화가 이정민, 하영조 문하를 거친 후 다수의 작품 발표

1978  월남전을 다룬 <저 강은 알고 있다>로 공식 데뷔

1979  <시모노세키의 까치머리> 이후 다수의 까치 시리즈 발표

1982  <공포의 외인구단>으로 만화붐 주도(83년 영화화, '이장호의 외인구단')

1983  <지옥의 링> 발표(85년 영화화)

1987  <떠돌이까치> 발표(88년 TV 애니메이션화)

1988  <며느리밥풀꽃에 대한 보고서> 발표(88년 영화화)

   <아마게돈> 발표(96년 극장용 애니메이션화)

1989  <카론의 새벽> 발표(95년 영화화, '테러리스트')

1992  <폴리스> 발표(97년 TV 드라마화)

1994  <남벌> 발표

1997  <천국의 신화> 발표

2005  <만화한국사 바로보기> 발표

2007  <버디> 발표

2008  <창천수호위> 발표


제23대 한국만화가협회 회장 역임

현 세종대학교 예체능대학 만화애니메이션학과 교수

아시아만화인대회 특별상, 대한민국문화예술상,

대한민국만화대상 대통령상, 한국만화문화상 공로상, SICAF 특별상,

고바우만화상 외 수상



호랑이 눈을 한 야성의 사내, 순정만화와 명랑만화로 만화계에 입문하다


그 시절을 대표했던 강한 사내, 부서질 줄 알면서도 돌진하던 까치. 그 까치를 그렸던 이현세는 요즘 아이들을 위한 학습만화 [만화 세계사 바로보기] 시리즈와 성인이 된 그 시절의 독자들을 위해 골프 소재 기획만화 [버디] 시리즈를 그리고 있다. 정통 성인극화의 장을 열었고 작품 발표가 곧 대중문화사적 사건이었던 전작들에 비하면 매우 소프트한 근황이다. 그는 “학습만화를 하니까 사인회에 가도 아이들이 까치를 그려달라고 해요. 일본만화 주인공 그려달라는 소리하지 않아서 좋죠. 골프만화를 그리니까 아빠랑 아이가 함께 내 책을 읽고 있다는 소리도 들어요”라며 웃는다. 그의 눈은 여전히 호랑이처럼 강렬한데 웃음소리는 이웃집 아저씨처럼 부드럽다. 결코 타협하지 않았던 이현세. 쉼 없이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타성에 맞서 싸웠던 야성미는 어디로 간 것일까.


이현세는 고교 졸업 후인 1974년 서울에 올라왔다. 첫 상경 때는 만화가 화실이 많았던 모래내(남가좌동) 근처에 둥지를 틀었다. “어릴 때는 만화가 중에 손의성을 제일 좋아했고 오명천, 이종진의 작품을 즐겨 봤어요. 그 선생님들의 작품은 빠짐없이 봤죠. 펜 선이 칼처럼 날카롭고 율동미가 넘쳤어요. 그림을 흉내 내서 화실에 보내면 책 맨 뒤에 있는 독자만화 코너에 단골로 실리곤 했죠.” 만화를 좋아했고 그것 밖에 잘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생각했던 이현세였지만 만화계 입문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스무 살인데도 몸에 털이 많아서 나이가 더 들어 보였는지 늙었다고 안 받아줬어요. 진짜 스무 살이라니까 ‘금방 군대 가야 되니까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고 독자라 군대도 파주에서 6개월만 있었는데…. 아마도 부리기 힘들다고 생각했던 모양이에요. 어떻게 하나 싶었는데 순정만화를 그리는 나하나 선생님이 받아줬어요. 그 뒤로는 하영조 선생님과 이정민 선생님 문하에 있었고.” 이현세는 자신이 애타게 쫓던 활극만화가 아닌 여성의 섬세함을 담아야 하는 순정만화와 아기자기한 아이디어로 승부해야 하는 명랑만화로 출발했다. 누구보다 잘 할 수 있다고 믿었던 만화였지만 그 중에서도 제일 부족한 곳에서 출발했다. 그 부분을 채우자 자기만의 만화를 갈망하게 된다.


“극화 쪽으로 옮겨서 이름만 대면 알만한 선생 밑에서 그림을 그렸어요. 그 시절에는 작업 속도가 다른 문하생들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빨랐고 한번 본 것을 모사하는 것에도 능했죠. 당시 ‘새소년’이라는 잡지가 있었는데 부끄러운 일을 많이 했어요. 선생은 그 잡지사에 가서 유행하는 일본만화나 미국만화를 가져왔고, 내 역할은 그걸 보고 그림을 그대로 그리는 것이었어요. 만화 아니면 할 것이 없다는 생각에 시키는 대로 그림만 그리던 때죠.”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힘든 그때, 이현세는 고향으로 도망치기도 했고 선생은 그를 잡으러 오기도 했다. 배도 고프고 술과 담배도 고팠던 시절, 그는 모든 허기를 만화 그리는 것으로 채웠다고 말한다. “그러고 나니까 내 만화를 하고 싶어졌어요.”


'까치'는 깨질 것을 알면서도 달려드는 사나이죠, 그것이 내가 살아온 방식이에요


이현세가 데뷔작으로 꼽는 작품은 1978년 발표된 [저 강은 알고 있다]이다. 이 시기 이전에도 다수의 작품을 발표했지만 순수 창작이라고 할 수 없었다. “이전에 했던 원고는 모두 불태워버렸어요. 조금 인기를 얻자 어떤 출판사 사장이 당시 원고를 사겠다고 했어요. 부끄러운 일이었죠. 이후로도 이런 유혹에 흔들릴 것 같아서 태워 버렸어요.” 이현세는 그 시기가 있었기 때문에 일본이나 미국의 만화를 섭렵할 수 있었고, ‘까치’와 ‘이현세’는 그 시기를 통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말한다.


만화주인공 까치가 처음 등장한 작품은 1979년 발표된 [시모노세끼의 까치머리]였다. “좀 독특한 주인공을 만들고 싶었어요. 고민을 많이 했는데 내가 가장 잘 아는 사람, 내가 가장 잘 그릴 수 있는 사람이 나였고, 그래서 까치의 모습에 나를 담았죠.” 하지만 까치가 대중적으로 알려진 것은 [공포의 외인구단]부터였다. 당시 프로야구는 최고의 선수들이 돈의 가치를 중심으로 우열을 가리는 공간이었다. 승자만이 존재하는 공간이지만 외인구단은 패자들이 모인 곳이다. 까치 역시 승리만 하는 히어로가 아니라 패배를 경험한 독한 사나이였다. 이현세는 이 ‘까치’라는 인물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까치는 이기기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에요. 깨질 것을 알면서 달려드는 사나이죠. 못났지만 잔머리 굴리지 않는 사나이. 까치는 의지의 사나이에요. 그래서 까치의 이야기도 결과의 승리가 아니라 의지의 승리로 풀어갔어요.” 노력으로 바꿀 수 없는 것이 운명이라고 하지만, 그는 ‘의지’만 있다면 상황은 바꿀 수 있다고 말한다. “의지만 있다면 어떤 부분에서는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이죠. 그것이 까치고 내가 살아온 방식이에요.”


"나는 마초다"… 나를 인정하자 작품이 나왔어요


이현세의 작품에는 남성중심적 영웅주의와 과도한 민족주의가 판을 친다. 이 같은 독자들의 판단은 인기 스타가 된 후 출연한 CF를 통해서 더 분명해졌다. 그는 겉모습만으로도 충분히 ‘강한 사내’로 보였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반작용이었을까. 이현세는 여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다수의 작품을 발표하기도 했다. 여자배구를 소재로 했던 [불새의 투혼]부터 시작해, 시골 소녀의 서울 상경기를 그린 [며느리밥풀꽃에 대한 보고서], 여자형사를 등장시켰던 [블루엔젤], 여자 골퍼의 성공기를 다룬 [버디]까지. 하지만 겉모습이 여자일 뿐 주인공은 남성적이거나 극의 후반부로 가면 남자 등장인물의 매력에 압도당하고 말았다.



“날 보고 마초 같다고 해요. 그래서 각성도 해보고 여자의 마음을 작품에 담아보려고 노력하기도 했어요. 로맨틱코미디에 도전하기도 했는데 잘 못하겠더라고요.” 일부러 까치를 그리지 않았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까치가 나와야만 만화가 되더라는 이현세. “내가 나를 보고 만든 까치였지만 까치를 이긴 적이 없어요. 까치가 아닌 다른 캐릭터를 이야기하고 싶기도 했고, 그 때문에 방황도 했지만 지금은 그것이 나고, 내 만화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어요. 영화감독 곽경택과 친하게 지내는데, 같이 작품 이야기를 하다 보면 그렇게 잘 통할 수가 없어요. 둘 다 마초라서 그런 것 같아요.(웃음)”


까치가 인기를 얻자 곳곳에서 웃지 못할 일이 벌어졌다. 그 중 하나는 만화방 상호에 까치가 등장한 것이다. 어딜 가나 ‘까치만화방’이라는 간판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까치만화방’에는 이현세의 만화를 따라 그린 실로 수많은 ‘까치 만화책’이 쌓여 있었다. “한때는 만화방에서 책을 내는 대부분의 만화가가 까치, 엄지, 동탁을 주인공으로 만화를 그렸어요. 이름은 달랐지만 겉모습과 성격은 같았죠. 독자들도 내가 그린 것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그런 작품을 소비했어요. 해도 너무 한다 싶어서 세 명의 주인공에 대해 의장등록을 하기도 했어요.”


[공포의 외인구단]이 인기를 끌자 이를 원작으로 한 이장호 감독의 영화가 제작됐다. 당대의 아이돌 스타 최재성이 까치가 됐고 에로스타로 각인됐던 이보희가 엄지 역을 맡았다. ‘난 네가 기뻐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까치의 작품 속 대사는 당대의 톱가수 정수라의 입을 통해 불려졌다. “만화에 이어 영화, 주제가가 히트를 치면서 나도 스타 대접을 받기 시작했죠. TV에도 여러 번 출연했지만, 내 모습이 대중적으로 알려진 것은 TV 맥주광고 탓이 커요. 첫 반응이 좋아서 총 세편을 찍었는데, 밖에 나가면 알아보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광고 영상은 상당히 여유로운 남자로 그려졌었는데 까치의 이미지가 겹쳐져서 그런지 강한 사내의 모습으로 기억된 것 같아요.”


음란물로 고소당했던 [천국의 신화], 창작과 표현의 자유를 위해 싸우다


인기만화가라 좋은 것이 있다면 남들보다 많은 기회가 온다는 점일 것이다. 그 중 누구는 무난한 것을 고르고, 누구는 쉽지 않은 것을 택한다. 이 부분에서 이현세는 도전자였다. 늘 새로운 것을 시도했다. 모두 명중시켰던 것은 아니다. 화살이 과녁을 한참 벗어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만큼의 영역을 우리 만화계의 전선으로 확장시켰다. “인기가 생기면서 일이 많아지고 우쭐하는 마음이 생겼어요. 점점 일에 최선을 다하지 못하게 됐어요. 첫 번째 실패는 극장용 애니메이션 [아마게돈] 제작이에요. 당시 스포츠 신문에 [남벌]을 연재하고 있었는데, 한국이 북한과 함께 일본을 침공한다는 이야기에 흠뻑 취해있었죠. 더군다나 만화는 내가 결정하면 됐지만, 애니메이션은 하나부터 열까지 제작팀 전체의 의견을 조정해야 하는 고된 작업이었어요.”


[천국의 신화] '무죄' 판결 당시 일본 만화가들이 보내온 축하 메시지


당시 [아마게돈]은 순수 국내 기술과 자본만으로 창작 애니메이션을 만들어야 한다는 많은 이들의 의지가 모였던 작품이었다. 하지만 그의 의지는 시간이 지날수록 작아졌고, 결과적으로 ‘한국창작 애니메이션은 아직 시기상조’라는 평가를 받아 모처럼 조성했던 애니메이션에 대한 투자 열기도 사라져 버렸다. ‘이현세가 해도 안 되는데’라는 이야기가 떠돌았고, 그는 “진짜 숨고 싶었다”고 고백한다. 그는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많은 이들이 참여하고 기대했던 프로젝트를 망가트렸다는 자책감이 크게 느껴졌다.


[천국의 신화]도 큰 실패 중 하나예요. 한국의 상고사를 상상력을 동원해 복원하겠다고 선언하고 100권짜리 기획물을 그리기 시작했죠.” 그런데 6권이 나왔을 때 검찰에서 음란물 배포 혐의로 기소했다. 동물과 사람의 구분이 없던 때, 도덕이라는 기준이 서있지 않은 원시 자연을 음란하다고 기소한 것이다. “천지가 창조되고, 동물과 사람이 구분되고, 도덕과 법이 형성되어가는 원시시대를 표현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었던 부분이라 생각했는데 이를 음란물로 낙인 찍어버렸죠.” 이현세는 이것이 개인의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개인의 문제라면 적당히 타협하고 물러섰을 것이지만 그마저 피해버린다면 만화창작의 자유와 만화표현의 수위는 한층 더 위축될 것이라 여긴 것이다. “그래서 걸어온 싸움에 응했죠.”금방 끝날 것이라는 기대도 있었지만 법정 싸움은 6년간 계속됐고, 그 결과는 법원 인터넷 홈페이지에 뜬 ‘이현세 무죄’라는 한 줄이 전부였다. 물질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큰 피해를 입었다. 무엇보다 그가 이 작품을 시작할 때 지니고 있었던 신명이 사라져 버렸다. 40대에 시작한 작품을 50대에, 그것도 50권이 조금 넘는 반토막 상태로 완결해버렸다. “무엇보다 50대가 되고 보니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졌어요. 40대 때는 중국의 요 황제를 천족의 자손이라고 표현할 만큼 기세 등등 했지만 50대가 되니까 굳이 그렇게 할 필요가 있을까 싶어졌어요. 그러다 보니 전체 서사에 일관성이 부족해졌죠.”


실패가 곧 패배여서는 안돼요. 천천히 다시 시작하는 방법 밖에 없어요


[천국의 신화] 음란물 시비에 대한 이현세의 분노는 여전해 보였다. 잘못하지 않은 것에 대한 죄를 인정하라 하고, 자신은 인정하지도 않았는데 사회적으로는 이미 죄인이 되어버렸던 6년 간에 대한 분이었다. “내가 가진 무기는 만화에요. 그리고 또 한 가지는 낙천성이에요. 실패가 두렵지 않은 이는 없어요. 하지만 실패가 곧 패배여서는 안 되죠. 어차피 인생은 단거리가 아니니까, 조급할 필요가 없어요. 젊을 때는 여유가 없기 마련이어서 속도를 내 달리지만, 지쳐서 몇 번 멈춰 보면 여유 있게 걷는 법을 알게 돼요. 한 걸음씩 천천히 걷다 보면 결국 원하는 지점까지 갈 수 있어요. 다른 방법은 없어요. 천천히 집중하면서, 자신의 의지를 향해 걸어야 해요.”



이현세는 최근 몇 년간 작품 활동보다는 만화가 협회 업무에 더 집중했다. 데뷔 후 작품에만 매달리느라 주변에 대한 이해나 배려가 부족했다고 느낀 것일까. 대학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협회장으로서 만화 발전에 기여하기 위해 뛰었다. 그 뒤부터 이현세는 어느 때보다 더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만화 주인공 뒤에서가 아니라 신문 칼럼이나 만화작품의 서문을 통해 더욱 직접적으로 대중에게 말을 걸고 있는 것.


“사는 방법은 다양하지만 다르거나 변하지 않는 것이 있을 것 같아요. [버디]는 그런 생각 속에서 나온 작품이죠. 나를 처음 만났던 독자들이 이제는 골프를 치거나 관심을 가지고 있는 어른이 됐어요. [버디]는 그런 독자들을 위해 기획된 거예요.” 이 만화에서 그는 여자 골퍼의 성공담을 빌렸지만 이현세 나름의 인생론을 담고자 했다고. “누구에게나 기회는 찾아와요. 또 성공 뒤에는 위기가 있기 마련이에요. 이 위기를 극복하는 길은 결국 처음부터 천천히 다시 시작하는 것뿐이에요. 오만해서도, 흥분해서도 안 되죠. 위기라는 것은 서둔다고 해서 빠져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문득, 세간에 성인만화의 라이벌 구도로 회자되는 만화가 허영만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이상무 선배가 빠지면서 허영만 선배와 내가 성인만화의 라이벌로 부각됐어요. 허선배나 나나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언론이나 평론가들이 그렇게 붙이기를 좋아해요. 스포츠신문 간에 경쟁을 하니까 거기에 연재하는 허선배와 내 만화가 붙기도 했고, 작품 스타일부터 사는 방식까지 어쩌면 허선배와 나는 정반대기 때문에 더 비교되는 것 같아요. 사실 술을 먹더라도 허선배가 관리형이라면 나는 두주불사형이에요. 나고 자란 배경과 정서에도 영호남이라는 지역색이 있고요.” 후배만화가 양영순의 표현을 빌자면, ‘허선생님은 깨끗한 포장육 같고 이선생님은 아무렇게나 막 자른 돼지고기 같다’고. “허선배가 모범생이라면 나는 불량배죠.(웃음)”


이현세와 까치, '야성'이라는 직구에 '관록'이라는 변화구를 더하다


항상 새로운 시도로 한국 만화계의 전선을 확장해온 그이지만, 요즘은 독자들이 만화에서 찾는 재미도 달라졌다며 그에 맞춰 창작 스타일도 달라졌다고 말한다. 이현세는 자신의 변화를 인정해야 하는 것이 아쉬운 듯 쓴 웃음을 지으면서 학습만화와 골프 소재 기획만화를 꺼내 보였다. 그리고 곧 이어 ‘하고 싶은 건 해야 한다. 그래서 무협극화라 할 수 있는 [창천수호위]를 하고 있다’며 또 한 권의 작품을 펼쳤다. 거기에는 허기진 야수의 모습을 한 까치가 있었다. 마치 ‘옛날에는 직구만 던졌지만 지금은 변화구를 섞어서 던진다’고 말하는 것 같다. 배포 큰 사내의 관록을 본다. 신뢰할 수 있는 야성을 본다.


만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현세의 눈은 여전히 야수의 눈동자처럼 빛났다. 거친 말투와 무심한 듯 던지는 유머 역시 그대로였다. 다른 것이 있다면 활짝 웃는 입 모양이었다. 주변의 청을 거절하지 못하는 성격 탓에 그는 여전히 시간에 쫓기고 있었지만 연신 웃고 있었다. 마치 앞으로 웃으며 살기로 계획한 사람처럼. 여느 때처럼 분주한 연구실에서 조교는 프로젝트에 사용할 일러스트 시안을 잡아달라며 기다리고 있었고 휴대폰은 쉬지 않고 울렸다.


이현세는 입과 눈으로는 인터뷰에 응했고 손과 머리로는 일러스트를 그려냈다. 여러 사람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A4지에 쓱쓱 그린 그림은 호랑이가 됐다. 정면을 주시하고 있는 호랑이. 함부로 움직이지 않는 호랑이.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주변을 압도하는 호랑이였다


글 박석환 / 한국만화영상진흥원 콘텐츠비즈니스팀 수석, 만화규장각 필자 


성균관대학교 언론정보대학원에서 대중문화를 전공했다. 97년 스포츠서울 신춘문예에 만화평론으로 등단한 이후 [잘가라 종이만화], [코믹스만화의 세계], [만화리뷰쓰기] 등 다양한 만화평론서를 발표했다.


사진 김덕화 


발행일 2009.04.17


[인터뷰 후기]

부천만화정보센터와 네이버가 함께하는 '오늘의 우리만화가 20인'

황미나, 김수정 선생님에 이어 금일 이현세 편이 게재됐습니다.

인터뷰어는 접니다.

인터뷰 기사는  http://navercast.naver.com/korean/cartoonist/324 

당일 부천에서 세종대까지 광속질주(?)를 했음에도...

지각을 했더니... 함께 인터뷰에 나섰던 네이버웹툰작가 연우님께서 이런 서비스 컷을...

만화가가 만난 만화가 전문은 http://comic.naver.com/webtoon/detail.nhn?titleId=63456&no=3&weekday=fri


* 덧.... 어제는 홍대 근처 작가 화실에서 K선생님을 인터뷰했습니다.

  이 기사의 게재 예정일은 5월 1일 입니다.

  네이버웹툰에서는 P, J 작가가 참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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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kseokhwan.com

박석환(만화평론가, 한국영상대 만화콘텐츠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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