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석환, <이스트아시아 판타지>의 작가 오연을 만나다, 서울문화재단, 2009.3.9

지금 이곳에서는 다시 상고사 열풍이 불고 있다. 물론 상고사에 대한 관심이 어제 오늘 일은 아니다. 80~90년대에는 동이족의 웅대한 기상을 서술한 역사서 <환단고기>(1979년 간)와 선인들의 수행을 중심으로 상고사를 소개한 김정빈의 소설 <단>(1984년 간) 등 민족사 관련 서적이 불티나게 팔렸고 단학을 비롯한 각종 수련법이 유행했었다. 이를 바탕으로 종교가 성행하기도 했고 대학 강단을 민족사학자들이 차지하기도 했다. 하지만 민족사는 '지나친 민족주의와 국수주의' 그리고 위서(僞書)논쟁과 함께 제도권 진입에 실패한다. 

2000년대 초에는 인기 만화가 이현세가 동이족(東夷族)의 신화를 재해석한 <천국의 신화>(1996년 1권 발행)를 발표했지만 원시사회의 동물적 성행위 표현 등을 문제로 검찰에 의해 기소됐고 10여 년간 법정 시비로 창작욕을 허비하게 만들었다. 민족사를 바탕으로 또 다른 종교가 등장하기도 했지만 디지털 카메라를 앞세운 인터넷 패러디 문화는 '개벽이'라는 이름의 강아지 사진 한 장으로 이를 희화해 버렸다. 이 판에 한 젊은 만화가가 촌스러운 전래동화쯤으로 이해되는 고구려 건국사를 들고 나왔다.


오종근, 오연이 되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엄마가 일을 하셨기 때문에 대개 혼자 놀아야 했어요. 만화책을 읽으면서 감동도 많이 받고 위로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다 싼 값에 오래 읽을 수 있는 책을 찾기 시작했어요. <논어> <맹자> <삼국지>를 읽었고 중국의 고대 회화에 탐닉했어요. 일본 소설도 많이 읽었는데 '전국시대'와 '사무라이'에 매료됐었지요."


세종대 앞 한 술집에서


오종근(1975년 생, 필명 오연)은 중국과 일본의 문화와 예술을 통해 역사를 이해했고 교실에서 배운 한국사의 초라함에 낭패감을 느꼈다. 반면 중국과 일본의 문화는 화려하게 보였고 형과 식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했다. '큰 지식'없이도 쉽게 이해 할 수 있게끔 그들의 문화는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었다.' 하지만 우리의 것은 그들의 서술 안에 작게 자리하고 있거나, 우리 것 안에서 찾아도 그들을 벗어나지 못했다. 오종근은 자연스럽게 그들이 남긴 문화와 예술을 공부했고 대학에서 동양화를 전공하면서 그 때 받은 영감을 그려내고자 했다. '아비 부재'의 상황은 그에게 이를 대체할 영웅을 재현하도록 했을까.

"파면 팔수록 이상했어요. 뭔가 부족했습니다. 문화의 원형도, 실체도, 어떤 전통의 연결성도 어색했습니다. 왕조가 바뀔 때마다 형성세력도 다르고 종교와 문화도 달랐어요. 그러던 중 '내가 배운 것이 틀린 것은 아닐까'하는 의심과 함께 '내가 왜 그들의 기록을 보고 있을까'하는 자각을 하게 됐습니다. 기록된 역사는 서술자의 관점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고 우리의 역사관에 입각한 서술을 찾아보자는 생각을 했죠. 가능하다면 그 것을 그려보고 싶었고 더 나아가서는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알리고 싶었습니다. 부족한 이야기는 그것이 환상일지라도 채워보고 싶었습니다."

오종근은 교과서 바깥에서 우리 역사를 찾기 시작했고 한편으로는 전통적인 수묵채색 기법을 익혀갔다. 부족한 자료를 탓하고 체계화 되어 있지 않은 연구자들의 게으름을 개탄했지만 시선을 돌리고 보니 다른 세상이 있었다. 자료는 방대했고 기존 연구자들은 주류로 이해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상고사 연구에 생을 걸고 있었다. 알려지지 않은 역사를 정리하고 이를 한국화 전통 기법으로 그리되, 만화의 형식에 담아보자는 계획이 얼마나 큰 만용이었는지를 깨닫게 된다. 오종근은 부족한 지식을 매우기 위해 다시 대학문을 두드렸고 그곳에서 민족사학을 공부한다. 그 동안 쓰던 이름도 버리고 <삼국유사>를 쓴 일연의 호를 따 스스로 오연(吳然)이라 명하고 작가적 정체성을 확립해 간다.


<이스트 아시아 판타지>라는 사건


"2000년 <비참물어회사>라는 만화로 데뷔했습니다. 동양화를 전공했지만 그림뿐만 아니라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자연스럽게 만화를 선택했습니다. 각종 공모전을 두드렸고 그 결과를 바탕으로 여러 매체에 역사만화와 수묵채색기법을 이용한 일러스트를 게재했습니다. 2004년 아직 공부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고구려 건국사를 중심으로 구상한 <이스트 아시아 판타지>를 작업하기 시작했습니다. 2006년 서울산업진흥재단에서 운영하는 서울애니메이션센터의 창작지원금이 있어서 가능한 작업이었습니다. 단행본은 2008년이 되어서야 1권을 내게 됐습니다."

창작지원 공모작을 심사평가하는 자리에서(필자는 오연이 제출한 작품을 지원작으로 선정하고 1년 6개월 여 기간 동안 5~6차례 만나며 이 작품의 1권 창작이 마무리되는 과정을 지켜봤다.) 작가는 역사해설가로 일하고 있다고 했다. 만화를 그리기 위해 역사 공부를 했고 역사를 더 깊이있게 그리기 위해서 역사해설가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자리에 앉아있던 심사위원들은 한참동안이나 작가의 역사해설을 듣고 있었다. 그림도 생경했고 그만큼이나 익숙하지 않은 소재와 스토리 연출법 등이 기존 만화의 형식과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우리 민족사를 알려야 한다는 작품의 취지에는 동감했지만 기획안과 시놉시스, 몇 장의 셈플 원고만으로도 그가 정한 범위를 기한 내 다 이룰 수 없을 것 같았다. 원고는 그만큼 화려하고 매혹적이었지만 그만한 기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여겼기 때문이다.

"손이 느리다는 생각은 안하는데 어떤 경우는 한 컷 그리는데 며칠 밤낮을 새기도 했습니다. 내용 전개 상 당시 왕권의 강력함을 상징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왕궁이 자주 등장합니다. 기왓장 그리느라 손과 눈이 얼얼할 지경이었어요. 현재 2권을 작업 중인데 대규모 전투 장면을 그리고 있습니다. 좀 편하게 갈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한데, 제가 편하면 우리 역사의 위상이 그만큼 초라해질 것 같아 두려웠습니다. 동아시아를 지배했던 강대한 민족이었다는 것 그 강함을 될 수 있으면 화려하게 묘사하고 싶었습니다."


http://blog.naver.com/gayasea/10036641236


오연의 <이스트 아시아 판타지>(2008년 간)는 수묵채색화 기법으로 그려진 고구려 건국사이다. 출간된 1권은 해모수와 유화의 러브스토리를 중심으로 동이족의 분열과 위만조선, 서토인(한족)의 세력 확산 과정을 그리고 있다. <삼국유사> <환단고기> <삼성기> 등에 전하는 내용을 토대로 독자적 사관과 상상력을 더했다. 그림 측면에서는 한국회화의 전통적 기법을 두루 차용했다. 내면 묘사를 위한 수법으로는 관념적 연출이 등장하지만 공간 묘사에서는 진경산수의 특징을 담아냈다. 고대국가의 웅장한 모습을 재현할 때는 심원(위에서 내려다 본)구도를 주로 사용했고 인물묘사는 평원(앞에서 본)구도를 취하는 등 내용과 기법 모두에서 우리 전통을 찾았고 국풍화(國風化)를 시도했다.


오연의 상상력으로 읽는 해모수와 유화의 러브스토리


"그네들은 자기들 고유의 역사적 기록을 근거로 콘텐츠를 생산하고 향유하는데 우린 죽어라 <삼국지>만 수 십 번 읽어대고 등장인물을 외우며 자랑하잖아요. 인재를 찾을 때도 유비의 삼고초려를 이야기하고요. 우리가 동아시아 문화 원류의 중심이었다고 학술적으로 주장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를 세상이 곧바로 인정해 주는 것도 아닐 겁니다. 우리와 함께 세계가 읽을 수 있는 재미난 이야기가 있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역사는 사실이어야 하지만 역사이야기는 희망이라고 믿습니다. 오늘을 사는 에너지로서의 역사를 그릴 것입니다. 혹자는 환상이라고 비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역사가 환상적이면 안 될 일이라도 있습니까."

예술은 우리 민족사와 관련된 다양한 '사건'을 만들어 왔다. 하지만 그것은 '이야기' 되지 못했고 주류 문화로 확산 되지 못했다. 수많은 예술가와 민족사학자가 우리 민족의 정체성 확립과 '동북아 시대의 위기는 역사의 위기'라는 논리를 펴며 이웃한 '중국과 일본의 역사왜곡'에 대비하자고 했지만 사변과 괴변의 중간쯤으로 이해하고 말았다. 겨우 인정받는 일연의 <삼국유사>마저도 아이들의 행동 발달 사항에 도움이 될 만 한 교훈적 이야기만 골라내 읽히고 있다. 이것이 우리가 상고사를 이해하고 활용하는 방식이다. 그런데 예기치 않은 곳에서 상고사의 문화적 아이콘이 재발견됐다. 

2002년 한일월드컵 당시 축구대표팀 응원단의 심볼로 붉은악마라는 이름의 '치우천황'이 환생했다. 치우를 비롯한 상고사의 인물들이 세계 최대의 인터넷 게임 대국인 한국산 게임의 주요 소재로 등장했고 2006년에는 고구려의 건국왕인 동명성왕 이야기를 소재로 한 TV드라마 <주몽>이 등장한다. 주몽의 일대기는 동부여의 금와와 유화를 살려냈고 나아가 북부여의 해모수를 소생시켰으며, 고조선의 유민들과 단군의 상징인 천부인까지 등장시켰다. 드라마는 우리 민족의 신화와 역사를 잇고, 반도에 치우친 국사관과 대륙을 지배한 민족사관을 하나로 잇는 사건이 됐다. 이렇게 '반만년 역사'라고 해 왔지만 반 뚝 잘라 잊고 지냈던 우리 민족의 이야기가 살아났다.

역사해설가 오연에게는 반가운 소식이다. 해모수와 금와를 소개하려면 탤런트 허준호와 전광렬을 불러내면 되고 주몽에 대해 이야기 할 때는 TV드라마의 한 장면을 소개하면 되니 이보다 편할 일이 없다. 문제는 만화가 오연이다. 오연은 작품을 준비하는 기간 동안 색다른 상고사를 그리기 위해 다양한 상상력을 개입시켰다. 최선의 선택 후에는 최고의 노력을 기해 작품을 창작해갔다. 그러는 사이 다르지만 같아 보이는 TV드라마가 인기리에 방영됐다. 오연은 창작의 고통스런 시간을 감내하며 만족할만한 수준이 됐을 때 작품을 묶었지만 일반적 시각에서는 드라마의 외전이나 인기에 편승한 기획처럼 보이기도 한다. 상고사에 대한 대중의 인식이 폭넓어졌다는 측면에서는 반가운 일이다. 하지만 거대한 매스미디어의 홍수 뒤에 오연의 상상력이 완성된 듯 보이는 시기의 문제는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육당 최남선은 이런 이야기를 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나는 서슴지 않고 후자를 택할 것이다.' 정사와 야사 중 야사가 지닌 힘을 택한 것이다. 같은 기준일 수 없지만 고구려 건국사를 다룬 TV드라마와 오연의 만화 <이스트 아시아 판타지> 중 하나를 택해야한다면 나 역시 서슴지 않고 <이스트 아시아 판타지>를 택할 것이다. 모든 이야기적 요소를 실제로 구현해야 하는 실사영상은 그 자체로 표현의 한계를 지닌다. 그러나 창작자의 독립적 의도 아래서 한땀, 한땀 표현된 상상력은 한계가 없을 뿐 아니라 이를 읽는 독자에게 색다른 감동과 함께 독특한 영감을 제공한다. 오연의 만화에는 화려한 환상도 있지만 정신을 번득이게 하는 영감의 세계가 있다. 오연의 세계를 즐겁게 소비하기 바란다. 


글/ 박석환(만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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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석환(만화평론가, 한국영상대 만화콘텐츠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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