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석환, 순정만화가 엄희자를 아시나요, 플랫폼, 인천문화재단, 2009.03

소녀의 내밀한 꿈을 통해 순정만화라는 세계를 구축한 엄희자


(사진 출처 - 중앙일보)


한국 만화 걸작선을 발행하고 있는 (재)부천만화정보센터에서 9번째 시리즈로 <엄희자 컬렉션>을 발행했다. 1950년대부터 출발한 이 시리즈는 김종래, 김산호, 박기정, 신동우 등에 이어 60~70년대를 대표하는 만화사의 아이콘으로 엄희자를 선정했다. 이 시리즈 최초의 여성이다. 

엄희자를 기억하는 이들도 있겠으나 낯선 이들도 많을 것이다. <원미동 사람들>의 소설가 양귀자가 엄희자의 팬이었다면 어떨까. 실제로 그의 작품을 보고 만화가를 꿈꿨다고 한다. 엄희자의 인기를 증명하는 일화로 자주 등장하는 것이 당대 최고의 가수였던 이미자와 같은 금액을 받고 소속사를 옮겼다는 것이다. 인기나 수익뿐만 아니라 만화사적 계보도 탄탄하다. 최초의 만화학원으로 기록되고 있는 김길영만화연구소에서 수학했고 이범기, 조원기의 문하를 거쳐 데뷔했다. 후학으로는 <로보트태권브이> 시리즈를 그린 또 한명의 만화가였던 차성진, <식객>, <타짜> 등으로 현재 최고의 명성을 얻고 있는 만화가 허영만이 있었다. 이쯤하면 그가 궁금해지지 않을까.  

엄희자는 우리 만화사에서 순정만화라는 장르를 탄생시킨 장본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물론 그 이전에도 소녀 취향의 감성적 작품이나 '순정'을 타이틀로 내세웠던 서사만화가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현대적 의미와 관습적 개념으로서의 순정만화라는 장르는 엄희자를 정점으로 출발했다. 구슬처럼 빛나는 눈과 뾰족한 코, 풍성한 금발의 미형 캐릭터, 환상적 사랑과 호사스런 삶에 대한 갈망, 이를 극대화해서 표현하기 위해 화면을 가득 채웠던 꽃과 물방울 등의 장식적 요소, 분절된 시공간을 하나로 묶어서 의미를 전달하는 몽타주 기법 등 순정만화를 대표하는 모든 상징을 엄희자의 작품에서 찾을 수 있다. 

물론 이 같은 작화적 기법은 일본의 만화 신(神) 테즈카 오사무의 작품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엄희자 만화에는 엄희자 만의 삶과 지정학적 상상력이 담겨있었다. 현재도 로맨스소설이나 TV드라마의 전형적 플롯으로 활용되고 있는 주인공의 기억상실증, 기시감, 태생이 다른 쌍둥이, 사고로 인해 뒤바뀐 운명 등의 서사적 요소가 그것이다. 엄희자는 급속한 산업화로 몸서리쳐지게 고단했을 그 시절, 더 좋은 환경 속에서 살고 있는 '또 다른 자신을 꿈꾸던 소녀들의 욕망'을 대변한 작가였다. 

이번에 발행된 작품집에는 엄희자의 등장과 한국적 순정만화의 시작을 알린 데뷔작 <행복의 별>(1964년)이 수록됐다. 스승 조원기가 구성을 도운 이 작품은 이후의 어떤 작품보다 뛰어난 완성도를 보여주는 걸작이다. 유복한 환경에서 살고 있는 유미 앞에 기억상실증에 걸린 외국소녀가 나타나고 고대 이집트의 왕녀상(像)에 얽힌 이야기가 전개된다. 특히 작품 곳곳에 아르누보풍의 장식미 넘치는 일러스트를 배치해 작품의 서사적 분위기와 판타지적 공간을 구성해낸 점이 돋보인다. 독립작품 격인 <공주와 기사>(1965년), 동화 '왕자와 거지'를 모티브로 한 <귀족의 딸>(1967년), 장식적이고 감성적 작화 요소를 배제하고 정적인 서사 전개에 집중한 <G선상의 아리아>(1972년)가 수록됐다. 창작 스타일의 변화를 확인할 수 있는 작품 선정이지만 최고 인기작으로 평가받고 있는 <네자매>, <카치아>, <긴다리아저씨> 등의 작품이 제외된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엄희자는 1942년 신의주에서 태어났다. 작가의 삶도 작품만큼이나 드라마틱했다. 어려운 가정형편 탓에 소녀가장 역할을 하기 위해 만화를 배웠다. 데뷔 후에는 스승을 능가하는 인기를 얻었고 그 스승과 결혼해서 최고의 만화가 커플로 살았다. 그러나 남편의 종교 문제로 모든 것을 버리고 1983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초기에는 한국에서 온 천재작가라는 별칭으로 애니메이션 회사에 근무하며 다수의 작품에 참여했으나 지금은 조원기의 아내 조희자로 살고 있다. 희생적인 삶이었을까. 선택적 행복을 추구한 것으로 해석하고 싶다. 



박석환(만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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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석환(만화평론가, 한국영상대 만화콘텐츠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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