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석환의 만화방
백성민의 '광대의 노래'
‘만화가들이 존경하는 만화가’는 누구일까?
작업 방식과 성과에 대해 늘 경외감을 갖도록 만드는 현역 선배는 누구일까? 현역 중 한 명을 꼽으라면 먼저 떠오르는 이가 백성민이다. 최근 새 작품집 ‘광대의 노래’를 발표한 이유도 있다. 하지만 그만큼 후배 만화가들에게 ‘창작가 정신’을 심어 준 이가 또 있을까.
1973년 ‘권율장군’으로 데뷔했으니 현역 중 원로 그룹에 속한다. 수백 편의 작품 목록을 자랑할 만한 세월인데 작품 수는 손에 꼽을 정도고, 히트작 몇 편쯤은 있어야 할 터인데 웬만한 만화 팬이 아니라면 그의 작품을 모른다. 그런데도 만화 판에 자리 잡은 ‘의식 있는 만화총각들’은 여지없이 그를 찾았다.
1980년대 리얼리즘 만화의 기수였던 박흥용, 1990년대 언더그라운드 만화의 나팔수였던 신일섭, 2000년 이후 뉴 프런티어로 등장한 석정현 등이 그에게 ‘만화의 길’을 물었다. 백성민은 황석영 원작 소설 ‘장길산’을 만화로 작업할 때는 잡지 연재가 맞지 않는다며 한 번에 20권 전작을 발표하기도 했다.
수년의 작업 기간에 아무런 수입이 없어 전셋집을 산골로 옮겼다고 한다. 홍경래의 난을 시대적 배경으로 한 만화 ‘토끼’에서는 특유의 역동적 세밀화와 유려한 붓 선의 아름다움을 살리기 위해 두 배나 큰 원고지에 두 배나 큰 밀도로 작업했다. 최악의 생산성이지만 자기 방식을 고수했다. 그는 늘 생활이 창작을 억누르지 못하게 환경 자체를 창작에 맞춰 왔다. 후배들은 그의 창작가 정신에 존경과 함께 공포를 느꼈다고 고백한다.
최근 발간한 ‘광대의 노래’에는 9편의 단편이 수록됐다. 가장 아날로그적인 창작 방식을 고수해 온 연로한 만화가가 어느 날 인터넷에 블로그를 개설하고 한 컷 한 컷 자기 흥에 겨운 붓 그림들을 게재했다. 매 소 말 호랑이의 역동적 움직임을 포착하기도 하고 유년기의 추억과 부모님의 사랑 이야기도 들려줬다.
다른 블로거의 글을 소재로 화답 형식의 작품을 게재하며 출판 환경에서 맛보지 못했던 공동창작을 실천해 보기도 했다. 그러기를 2년여. 책에는 그중 백미만 담았다. 소박한 고백이고 향기 나는 잠언이다. 칸을 이어 가는 연속그림을 통해 대하 서사극을 펼쳤던 만화가가 정지된 그림에 의미를 담으려니 그 붓은 얼마나 답답했을까. 단 한 번 내놓는 붓질이 거칠게 포효하는 형상이 되고 잘게 덧입힌 선은 친숙한 이웃이 되어 독자를 색다른 사유의 공간으로 안내한다. 잠언(箴言)만화집이라고 해야겠다.
그간의 작품이 창작가 정신에 답하는 것이었다면 이 책은 디지털 시대에 우리 만화가 가야 할 방향에 대해 답한다. 컴퓨터 그래픽을 앞세운 영화에 상상력을 내주고 게임과 인터넷에 여가 시간을 내준 출판만화는 갈수록 독자를 잃고 있다.
다른 장르에 팔 수 있는 소재와 이야기에 집중해야 한다거나, 디지털로 흉내 낼 수 없는 작가만의 개성 넘치는 화풍과 색다른 형식을 내놓아야 한다는 말이 나온다. 정답은 없지만 백성민은 후자를 택했다. 다 버리고 새롭게 얻은 아름다운 시도다.
박석환(만화평론가, www.parkseokhwan.com)
동아일보, 2007. 1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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