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발전소를 찾아서<1>] 한국만화문화연구원 '코코리'
문화에도 자양분이 필요하다. 아무도 돌보지 않는 메마른 땅(인프라)에서 느닷없이 탐스럽고 맛있는 열매(콘텐츠)가 맺힐 리 없다.
누군가는 씨를 뿌리고 누군가는 거름을 줘야 한다. 묵묵히 문화예술 각 영역에서 고급 자양분과 문화산업 발전의 원동력을 뿜어내는 ‘문화발전소’의 젊은 일꾼들을 만나본다.
“팔목이 부러지도록 글쓰기 훈련을 시키겠습니다. 각오는 돼 있습니까?”
7일 오후 서울 동작구 신대방동 한국만화문화연구원(KOCORIㆍ코코리) 사무실. 8기 신입 연구원 4명을 앞에 둔 손상익(48) 원장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학점도 없고 등록금도 없다, 혹독한 훈련이 겁나면 지금 당장 이 사무실에서 나가라”고도 했다. 신입 연구원 박수현(28ㆍ여ㆍ세종대 영상대학원)씨가 기 죽은 목소리로 “대학원 수업 시간과 겹치는데 어떡하죠?”라고 물었다. 손 원장의 답변은 짧았다. “대학원을 휴학하세요.”
요즘 만화계가 주목하는 ‘만화발전소’는 단연 코코리다. 코코리는 만화평론가 손상익씨가 1995년 ‘만화의 이론 연구와 분석, 비평을 담당할 평론가를 양성하고 체계적 만화문화 인프라 구축을 위해’ 설립, 2002년 3월 문화관광부 산하 사단법인으로 등록했다.
박기준 박인하(이상 청강문화산업대) 이두호 한창완(이상 세종대) 이원복(덕성여대) 교수, 만화가 백성민씨 등 이사진도 화려하다. 그러나 코코리의 유명세는 무엇보다 1996년부터 배출한 연구원 30여명의 면면 때문이다.
유럽 만화를 국내에 본격 소개한 ‘유럽만화를 보러 갔다’의 저자 이동훈(1기), ‘잘 가라 종이만화’ ‘만화시비 탕탕탕’의 저자 박석환(2기ㆍNJOY365 기획실장), 인터넷 만화연재 사이트 코믹19닷컴의 대표이사 이재식(2기), 모바일 애니메이션 제작업체 모모짱 대표이사 심성남(4기), 서울애니메이션센터 미술감독을 역임한 김정영(5기ㆍ청강문화산업대 교수), 만화광장 대표 주재국(7기)씨 등이 모두 코코리 연구원 출신이다.
“한국은 외형상 만화매출이 세계 3위라고 합니다. 그러나 인명사전이나 연간 출간되는 만화 가이드북 하나 없다고 하면 외국 만화관계자들이 웃더라구요.
95년 ‘한국만화통사’를 집필하면서 지금의 코코리를 설립하게 된 동기도 이 때문이지요. 그리고는 연구원들을 엄청나게 괴롭혔죠.”
얼마나 교육과정이 혹독하면 손 원장이 이런 말을 할까. 매주 화ㆍ금요일 3시간(오후7~10시)씩 1년에 300시간을 이수하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
손 원장 표현을 그대로 옮기자면 “부모님이 돌아가시는 경우를 제외하고 2번 빼 먹으면 그대로 퇴원”이다.
그리고 다음해 1년 동안 후배 기수의 세미나에 참석하는 것도 필수 사항이다.
커리큘럼 역시 서구만화사, 미학사, 대중문화론, 문학비평이론, 일본만화사, 오프라인 만화이론, 오프라인 출판만화 유통현황, 만화작품 기획의 실제 등 웬만한 대학의 정규 학과목 뺨친다.
코코리가 한국 만화비평 토양에 공급한 자양분은 엄청나다. 만화분야 최초의 전문비평저널 ‘코코리뷰’ 발행, ‘한국만화통사’ ‘한국만화인명사전’ ‘망가 vs 만화’ ‘한국만화 가이드북 2002’ 발간 등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의 성과를 낳았다.
손 원장 역시 ‘만화세상이 오고 있다’ ‘아톰의 철학’ ‘만화로 여는 세상’ ‘한국만화통사’ ‘한국현대예술사 대계1’ ‘한일비교미술사’ 등 만화비평서를 10권 넘게 집필했다.
코코리의 또 다른 자랑거리는 소장 만화책의 분량. 비평에서 텍스트 확보는 절대 명제이기 때문이다. 단행본이 3만여 권, 이론서와 자료집이 1만여 권이다.
30여 평의 사무실 사방 벽에 70ㆍ80년대 대본소용 만화에서 최신 일본만화까지 가득 들어 차 있다. 1권에 10만원을 호가하는 허영만씨의 ‘오 한강’ 초판본 등 만화수집가들이 군침을 흘릴 만한 책들도 눈에 띈다.
“손 원장의 캐비닛에 어떤 희귀본이 어느 정도나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게 상임연구원들의 말이다.
이런 뒷말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날 신입 연구원을 향한 손 원장의 엄포는 계속됐다. “코코리 나왔다고 해서 취직이 잘 되는 것 아닙니다. 알선도 안 해줘요. 자기 몸 값은 자기가 높이는 겁니다. 1년 동안 단 5분도 늦지 말고 글쓰기 연습을 제대로 하세요. 영상산업은 글 쓰는 사람이 이끄는 겁니다.”
그리고는 신입 연구원 4명과 일일이 새끼 손가락을 걸고 구두서약을 받았다.
“우리 신입 연구원은 1년 동안 어떻게 해서든 코코리에서 살아 남겠습니다.
김관명 기자 kimkwm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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