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정만화잡지계의 히트제조기라 할 법한 강인선씨가 한동안 전공 밖의 영역에서 활동하다가 <비쥬>라는 제호의 순정잡지를 들고 돌아왔다. 육영재단 서울문화사의 명편집자에서 온라인만화사이트로 잠깐 돌아섰다가 제자리로 돌아 온 강씨. 그를 찬찬히 들여다보자.
서울문화사의 안드로이드 강
지금 20말 30초 연령이 되는 이들의 기억 한 켠을 빼곡하게 채우고 있는 만화잡지. 단순한 선들의 집합을 만화로 알았던 이들에게 세밀한 선화와 현실감 있는 배경 처리로 ‘극화풍’이라는 새로운 작법을 선보였던 만화잡지 <보물섬>. 국어대사전만큼 두툼한 분량의 책 한 권을 온통 색다른 만화로 가득 메우고 독자에게 하늘 여행을 선물했던 만화 보물섬. 이 만화보물나라에는 덩치만큼이나 큰 눈망울의 편집자가 있었다. 홍익대 미대(81학번)에서 금속공예를 전공하고 컷작가, 미술기자로 잡지사와 연을 맺었던 강인선씨. 여성잡지 <여원>에서 취재기자로 출발한 강씨는 육영재단으로 옮겨오면서 전공을 살려 미술기자로 보직을 바꿨다. <보물섬>의 대형 히트에 이은 순정만화잡지 <댕기>의 잇단 히트로 육영재단은 80년대 ‘만화잡지의 명가’가 됐다. 강씨는 이곳에서 수십명의 만화작가와 만화작품을 기획하고 편집하는 전문만화편집자로 탈바꿈했다.
<댕기>와의 인연은 강씨에게 ‘순정만화 전문’이라는 서브타이틀을 부여했다. 이후 강씨는 우리만화계, 그중 순정만화의 굵직한 흐름을 대변하는 자리에 위치한다. 서울문화사로 자리를 옮기면서 강씨는 이 출판사의 3대 여자만화잡지 창간을 주도한다. <윙크> <밍크> <나인>으로 이어지는 3종의 만화잡지는 잡지명 그대로 대표 잡지가 되었고, 순서대로 우리 순정만화사를 증거하는 아이콘이기도 하다. 중고생을 주 독자층으로 했던 <윙크>는 소재 선택에 있어서 다양성을 축으로 했고 신예작가를 대거 등용시키면서 만화계에 ‘윙크세대’ 작가진을 구축하기도 했다-박무직, 천계영 등의 인기작가가 대표적 ‘윙크세대’로 이 잡지에 연재하는 것을 꿈으로 여겼다고 한다.
<윙크>는 순정만화작가진의 세대교체에 교두보 역할을 했다. 뒤이어 창간한 <밍크>는 저연령층을 대상으로 틈새시장을 공략한 케이스이고 <나인>은 성인 여성 독자층을 겨냥했다. 순정만화의 독자층이 그만큼 넓어졌고, 작가들의 창작경향이나 작품 형식이 다양해졌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특히 ‘여자만화’라는 컨셉을 내세웠던 <나인>은 ‘순정-’이라는 장르개념에 묶여있는 이 쪽 만화와 잡지에 새로운 흐름을 예고했다(서울문화사에서 성인순정만화를 기획한다는 소식이 들리자 그 제호가 무엇이 될까 고민했던 적이 있었다. 가장 그럴듯했던 것은 아이 없이 사는 부부를 칭하는 ‘딩크’족. 밍크 윙크 다음은 딩크 아닌가라고 누군가 말했고 이어서 ‘이크’라는 탄성이 쏟아졌다.).
강씨는 일반 만화잡지의 도식적 편집방향에 정면 대응하는 작품 편성 전략으로도 정평이 나있다. 그중 한 단면이 남성작가 기용. 금영훈, 김동화 등 남성작가가 순정만화를 그리는 경우가 간혹있지만 순정만화의 법칙을 따르지 않는 남성작가의 작품을 연재하는 경우는 좀처럼 드물었다. 그러나 강씨는 양영순, 김준범, 김진태 등의 작품을 유효하게 활용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김진태의 한 작품에 등장하는 전신타이즈를 입은 캐릭터 ‘안드로이드 강’은 당시의 강씨를 적절(?)하게 설명한다. 작품 기획이나 편집과정에서 만난 작가에게 순식간에 친밀감을 보였다가 관심 밖의 이야기가 나오면 어느새 모른척하는 모습. 이것은 배태랑 편집자가 잡지의 편집방향에 따라 작품과 작가를 열정적으로 유인하는 모습이고, 강씨가 우리만화와 만화작가의 작품 활동에 깊숙하게 관여하고 있음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나인>의 창간직후 가졌던 한 인터뷰에서 강씨는 자신을 모차르트의 천재성을 시기했던 살리에르에 비교했다. 만화작가와 작품에 대한 강씨 스스로의 애정을 멋지게 비유한 것이다.
만화포탈 사이트의 토탈 실험장 ‘엔포’
강씨는 지난해 폐간 된 여자만화잡지 <나인>을 지금도 아쉬워하고 있다. 그만큼 애정이 많았던 탓이겠고 그 애정만큼이나 <나인>을 통해 등장한 작가들과 작품이 소재나 형식 측면에서 한 단계 진보된 모양새를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강씨가 출판만화의 한계 지점을 아쉬워하며 서울문화사를 떠나서 ‘온라인만화’라는 새로운 영역에 발을 들여놓았다가 ‘절반의 실패’를 인정하고 돌아섰을 때 폐간이 결정된 까닭도 있다.
강씨는 2000년 문화예술계를 놀라게 할 만큼 거대한 프로젝트를 출범시켰다. 자신이 직접 대표이사로 취임하여 구축한 온라인 만화 포탈 사이트 엔포가 그것이다. 20여 년 간 출판만화계에서 축적한 에너지를 모두 쏟아 부어 최정예 멤버들로 기획팀을 구성하고 100여 명의 만화작가들과 온라인 작품 서비스 계약을 체결했다. 무려 7개의 만화관련 웹진을 창간하고 당시로서는 방대한 규모의 단행본 만화서비스를 시작했다. <윙크> 등의 잡지에서 연을 맺었던 만화평론가 박인하, 애니메이션 칼럼리스트 송락현 등이 참가했고, 라이벌 관계였던 대원출판사의 편집진도 다수 포진시켰다. 청소년만화웹진 <야진>, 순정만화웹진 <비투인>, 성인만화웹진 <포엑스진>, 인디만화웹진 <파이프>로 구성된 40여 편의 연재만화는 인터넷에서 만화를 보여줄 수 있는 모든 방법에 대한 경연장이었다.
만화 항공모함이라고 할 만한 엔포의 거대한 규모는 연일 이슈를 쏟아내기에 바빴다. 더군다나 무료 서비스를 약속했던 초기의 엔포는 놀랄만한 방문율을 유지했고 천문학적인 수치의 페이지뷰를 자랑했다. 모니터 사이즈를 고려해서 가로가 길게 구성한 작품 형식, 전면 컬러링을 통한 시각적 풍요로움, 플래시 방식을 도입해서 동적인 움직임을 강화하고 부분적으로 채용한 사운드 효과 등. 처음이라 실험적이고, 낯설어서 불안해 보이기는 했지만 엔포의 위용은 오픈라인이 축적한 만화의 역사를 흔들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초창기 엔포의 모습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강씨가 만화편집자 또는 기획자로서 놓치지 않았던 도전과 실험정신은 기업가라는 새로운 캐릭터 앞에서 삐걱됐다. 항공모함에 승선했던 많은 이들이 중도하차를 선언했다. 만화계에 색다른 교훈이 될 법한 당시의 상황에 대해서 강씨는 말을 아끼고 있는 편이다. 과도한 초기 투자비와 지속적인 원고료 부담, 무료만화서비스, 작가와의 부적절한 계약관계, 재무담당 공동 대표와의 마찰 등 많은 문제가 도출됐지만 현재 엔포의 상황(소수 운영진만이 남아서 특별한 작품 업데이트 없이 제휴 콘텐츠를 서비스하고 기존 방문객을 중심으로 사이트를 운영 중에 있다)을 명확하게 풀이할 만한 해답은 나오지 않은 상황이다. 최근 동급 온라인만화 포탈 코믹스투데이도 동일한 국면에 처해 있어서 양대 사이트에 되풀이 된 ‘절반의 실패’는 온라인만화계가 풀어야 할 숙제로 남아있다. 엔포의 초기 멤버들이 하나둘 빠져나가면서 강씨도 열정의 흔적들을 뒤로하고 퇴사를 선언했다.
불황의 만화잡지계에 던진 보석
강씨는 휴식기간 동안 컴퓨터, 마케팅 관련 교육을 이수했고 육영재단, 서울문화사에서 함께 활동했던 최순식(전무이사)씨의 권유로 2001년 시공사에 입사했다. 강씨는 서울문화사 출신의 만화편집자가 다수 포진된 시공사 만화사업본부의 가장 자리에서 현장감을 익히며 워밍업을 시작한다. 박희정 권신아의 일러스트북, 박인하 선정우 스콧매클우드 등의 만화관련 도서를 출판하면서 불황의 만화계를 이겨낼 콘텐츠 계발에 전념했다. 대원과 서울이라는 양대 메이저 출판사가 열독자층이 형성된 연령대에서 잡지를 출판하고 있는 만큼, 후발 업체인 시공사의 잡지전략은 틈새시장에 맞춰져 있었다. 준성인지를 표방한 <기가스>와 18세 전후를 대상으로 했던 순정지 <케이크>가 대표적. 그러나 출판만화 전반의 불황과 만화잡지의 효용성에 대한 의심이 촉발되면서 틈새시장은 더욱 협소해졌고 연재작 단행본의 제한 된 판매부수로는 잡지 유지가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게 됐다. 강씨가 만화사업본부장에 오르면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손해나는 잡지의 폐간. 강씨는 <기가스>와 <케이크>를 폐간하고 곧바로 신 매체 창간 작업에 착수했다.
3개월 여 만화잡지쟁이 강씨가 쏘아 올린 공식 컴백작품은 중학생 대상의 순정잡지 <비쥬>. 메가히트작 <<오디션>>을 마무리하고 유학길에 오른 천계영에게 소설을 쓰게 했고, 하시현 박무직 카라 이시영 이소영 등의 작품으로 라인업을 구성했다. 일본만화잡지 <하나또유메>의 인기작 3편과 신예 작가들의 작품을 포함하고 있다. 편집부와 독자의 간격을 좁혀주는 ‘쪽 기사’들도 적지 않게 수록됐다. 로고와 표지 컨셉 등은 초등학생 취향인데 몇몇 작품은 소재 측면에서 중고생 대상이라는 지적도 있으나 <밍크>와 <윙크>의 중간 지점을 성공적으로 파고들었다는 평가다. 초기 컨셉 설정과 달리 저연령화 되어가던 <케이크>의 상충된 이미지를 걷어내고 열독자 점유도가 높은 초중고생을 지점으로 중간 독자층에 집중한 것. <케이크>의 틈새보다는 폭 넓은 독자 기반을 바탕으로 했다. 이와 관련 서울문화사도 동일 컨셉의 순정지 <슈가>를 보름 늦게 창간한다.
<보물섬>을 정점으로 시작된 강씨의 만화편집자 인생에 <비쥬>는 또 한번의 터닝 포인트가 될 것이다. 강씨의 작업이 우리만화계의 터닝 포인트가 됐던 때에 비하면 아쉬움이 남는 부분. 강씨가 그 옛날 거대한 보물섬을 지니고 있다가 이제는 반짝이는 보석 하나를 쥐고 있는 것 아닌가하는 괜한 걱정이 앞서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강씨가 손에 쥔 것이 보석이 아니라 그 스스로가 우리만화계의 보석이라고 믿는다. 만화가 10할이라면 편집자가 3할이라고 믿는 내게 새로움을 쫓아 노력하고, 쉬지 않고 도전하며, 열정적으로 작품을 찾아가는 강씨는 만화를 만드는 빛나는 보석이다.
강인선은 만화가를 질투하는 살리에르가 아니라 만화가를 특별하게 만드는 조련사이고 만화라는 투박한 원석을 최고의 보석으로 빛나게 만드는 공예가이다. (끝)
글/ 박석환(만화평론가, www.parkseokhwan.com)
코믹플러스, 2003-05-01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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