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석환, 만화의 성적 표현 수위 어디까지인가?, 미상, 2007.2.4



금기의 문 뒤에 창작의 문이 있다

1. 

표현은 체험하니까 나오는 것

만화가 좋은 이유 중 하나는 이 첨단의 장르에서 원시예술의 형태를 짐작할 수 있다는 데 있다. 또, 그것은 자기표현과 맞물리며 착화기의 한 형태, 보통사람의 성장과정과도 연관될 수 있다. 그래서 만화는 친근할 수밖에 없고, 그래서 만화적 표현은 여전히 유효할 수밖에 없을 지 모른다.

생각해보자. 과연 원시인은, 동물 같았을 초기 인류는 어떻게 ‘표현’을 배웠을까? 어떻게 신체가 훌륭한 기계임을 인식하고, 어떻게 오감을 활용하게 됐을까? 또, 신체의 활용에 대한 그 놀라운 시도들은 어디로부터 시작됐을까? 

지금, 여기의 생각으로는 ‘체험’을 떠올릴 수밖에 없겠다.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논리가 지배적인 현대의 사고로는. 그리고 이미 너무 많은 종의 발견, 인류보다 강하고 우수한 종을 알게 된 지금에는 그들 앞에서 맥없이 고꾸라지는 초기인류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결국 인류는 자신들보다 강한 이들. 적이자 먹이이기도 한 동물들과의 예상되는 전쟁을 벌여 왔을 것이다. 수없이 많은 동료들의 죽음을 목격한 살아남은 이들의 공포, 어쩌면 자의든 타의든 전쟁의 상황에 몰렸을 때의 본능적인 행동들이 ‘움직임’을 낳게 하고, ‘표현’을 끌어냈을 지도 모른다. 그렇게 표현은 체험을 통해 더욱 다양화 됐을 것이다. 

2.

강한 표현은 강한 표현을 낳고

권력자는 표현력이 강한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자신의 몸을 활용하고, 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장치(무기)들을 차지한 이들. 입 소문으로 퍼진 그들에 대한 이야기는 어느새 신비화되고, 신화화 됐을 것이다. 그래서 아주 작고 하찮은 몸짓에도 일반대중들은 공포를 느낀다. 종이가 발명되고, 문자를 기록하게 되고, 그러나 그 것은 몇몇 이들에 한정돼 있고. 당시로서는 기록되는 표현, 명문화되는 표현은 절대권력을 뒤흔들 정도의 위력을 보였을 것이 분명하다. 권력자들은 인쇄기가 발명되기 이전까지 이른바 정보라고 할 수 있는 표현의 단위들을 지배해 왔다. 인쇄기는 권력자의 표현력들을 광역화시키는 역할을 했다. 권력자의 목소리는 인쇄기로 인해 천리 밖까지도 쩌렁쩌렁 울려 퍼졌고, 권력자에 대한 일반대중의 평가는 실체 없는 거인을 만들어 내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권력자는 이 강력한 무기가 다른 이들에 의해 사용될 수도 있음을 걱정했고, 인쇄기를 만드는 장사꾼들은 소수의 권력자를 향하는 것보다 다수의 대중의 편에 서는 것이 이로움을 느끼게 된다. 이 도구를 지혜롭게 활용하기 시작한 일반인들 중 몇몇은 권력자 이상의 커다란 목소리를 지닌 거인이 되고, 절대권력을 파괴하기 위한 그들의 표현력이 시민사회를 여는 동인이 됐음직하다. 

3.

몸 속에서 빙빙도는 에스컬레이터

표현. 표현에 대한 체험. 그것은 그렇게 힘이 되고, 힘을 파괴하는 또 다른 힘이 된다. 그리고 힘의 실체는 멈추지 않는 눈덩이처럼 부푸는 성격을 지녔고, 표현 역시 그처럼 멈출 수 없는, 살을 더해 가는 성격을 지녔다. 이른바 ‘표현수위의 에스컬레이팅 현상’이 그것이다. 몇몇 문화평론가들은 이를 PC게임의 형식에 비교하기도 했다. 판을 거듭할 수록 더 강해지는 적. 피 빛 에너지 표시가 다하도록 적과 싸워야 하는 게이머. 마지막 한 칸의 에너지 표시가 사라지기 전 게이머는 어딘가에 감춰진 무기나, ‘파워업’을 돕는 상징을 찾아낸다. 게이머는 또, 더 강한 적이 나올 것임을 알면서 죽을 때까지 앞으로 전진한다. 게임이 끝나면 스코어보드에 이름 몇 자 적는 것이 전부인줄 알면서도 게이머는 기꺼이 죽기 위해 전진한다. 표현. 표현에 대한 수위. 그리고 그것을 위한 시도와 몸부림들. 

‘1970년 6월18일, 당시 아동만화에 대한 사전심의를 담당했던 한국도서잡지(주간신문)윤리위원회가 만화심의와 관련한 결정문을 발표한 내용에 따르면, ‘위원히는 앞으로 어떠한 부류의 만화작품이라도 이성간의 애정을 담은 내용은 물론, 서로 마주보는 대우적 분위기 묘사를 엄중히 제재키로 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선정적 만화가 청소년의 성의식 형성에 미치는 영향>, 손상익, 97, p29

남녀 주인공들이 어줍잖게 부딪쳐서 여자의 치마가 뒤집히고, 남자의 손은 여자의 가슴쯤에 올려져있고, 얼굴이 빨개진 여자가 남자의 뺨을 때리고. 이런 장면이 학원만화의 전형적인 공식처럼 재현되는 최근에 비하면 그 옛날의 표현수위는 너무도 낮았다. 수위가 너무 낮아 물 속에 몸을 숨기고 싶어도, 다 드러낼 수밖에 없을 정도의 상황. 30여 년이라는 긴 시간. 지구상의 그 어떤 시간대보다 숨가쁜 질주와 혁명적인 변화들 속에서 표현수위 역시 수백, 수천의 계단을 올라 에스컬레이팅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6척 사람의 몸을 벗어나지 못한 채, 허우적 되고 있다. 

4.

판타지는 몸의 활용도를 극대화 시킨다

사람의 몸은 보호받아야 마땅하다. 아니 미물일지라도 모든 생명있는 것들은 그 생명을 유지하며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국가이전에 자연이다. 그것은 국가가 최선을 다해 보호하고, 사회가 공들여 길러주지 않아도 스스로 얻어지는 것이다. 단, 자연을 지배하고 그를 해하려는 이들의 움직임이 문제라면 문제가 된다. 또, 사람의 몸은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을 때에야 아름답다. 눈 코 입을 비롯 모든 기능있는 것들, 한 겹 피부까지도 활용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여전히 몸은 도구와 같이 쓰여질 수 없다. 그것은 한 가지 기능만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며, 그 어떤 것으로도 대체 가능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가상현실을 꿈꾸고, 행복한 판타지를 즐기려 한다. 지하철 역 입구에서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 그 머리 위에는 하나씩 말하지 못하는 판타지들이 있다. 창작인은 이를 하나로 잇고, 다듬어서 말하지 못하는 열병들을 풀어준다. 꽉 막힌 속을 통쾌하게 뚫어주듯, 창작인의 표현은 그들의 말못할 판타지를 풀어준다. 만화는 그 판타지를 풀어주는 역할을 오랫동안 지속해왔다. 그렇다고 그것이 말초적이고, 자극적이어서 문제가 된다는 식의 인식은 우습다. 도구에는 각기 다른 쓰임이 있듯, 만화도 다 같은 만화가 아니다. 어떤 만화도 이유없이 창작된 것은 없다. 제 각기 나름의 쓰임과 역할을 지니고 태어나게 된다. 흔히 만화의 선정성을 논하면서 거론되는 만화들은 선정적일 이유가 충분한 성인만화들이 대부분이다. 성인만화에서 성이 다루어지는 것은 주 독자층의 꿈꾸기가 그 곳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여성을 상품화하고 있는 이유는 남성들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여성이 남성의 눈요기 거리가 될 수 있다는 매맞을 발언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여성에 대한 사회적 이미지가 피임약의 발명 이전과 동일한 관점에서 재생산되고 있음은 확고하게 반대한다. 하지만 가상의 영역에서 누릴 수 있는 남성의 권리 역시 존중받아야 한다고 본다. 주부들이 TV드라마에서 줄기차게 쏟아지는 불륜 소재 드라마를 본다고 해서, 모두 외도를 하지 않듯, 남자들 역시 가상 공간의 대리 여와 현실의 여성을 혼동하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5.

만화의 강력한 선정성을 욕할 이유가 있는가

흔히 만화는 다른 매체보다 선정성이 높다는 인식들을 지니고 있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 역시 이 특수한 매체가 지닌 장점일 것이다. 장점은 극대화시키는 것이 순서가 아닐까. 그러나 대다수의 만화계 인사들은 다른 매체에 비해 만화의 표현 수위가 상대적으로 협소하다고 믿고 있다. 만화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아직 성숙하지 못한 때문일 것이다. 성인용이라는 딱지를 엄연히 달고 다니는데도 여전히 만화는 아이들이 볼 수 있다는 인식이 지워지지 않는다. 이 점은 매우 유감스럽게도 창작인의 문제가 아니라 유통상의 문제. 정부기관의 관리에 대한 문제가 된다. 작가는 자신의 의지에 의해, 형법상 가능한 표현의 자유를 근거로 다른 매체보다 뛰어난 표현들을 보여준다. 만화는 정지영상과 동영상이 혼합된 형태로, 기록미디어의 기능과 흐름미디어의 기능을 동시에 수행한다. 기록된 요소들은 연상과 흐름을 통해, 영화의 끊어 찍기처럼 선명하고, 문학의 서술처럼 유연하게 이해된다. 그래서 그 잔상이미지와 독자의 능독적 수용형태, 네러티브의 구조와 함께 명쾌한 즐거움을 제공한다. 그것은 비단 선정적인 성애만화들에서만 얻을 수 있는 쾌감은 아니다.

6. 

청소년들의 거세된 성, 어느정도는 돌려줘야 된다

그럼에도 다시 문제는 청소년만화의 선정성이 된다. 여기서 꼭 짚고 가야 하는 부분은 여타 매체와 마찬가지로 모든 청소년만화들이 결코 아니다. 몇몇 만화들, 그리고 몇몇 장면들이 그럴 뿐이다. 실제로 최근 몇몇 만화들의 몇몇 장면들은 사회적 통념에 어긋남이 없는 일반인이 보기엔 껄끄러운 부분이 없지 않아 있다. 그러나 그것이 어쩔 때는 현실이기도 한 상황이고, 어쩔 때는 보통 청소년들의 성적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이 아니라 달래주는 수준의 것일 때도 있다. 청소년이 지닌 성적 판타지를 이해하는 범주에서라면 아무 문제가 될 것이 없기 때문이다. 청소년의 성을 인정하고, 그들에게도 그에 걸 맞는 수준의 성적 유희물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만화는 이에 아주 합당한 매체가 된다. 체력이 국력이라고 구라뻥을 치던 시절에나 건강한 정신으로 이를 물고, 성욕이라는 정체 모를 혼돈을 아령과 역기로 몰아내는 것이다. 지금 같은 시대에 청소년의 성을 무시한다면 누군가의 표현대로 ‘시한폭탄’들을 집안에 하나씩 키우는 꼴이 될 것이다.

7.

선정적인 만화는 절대 선정적인 사회를 만들지 않는다

일본만화의 선정성에 치를 떨었던 미국인들을 위해 한 미국인은 ‘일본 만화의 폭력성과 외설이 얼마나 심하건, 그것이 일본 사회를 직접적으로 반영하는 것은 아니라(프레드릭 L 쇼트, <이것이 일본만화다>, 김장호, 박성식, 다섯수레, 99, p49)’고 주장하며 부족하나마 범죄 통계를 보여준다. 같은 기간 두 나라의 만화판매율과 범죄율을 단순 비교한 것에 불과하지만, 일본의 엄청난 만화 판매량에 비해 청소년 범죄율은 지극히 저조했으며, 미국은 정반대의 상황이다. 일본만화에서 고교생들의 총격살인이나 강간은 쉽게 등장하지만 현실에선 가능치 않은데 반해, 미국의 현실에선 만화 속의 일들이 가능하다. 즉, 만화의 선정적 표현 정도가 청소년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지극히 미비하다는 것이다. 이 경우 그것은 부추기는 기능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해소하는 기능을 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일본만화의 영향력이 지배적인 최근의 우리만화는 소재나 장르까지도 그대로 차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일본만화의 몇몇 장르들 중 우리의 인식에서 문제가 될 것이라 여겨지는 것들을 정리해보면 이렇다. 먼저 흔한 소재 중 하나가 로리콘, 페미콘, 마자콘 등으로 어린 소녀와 성인남성의 관계, 근친상간을 다루고 있다. 야오이, Y물은 미소년들 간의 동성애를 소재로 한다. SM물은 주로 이상성욕을 소재로 하고 있다. 이 밖에 장르에 관계없이 비상식적으로 가슴이 큰 미소녀들이 등장하는 거유물, 여성의 특정 부위나 옷 등에 집착하는 변태물 등이 있다. 이중 현재 우리 청소년만화에서 일반적인 장르로 자리 잡아가고 있는 것이 거유물과 야오이물이다. 그러나 이들 작품 역시 만화장르가 지니고 있는 오랜 주제는 잊지 않고 있다. 꿈, 도전, 우정이 그것이다. 분명 이 작품들은 여성을 성적 유희물로 간주하고, 보편적인 이성관계의 흐름을 부정하는 불쾌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꿈꾸기를 멈추지 않고, 지속적인 도전의식을 보여주며, 종내에는 주변인과의 화해와 소중한 경험 한가지씩을 체득한다. 

8.

금기의 문, 뒤에 창작의 문이 있다

지금 우리는 여자의 누드를 그린 미술품 한 장이 신문지상을 어지럽혔다는 저 오랜 시기를 내려보며 비웃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스포츠신문에 오른 여배우들의 수영복 사진 한 장에도 치를 떨고 있다. 손수건으로라도 가려보려는 이들은 분명 존재한다. 표현 수위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들은 그들에 의해 나올 것이다. 현재 체감되고 있는 표현수위의 한계는 성기의 노출이나 묘사 이전까지인 듯 하다. 그러나 그뿐 아니라 이 부분의 묘사를 뒤로 미루고, 다양한 사고로 대단히 창의적인 성적 환상의 묘사라던가 하는 부분 역시 주의해야 한다. 이 대단히 창의적인 성적인 상황의 표현이 막힌다면, 그를 능가하는 표현물이 나올 수 있을까? 창작도 경제개발 5개년 하듯, 고속도로 깔듯해서 나올 수 있다. 문제는 그 결과들을 활용하는 사람들에게 있다. 길게 펼쳐진 창작의 고속도로 한 부분이 바리케이트나 금지 표시판으로 가려져 있다면, 그 고속도로는 기형적인 성장을 할 게 뻔하다. 현재 만화에 대한 표현 수위에 대한 제재는 간행물윤리위원회 심의 2부에서 이뤄지고 있다. 심의 결정사유는 음란성, 포악성, 성폭력, 비윤리성 등이 있지만 대부분 음란성이 이유가 된다. 이쯤에서 늘 나오는 문구는 ‘음란성에 대한 판별이 자의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심의위원들의 도마 위에 올려진 창작물들은 나오지 말았으면 하는 작품들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설령 그것이 작가적 윤리성을 버린 장사치의 허접쓰레기 같은 작품일지라 하더라도, 그것은 그 나름의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대중문화 창작물로서 기생이유를 충분히 갖고 있다. 창작물의 신성시가 아니라 판타지를 제공받길 원하는 독자들의 다양한 성향을 인정해야 한다는 측면도 크다. 그리고 그것의 제재는 민간기구나 시민단체에 의해서, 대화와 공론화를 통해서 이루어져야 하고, 유통구조에 집중돼야 한다. 분명 만화창작인들이 열어야 할, 대중이 열기를 바라는 놀라운 창작의 문은 금기의 문 뒤에 숨어있다. 금기의 문이 열리지 않고 닫혀 있다면 진정한 창작의 문은 구경조차 할 수 없는 것이 될 지 모른다. 혹시 모르겠다. 기름기 빼고, 팔다리 관절 꺽어서 틈새로라도 기어들어갈 수 있는 위대한 만화작가가 있을지 모를 일이다. 아니 우리 곁에 몇몇 작가들은 이미 그런 경지에 이른 이들도 있다. 그들에게 박수를 쳐주고 싶다. 매우 고맙다. 그리고 미안하다. (끝) 


 어디에 발표했는지 모르겠으나 2000년 경 씀


글/ 박석환(만화평론가, www.parkseokhwa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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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석환(만화평론가, 한국영상대 만화콘텐츠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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