쥐새끼와 공룡들의 식탁
우리만화의 붐과 발전에 지대한 공을 세운 3마리의 공룡에게 당장이라도 감사패를 주자. 허리우드 영화감독 스티븐 스필버그의 공룡 소재 영화(<쥬라기공원>) 한편이 국내 자동차 수출업체의 연간 매출액을 넘어서면서 우리는 문화산업에 눈을 떴다. 김수정의 만화 <아기공룡둘리>는 단일문화상품이 연관매체로 변화(one source multi use)하면서 끼치는 산업적 파급력을 보여줬고, <용가리>(심형래 감독)는 영상컨텐츠산업이 노다지 임을 확실히 보여줬다. 이들 세 공룡이 만화・애니메이션의 현재를 있게 했으니 당연히 감사해야 할 일이다. 그중 두 마리의 국산 공룡은 인간에게 이로울 것 하나 없으면서 문화산업을 독식 중인 쥐새끼(미키마우스)의 식사를 방해하고 있다. 이 또한 대견한 일이다.
그렇다고 이 공룡들이 새로울 건 없다. ‘쥬라기공원’의 공룡들은 허리우드 영화의 단골 악역배우 같다. 김원빈의 옛날만화 <불가사리>처럼 우리를 위협하는 동물이다. ‘둘리’는 아이들을 사랑하고, 그들의 꿈을 현실화시키는 상상의 동물이고, 둘을 우리의 편의대로 버무려 논 것이 ‘용가리’. 괴수였다가 인간을 도왔다는 이유로 미녀의 사랑을 얻는 야수에 불과하다. 이처럼 해묵은 설정으로 쥐새끼의 식탁을 넘볼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지 않은가?
공부가 되는 동물소재만화
공룡소재 창작물은 동물소재 창작물의 발전형에 속한다. 초기형태의 동물소재 만화는 디즈니식으로 아동문학과 구전동화 등을 재창작하는 방식이었다. 아동문학이 아동독자의 정서함양 등 교육적인 목적을 지니고 있듯, 동물소재만화 역시 교훈적인 내용을 장르의 특성으로 삼는다. 초기형태의 동물소재 만화는 의인화된 동물세계의 모습을 연출한다. 각기 다른 동물들에 캐릭터를 부여하고, 우스꽝스럽지만 현실을 풍자하는 동물들을 통해 아이들을 계몽시켰다. 한눈에 볼 수 있게 설계된 동물들의 세상은 아이들에게 축소판 인간세계를 보여주는 교육보조재 였다. 정운경의 <진진돌이>(197?) 시리즈, 차형의 <진돗개>(197?) 시리즈가 대표적. 두 작품은 각기 다른 동물들의 생김새와 특성 등을 고려, 조연급 캐릭터로 등장시켰고, 인간에게 친숙한 ‘개’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인기를 끌었다.
동물소재만화의 진화
80년대. 서구문화의 유입과 소가족 제도의 확립은 ‘애완동물’이라는 낯선 개념을 가져온다. 집 문을 열면 등장하는 작은 개는 화목한 가정, 흔들의자에 기대어 어르만지는 커다란 개는 부유한 가정의 상징이었다. 식당가에 펄럭이던 ‘보신탕’ 깃발이 사라진 것도 이 무렵. 이향원의 동물만화 <이겨라 벤>은 개의 충성심과 인간과의 우정 등을 독특한 투견 소재 속에서 엮어냈다. 동일소재 일본만화의 표절 의혹을 제외한다면 여전히 매혹적인 작품이다. 그러나 부티나게 생긴 ‘벤’도 철창 속에서 주인과 격리된채 개 같은 인생을 살았다. 이를 수정한 작품이 김영하의 <펭킹동자>. 일본만화 <도라에몽>(Fujiko F Fujio)의 영향 속에서 탄생된 작품이지만 우리 동물소재 만화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고 볼 수 있다. 펭귄이라는 독특한 동물의 등장, 사람과 한집에 기거하는 동물, 그리고 외계의 초능력자라는 설정 등이 그렇다. (표 참조)
<펭킹동자>의 캐릭터 설정은 다양한 동물만화의 출현을 예고한다. ‘개판’ 동물만화에서 벗어나 ‘고양이’, ‘햄스터’ 등 이색적인 동물을 등장시켰고, 주인 또는 파트너를 돕기 위한 초능력자라는 설정은 이후 로봇, 요정, 도깨비소재 만화로까지 확대된다. 동일설정에 새로운 동물캐릭터들을 단계적으로 등장시켜, 연재만화의 묘를 극대화시킨 김수정의 <아기공룡둘리>는 최장수 인기동물만화. 주인에 대한 충성심이 사라져서 더욱 돋보였다.
반 동물소재만화의 출현
동물만화가 교육적인 요소를 차마 모른 척 할 수 없는 아동대상이라면, 성인대상 반(anti)동물만화도 있다. 시사만화 장르로 분류되는 주완수의 <보통고릴라>와 이우일의 <도날드닭>이 대표적. ‘고릴라’가 주제에 따라 정치인・소시민 등의 역할을 다소 능글맞게 수행하는데 그쳤다면, 같은 형식을 취한 ‘닭’-아무리 봐도 오리-는 멍한 시선과 단순하지만 정감있는 터치로 사랑 받았다. 유창운은 ‘돼지와 토끼의 혼합체’ 같은 <미상씨> 시리즈로 작가의 혼란한 사유를 전개, 이미지만화의 형식을 칸만화에 도입했다. 큰 관심을 요하지 않는 탓에 바쁜 만화가들에게 사랑 받는(?) ‘고양이’는 동물소재 만화의 단골손님. 그러나 대부분 애완용동물에 대한 헌정식(?) 단편작품으로 큰 반응을 끌진 못했다. <What's 마이클>(Kobayashi Makoto) 등 일본산 고양이소재 만화의 탁월함에 빛이 바래긴 했지만, 강현준의 <CAT>은 고양이의 생활습성에 대한 유쾌한 보고서로 읽힌다. 이들 반동물만화가 인간 속의 동물들에 관한 것이라면 안수길의 <호랑이이야기>는 동물들만의 세계를 다룬 작품. 호랑이사냥꾼과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도 있지만, 그 역시 호랑이의 삶을 설명하고 있다. 성인대상의 동물소재만화는 시사적・성적・철학적 은유와 직설을 피한 유머를 급하지 않게 전달한다.
동물소재만화, 자유로운 발상으로부터
동물은 인간에게 위안의 행복감을 준다. 인간은 동물들의 삶과 행동을 관찰하고, 훔쳐보기를 자행할 수 있는 지배심리를 느낀다. 바보나 병신 흉내를 내는 코미디언을 보고 웃는 것처럼 인간처럼 움직이는 동물들을 보며 즐거워한다.
한 국회의원의 보고에 의하면, 애완용동물 기르기에 열정적인 유럽사람들은 여름휴가철이면 애완용동물 버리기에도 열정적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이 종의 지배자인 인간의 권리일 수는 없다. 가상공간의 애완용 동물기르기는 생명경시풍조를 조장한다는 일부의 비난도 있지만 그 대안일 수 있다. 얼마 전 유행했던 다마고치나 인터넷 공간의 사이버 애완동물, 동물천지의 캐릭터시장, 그리고 동물소재만화가 그것이다.
우리가 동물소재만화의 창작에 등한시 한 사이 만화왕국 일본은 동물소재만화의 진화와 발전에 힘을 쏟았다. 단순한 애완용 동물소재의 범위를 범어나 로봇소재, 사이보그소재, 몬스터소재, 변신소재 등을 동물만화의 형식 속에서 일궈냈다. 가상공간에서 펼쳐지는 동물기르기의 열정을 새롭게 담금질한 것이다.(끝)
� 동물소재만화의 연대기
김용환<토끼와 원숭이>
동화각색-계몽, 교육만화
↓
정운경<진진돌이> 차형<짓돗개>
종간의 대립-반공만화
↓
이향원<이겨라벤>
애완동물-가족만화
↓
김영하<펭킹동자> 김수정<아기공룡둘리> 김동화<곤충소년>
동거동물-공상, 일상만화
------------>요정, 변신, 로봇, 사이보그, 귀신, 육아 등의 장르로 진화
↓
------------>시사-이미지만화
주완수<보통고릴라> 이우일<도날드닭> 유창운<미상씨>연작
반 동물만화
------------>동물관찰-기록만화
안수길<호랑이이야기> 강현준<CAT>
� 동물소재만화의 키워드
▶ 나약한 주인 : 동물소재만화의 주인공은 대체로 나약하다. 보통 자신보다 작은 동물을 보호하는 것이 인간 주인의 역할이라면, 만화에서는 정반대인 경우가 많다. 명석한 두뇌, 가공할 힘, 동물적 감각, 또는 초능력 등으로 동물이 인간주인을 보호한다. 주인은 매번 궁지에 몰리고 동물의 필요성을 증가시킨다. 마치 위기에 처한 지구를 거대로봇이 지키듯, 등장인물과 독자 모두가 악에 맞서는 동물의 등장을 기다린다. ‘나약한 주인’은 <이겨라벤>에서는 약골이고, <팽킹동자>에서는 개구장이 문제아동이며, <아기공룡둘리>에서는 꿈꾸기 좋아하는 아이들이다. 물론, 혼자서는 너무 외로운 나약한 주인도 있다.
▶ 동물주인공 : 동물소재만화에서 동물주인공은 주인의 보호자역할을 한다. 아이들의 주생활공간인 집, 학교에서의 보호자가 아닌 그 외의 공간(놀이, 유흥을 위한 공간)에서 동물주인공은 주인의 보호자가 된다. 보호자는 경제적, 교육적 이유로 주인의 요구를 거부하지 않는다. 잘못된 요구를 하더라도 나무라지 않는다. 대신 선체험 후교육의 입장을 지닌 교육자이다. 동물들은 스스로 주인이 잘못을 뉘우치길 바란다. 그것이 때로 동물주인공의 목숨을 앗아가는 상황이더라도. 보호자, 조력자의 역할을 하는 동물주인공은 장르의 진화를 통해 엉터리 박사가 만들어낸 로봇이 되기도 하고, 퇴마사를 돕는 귀신이 되기도 하며, 젓먹이 아기가 되기도 한다.
▶ 종(種)간의 대립 : 의인화된 동물세계 만화에서 개, 코끼리, 기린 등 아이들에게 인기있는 동물들은 늑대, 뱀 등 인기없는 동물들과 전쟁을 벌인다. 분단과 냉전의 이데올로기가 세상을 지배하던 때, 아이들은 동물만화로 이념교육을 받았다. 음흉한 늑대는 북한, 미련한 곰은 소련, 간사한 토끼는 일본, 독수리는 미국 등. 서로 다른 동물 종들의 권력쟁탈은 어른세계의 추악함을 답습하며, 편향된 민족주의와 보수적 유교관을 심어주었다. 그러나 냉전종식에 따른 이데올로기 교육(반공교육)의 불필요성, 신세대 부모들의 도덕관 변화, 아동의 교육・오락물에 대한 경제성 제고 등은 동물소재만화의 인기를 시들게 했다.
▶ 인간의 동경 : 사람 같은 동물들의 재롱을 훔쳐보고 규칙과 질서가 없는 동물 같은 삶, 유아기의 삶을 동경하는 재미는 동물만화에만 있다. 종의 지배자로서 권능의 힘을 지닌 인간, 그러나 힘을 유지하기 위해 지켜야 할 것들은 일상의 괴로움으로 다가온다. 이를 넘어서는 방법은 유아가 되는 것. 물론, 동물의 삶이 순탄치 않듯 유아의 삶 역시 고달프다는 것을 기억해내지 못하는 인간의 어리석음 탓이다.
▶ 이루어 질 수 없는 사랑 : 문화예술계의 창작인들은 사랑의 다양한 해법을 찾아내라는 역할을 부여받았다. 그중 우리의 심금을 울리는 소재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이 소재를 찾기 위한 불타는 의지는 동성동본(同姓同本)을 넘어, 동성동종(同姓同種)으로 그리고는 타종(他種)에 대한 사랑으로까지 번졌다. 인어공주 이야기는 봐 줄만한 정도. 그러나 아직 수간(獸姦)은 금기 시 되 있어서 동물들은 인간으로 변신한다.
� 동물소재만화 추천작
김수정 <아기공룡둘리>
- 대한민국 대표만화. 외계인으로부터 초능력을 부여받았지만 뇌용량의 문제로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는 아기공룡. 심술 굳고, 고약한 성격에 감성적이어서 너댓살 안팍의 조카를 보는 기분. 초능력을 잘 쓰지 못한다는 설정은 어쩌면 다행일지도 모를 일. 능수능란한 대사사용과 연재만화 그리기의 묘미를 알아챈 듯한 전성기의 김수정을 만날 수 있다. 굉장한 노력 끝에 걷어올렸다는 대사들이 지금 독자들의 말버릇에는 맞지 않을 수도. 원형을 찾고 싶다면 <도라에몽>이 있고, <포켓몬스터>는 진화형의 정점일 듯.
김동화 <곤충소년>
- <요정핑크>에서 인간과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끄집어냈던 작가가, 몸집에 비해 몇 백 배의 힘을 발휘하게된 나약한 소년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물론, 곤충의 힘. 변신영웅물의 형식을 지니고 있지만, 그 역시 동물만화의 확장. 최근 재판 소식이 있다. 80년대 말의 동물소재만화를 확인할 수 있을 듯. 액숀이 약하다는 느낌이 드는 독자에겐 ‘개’에서 반인반수로 변신하는 <와일드하프>(Yuko Asami)도 괜찮고, 변신동물의 사랑이야기로는 <도그맨>(Atsuko Takakura)과 <빙글빙글 폰다는 변신중>(Satomi Ikezawa)도 애뜻하다.
안수길 <왕중왕>, 도서출판 뫼,
- 호랑이 그리기에 신들린 작가의 작품. 일본과 국내 만화잡지에 연재하던 작품들을 볼 수 있다. <GON>(Masashi Tanaka) 같은 충격도 <보노보노>(Igarashi Mikio) 같은 느릿한 유머와 페이소스도 없다. 그러나 호랑이의 움직임을 쫏아가는 작가의 펜 끝을 바라보는 재미도 만만치 않다.
강현준 <CAT>, 대원
- <What's 마이클>의 재미를 이미 알고 있는 사람에겐 안 통한다. 그러나 이 작품을 먼저 읽는다면 새로운 작가들에 의해 변화하는 우리만화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단, 일본만화와 우리만화를 놓고, 단순 비교하는 어리석음은 금물.
이우일 <도날드 닭>, 홍기획, 99
- 대한민국 도날드 닭. 이미 많은 관심과 칭찬으로 작품의 깊이가 더해졌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공상과 이미지를 이야기라는 이름으로 쏟아내고 있는 언더작가들에게 정이 가지 않는다면 메이저급 언더작가의 정리된 작품, 독자위주의 읽기환경을 제공하고 있는 이 작품을 읽어라. 또, ‘개인용 컴퓨터 환경의 발달이 만화작업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논문 같은 걸 준비중이라면 이 작품은 모범 예시작이 된다.
글/ 박석환(만화평론가, www.parkseokhwan.com )
글에 남긴 여러분의 의견은 개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