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만화가 사라졌다
그 많던 야구만화들은 다 어디로 숨었을까? 장편의 이야기만화, 현대만화가 ‘등장인물들 간의 역동적인 대립’을 보여주는데 중점을 둔다면 스포츠, 그 중에서도 야구는 가장 적절한 소재요 컨텐츠가 된다. 최근 월드컵으로 인한 축구 열기 속에 축구소재 만화와 싸이클, 수구, 골프 등의 스포츠만화가 다시 등장하고 있지만, 그 많던 야구 만화의 흔적은 발견할 길이 없다. 우리 현대만화의 완벽한 전형을 선보였다고 평가받는 이현세의 ‘공포의 외인구단’도 야구만화였다. 현재 학원폭력물이 주류 장르만화라면, 80년대는 ‘야구 소재 만화’가 주류였다.
그라운드에는 여전히 드라마가 있다
‘권투만화’가 딱 두 사람의 공식적인 ‘쌈질’을 허용하는 장치로 독자들을 끌어 모았다면, ‘야구만화’는 집단의 싸움이었다. 권투가 심의와 관련해서 상대방의 몸을 직접적으로 가격하는 소재였다면, 야구는 방망이와 공을 통한 간접적인 표현이 가능했다. 권투가 실내, 동일한 밝기의 조명, 비좁은 사각의 링을 표현공간으로 삼고 있다면, 야구는 예측할 수 없는 자연조명(지붕없는 경기장)과 드넓은 운동장을 표현공간으로 삼는다. 현대만화를 보여주기 위한 방법으로 ‘야구’라는 컨텐츠보다 좋은 것은 없었다. 그러나 지금 야구만화는 전무한 지경이다. -‘스포츠투데이’에 연재됐던 <스터프166km>라는 작품이 있긴 하다. 너무도 진지한 말투(?)와 로봇 같은 움직임, 가공할(?) 이야기 전개로 60여권 이상의 초대형만화 <럭키짱>을 히트시킨 김성모가 자신의 주특기를 총동원한 ‘고교야구 소재 만화’이다. ‘영점프’에 연재됐던 <와일드업>도 99년형 야구만화 중 하나.
스포츠신문이 ‘야구신문’처럼 보일만큼 야구는 대중의 관심 속에 있다. 그런데 왜, 국내 야구만화의 창작은 김성모의 독무대가 됐을까? 주류 상업 창작인들의 보이지 않는 단결이라는 의문을 제기하는 이도 있다. 야구팬의 높은 관전수준에 맞출만한 야구 소재발굴이 어렵다는 이유다. 그렇다고 작가들이 서푼짜리 상상력과 얼키기설키기 식 인물설정만으로 작품을 하고 있다고 믿고 싶지도 않다. 단순히 ‘쉬운 것을 원해서’라는 건 말도 안 된다. 국내 만화의 상업적인 창작인력들이 눈에 보이는 독자를 놓칠리도 없다. 그럼 뭔가?
만화독자는 ‘스포츠’가 아니라 ‘쌈’을 원한다
관중은 ‘9회말 투스라이크 쓰리볼이 되기 전까지 야구는 알 수 없다’고 믿었다. 야구를 소재로 삼은 만화 역시 두 팀 또는 두 라이벌의 피끓는 대결을 보여준다. 프로야구가 생기기 전 지역과 학교의 이름을 머리에 세긴 까까머리들의 피끓는 대결은 전국민을 열광시켰다. 기술력보다 투지로, ‘할 수 있다’는 신념으로 경기는 계속됐다. 만화가 야구를 택한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
‘장르는 이야기 구조의 관습화를 단적으로 증명한다.’ 문화예술의 한 장르로서 ‘만화’는 ‘끝없는 대립’이라는 관습적인 이야기 구조를 지니고 있다. 현대만화는 그것을 보여주기 위한 소재발굴에 노력했다. ‘야구 소재 만화’ 역시 만화장르의 ‘대립’을 맛깔스럽게 보여주기 위한 장치일 뿐이다. 고교야구가 유행하던 시절과 프로야구 원년의 야구만화 열풍 역시 ‘대립’이라는 만화장르의 특징을 명확히 보여줬다. 그러나 ‘하면된다 식 고교야구’에서 ‘기술과 기록의 프로야구’ 시기로 접어들면서 ‘야구 소재 만화’는 자취를 감췄다.
기록경기 야구, ‘쌈’을 다루는 만화장르
<공포의 외인구단>으로 스토리작가의 대명사가 된 김민기가 몇 년 전 이 작품의 속편 격인 작품을 선보였지만 독자들은 외면했다. 드라마보다 극적인 대립의 상징이었던 야구가 개별 선수들의 기록 갱신에 더 관심을 보인다. 이 역시 대립의 구조를 보여줄 수 있지만 더욱 ‘역동적’이지 못하고, 너무 ‘과격’하지 않다. 결국 작가들은 ‘대립’이라는 관습성을 유효적절하게 표현할 수 있는 새로운 컨텐츠를 찾아나섰고, 야구소재 만화를 떠났다.
과거 야구만화의 귀재였던 독고탁의 이상무가 박세리와 함께 ‘골프 소재 만화’의 선두주자로 돌아왔지만 독자들은 외면했다. 이상무의 박세리는 아무리 봐도 ‘가난과 야구와 싸우던 독고탁’이었고, 골프는 지극히 신사적인(?) 기록 경기였다. 물론, 일본만화의 작가들은 우리의 결론을 무참하게 할 만큼 다양한 종목의 스포츠만화들을 만들어내고, 독자를 흥분시키고 있다. 고교야구 소재의 일본 만화인 ‘아다치 미츠루’의 (H2)는 작가의 명성과 상관없이 여전히 선호하는 작품으로 꼽히고 있고, 80년대풍의 소년만화 <4번타자 왕종훈>도 야구선수 장종훈의 활약과 별개로 국내팬들에게 읽히고 있다. 야구엔 아직 더 많은 드라마가 남아있는 것이 확실하다.
TIP 1. 야구만화의 진행
◎ 가족집단과 사회집단이라는 상황 속에서 이야기 진행 소재로서의 ‘야구’ 등장.
우리만화계의 가장 중요한 작가들이 활약. 이상무의 휴머니즘 가득한 야구 소재 가족만화와 이현세의 비장감이 주가 되는 야구 소재 애정만화가 공존. 허영만은 양 측면을 아우르는 작품활동을 펼침. 야구만화 전성기는 이 세 작가에 의해 시작됐다가 마감됐다.
◎ 일본야구만화의 직간접적 영향
국내 소년 야구만화가 ‘봉황기’, ‘황금사자기’에 투지를 불태웠듯 일본 야구만화는 ‘갑자원’ 타이틀 획득이라는 꿈이 있었다. 우리보다 10배 이상의 중?고교야구팀이 있는 일본. 단순 비교만으로도 야구에 대한 그들의 열정은 우리를 앞지른다. 그런 탓인지, 아니면 일본만화의 거대한 매력 탓인지, 우리 소년야구만화에는 일본만화의 흔적들이 역력하다.
오동촌, 이남촌의 인체데생이나 연출은 미즈시마 신지의 것임이 확실하고, 츠바 데스야의 영향력 아래 이우정, 이향원 등이 자리한다.
TIP 2. 야구장르만화의 키워드
▶ 투수 (주인공) : 야구만화의 꽃. 우연한 계기에 자신의 '황금팔(강한 어깨)'이 주변인(감독, 친구, 야구부 주장 등)들에 의해 발견되고, 야구의 ABC도 모른 채 그라운드에 선다. 초스피드의 볼을 던지지만 최악의 콘트롤. 무협만화에 나오는 ‘늙은 무술의 달인’ 같은 ‘은퇴한 야구선수’와 그의 딸이 지켜보는 가운데 최고의 투수로 거듭난다. 물론, 경쟁국면을 만드는 강타자가 있어야 한다. 1회부터 9회까지 투수 혼자 ‘북치고 장구치고’를 해야하는 고교야구 소재 만화에서 주인공은 언제나 투수였다. 아홉 타자를 상대해야 하는 고독한 영웅의 모습은 독자를 흥분하게 만들기 때문. 그러나 프로야구 소재 만화가 인기를 끌면서 투수 주인공은 매력을 잃어갔다. 매 경기마다 출전시켜서 완봉승을 거두도록 이야기를 만드는 것도 무리였지만, 공격할 때는 벤치에 앉아있는 ‘막기의 영웅’을 독자가 반기지 않은 까닭.
▶ 타자 (적대자) : 쳤다하면 홈런. 그가 등장하기 전부터 상대 투수는 무너지기 시작한다. 혼자 베이스를 밟고 들어오는 법이 없다. 언제나 놀고 있는 것 같지만 남몰래 배팅연습을 하는 연습벌레. 아홉 타자를 상대하느라 땀을 흘리는 투수 앞에 선 강타자는 왠지 지독해 보인다. 거기에 집도 잘 살고, 공부도 잘한다. 이야기 속에서는 모든 사람들의 스타지만 이야기 밖에서는 그야말로 ‘쳐 죽일놈’이다. 하지만 프로야구소재 만화에서 이 공식은 뒤바뀐다. 등장 횟수가 높은 타자가 주인공의 역할을 하고, 벤치에서 쉬다가 유유히 걸어나와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는 투수가 적대자로 등장한다. 대신 타자가 주인공으로 나오면 ‘쳤다 하면 홈런’이 사라진다. 홈런을 친 타자는 벤치로 직행하기 때문. 타자 주인공은 ‘빠른 발’을 이용한 ‘땀 흘리는 야구’를 보여준다. 독자는 노력하는 영웅에 애정을 보이니까.
▶ 여자 주인공 : 두 남자와 한 여자의 삼각관계는 야구 소재 만화에서도 중요한 요인이 된다. ‘이수일과 심순애’의 공식. 여자의 ‘왔다리 갔다리’는 두 남자의 경기력을 극도로 높여주는 역할을 함과 동시에 이야기의 끝을 가장 손쉽게 만들어주기도 한다. 승자의 품에 안기는 것은 여자뿐 아니라 독자도 마찬가지.
▶ 조력자 : 야구 소재 만화 최고의 조력자는 전직 야구선수 출신의 퇴물. 늘상 소주병을 옆에 끼고, 엉뚱한 행동을 한다. 선수시절 우연한 사고로 라이벌을 다치게 하고, 죄의식에 사로잡혀 신분을 감추고 숨어 지낸다. 물론, 주인공 주변에서 찾기 쉽게 숨어있다. 그밖에 최고의 라이벌 선수 한명을 상대하기 위해 주인공을 돕는 이들이 있다. 혼자서 상대할 만한 적은 흥미가 없기 때문일까? 아니면 ‘힘 모아 하나로’가 미덕이었던 사회환경 때문일까?
※ 위의 키워드는 인물형에 대한 것이다. 한때 야구소재 만화가 유행하던 시절의 만화방(대본소)은 만화와 무협지가 대등한 비중을 이루고 있었다. 이후 만화장르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무협지의 작가진들이 만화스토리작가로 대거 이동했고, 만화의 이야기는 전형적인 ‘무협물’의 구조로 나타났다. 이소룡이나 초기 성룡의 영화를 봤던 독자라면 위의 인물형들이 옷만 바꾸고 등장했음을 눈치 챘을 것이다. 물론, 이와 같은 인물설정은 국내 현대만화의 기본형이 돼버렸다.
▶ 왼손잡이(불우한 환경) : ‘왼손잡이는 예체능 방면에 뛰어나다’는 속설은 만화에서도 증명된다. 그러나 야구소재 만화에서 왼손잡이는 ‘일반인과 다른 상황’에 주인공이 놓여 있음을 보여준다. 즉, 고아라던가, 홀아버지 밑에서 성장했다던가 하는 불우한 환경의 상징인 것이다. 몇몇 만화에서는 ‘왼손잡이’라는 설정을 장애 요소로 느껴지게 하기도 했고, 실제 장애인 야구선수를 등장시키기도 했다.
▶ 지옥훈련 : 주인공이 지닌 악조건이나 강한 선수를 상대하기 위한 ‘지옥훈련’은 야구 소재 만화를 보는 독자들을 더욱 안타깝게 만들었다. ‘승리’하기 위해 갖은 고초를 겪고, 훈련을 거듭하는 주인공은 ‘야구 천재’라기 보다 ‘노력형’ 임을 강조한다.
▶ 신기술 : ‘뜻 모아 하나로’ 열심히 하자가 시대를 반영하는 설정이었다면 ‘신기술의 개발’은 만화가 시대를 앞선 흔적. 벽보다 단단한 상대방을 이기기 위해 주인공은 작은 힘을 모은다. 그러나 그것만으론 부족함을 아는 주인공. 남몰래 ‘신기술(각종 변화구 등)’을 개발하고, 좌절의 문턱에서 ‘미완의 신기술’을 공개한다. 당연 ‘신지식인’ 감이다.
▶ 승리 : 경기는 계속되야 한다. 그러나 이야기는 끝을 봐야 한다. 주인공은 승리와 복수의 덧없음을 깨닫고 홀로 방랑길을 떠나는 무도인 흉내를 내곤 한다. 승리는 꼭 모든 것에서 이기는 것이 아니었고, 패전이 결국 승리일 때도 있다.
▶ 야구 기록 : 진기명기에 가까운 야구기록들이 독자들의 눈앞에서 사실이 되는 것은 ‘만화’에서만 느낄 수 있는 즐거움. 끝내기 만루 홈런은 아무 때나 터지고, 노히트노런이나 퍼펙트게임도 우습다. 직선타구로 날아간 공이 외야 담장에 꽂히는 경우도 있고, 수비수의 글러브 속에 공이 박혀 나오지 않을 때도 있다. 10할대의 타자가 있는가 하면, 방어률 0점대, 연속 도루에 이은 홈스틸 등도 있다. 특이한 타격폼과 너무 진지한 논리 속에 개발된 변화구도 볼거리. 좌우로 왔다갔다하는 공이 있는가 하면, 타자 앞에서 사라졌다 나타나는 공, 여러개로 분리 됐다가 하나가 되는 공 등이 있었다.
만화창작, 만화창작사, 1999-10-15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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