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카와 준, 『만화의 시간』
도서출판 글논 그림밭은 만화전문출판을 자처하며 『부자의 그림일기』, 『간판스타』 등의 단편만화선과 『한국만화산업연구』, 『만화연출』 등의 만화이론서적을 출판해왔다. 우리만화가 지니는 열악성에 대한 타성파괴와도 같은 일격이 전례 없는 출판물들을 배출해낸 그들 집단에 의해 가해진 것이다. 그리고 그 충격이 가실 즈음 이시카와 쥰이라는 일본만화가가 적어 낸-일본만화 독서일기 격인- 『만화의 시간』을 발간해냈다.
발간당시 일본에서 '일반독자를 위한 만화기법과 신인에서 대가에 이르는 만화가 100명에 관한 저자의 마니아적인 평가와 그 필체가 흥미만점이다.-《朝日新聞》', '전후 일본의 수출문화인 만화에 대한 정당하고 객관적인 평가서-《産經新聞》'라는 평가를 받은 이 책은, 근현대에 이르는 일본만화를 조망하고 있다.
서현아라는 신예번역가에 의해 옮겨진 책의 후면 옮긴이의 말에서 '이 책은 그 동안 나온 만화이론서나 평론들과는 약간 성격을 달리한다. … 그 다종다양한 작품들을 통해 저자는 시종일관 만화는 재미있다라고 주장하고 있다.'라고 평가하고 '그 동안 어려운 전문용어로 뒤범벅이 된 만화비평에 염증을 느꼈던 독자들은 재미있게 쓴 독서 감상문을 읽는 기분으로 편안하게 읽을 수 있으리라. 아무쪼록 많은 독자들이 이 책을 통하여 만화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기 바란다.'라고 적고 있다.
필자는 의아한 기운을 버릴 수가 없었다. 이 책의 어디에 만화에 대한 일반의 이해를 도모하는 부분이 있단 말인가? 이것은 일본만화 즉, 망가[1]의 입문서 아닌가? 본문의 내용들은 만화가이며, 수필가이고 소설가이기도하면서 만화평론가인 멀티플레이어가 적어 낸 만화독서일기일 뿐이다.
본문 51쪽에 작자 자신이 밝힌 것처럼 '물론 내 나름의 판단기준이며 내 취향을 멋대로 적어 놓은 것뿐..'인 것이다. 이 독서 감상문의 필요성은 마치 해외여행 리포트를 읽는 것과 동일한 정도에 놓여진다. '피지섬에 갔더니 그 오색의 바다와 훤히 내려다보이는 바다 밑 세상이 … 어쩌고' 하는 식의 기행담 정도인 것이다. 독자에게 '야마구치 다카시의 『가쿠고의 권유』가 어떠하니 그것은 꼭 보아야 할 것이다' 정도를 상상하게 하는 것이다.
일본문화에 대한 공식적 수입개방이 허용되지 않는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50%이상의 점유율을 보이고 있는 일본만화에 대한 '만화 내사랑'식 논조가 우리 만화환경에서 발간되어도 되는 건가? 라는 의문이 '한국만화 최고의 예술성 획득, 한국만화 최고의 리얼리즘, 한국만화시장 최초의 연구보고서' 따위의 헤드카피를 만들어 책을 펴내는 '글논그림밭'에서 일본만화의 '가이드북'을 내놔도 되는 건가? 까지 확대되자 필자는 야멸찬 배신행위를 직면하고 있는 적자로 돌변할 수밖에 없었다.
이시카와 쥰은 책의 서두에 51쪽에 걸쳐 만화를 읽는 법을 적고 있다. 이중 그 나름의 독법에 필자의 이견 몇 가지를 들어볼까 한다.-필자가 일본인이거나 그가 한국인이고, 우리만화가 일본만화에 대한 원죄(?)를 지니지 않았다면 난 그의 독법에 대해 전혀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대중문화를 자국의 사람이 자국의 대중으로서 읽는 것에 대한 참견은 가당치도 않은 것이라 보기 때문이다.
이시카와 쥰은 만화를 읽을 때,
1. 독창성을 본다.
2. 만화가가 얼마나 연구했는지를 본다.
3. 그림에 들인 정성을 본다.
4. 등장인물의 의상을 본다.
5. 움직임을 본다.
이중 '3. 그림에 들인 정성을 본다.'에서 일본의 만화 신이라 불리는 데즈카 오사무의 반체제로 등장한 『고르고 13』의 사이토 다카오에 관한 웃기지 않는 평가를 보자.
효과음을 표현하는 방법이 30년 전 작품에서와 동일한 것을 그림 예로 보이고, 극화라는 양식에 젓은 분업체제하에서의 작업이 변화를 이끌지 못한다고 평한다. 사이토 다카오는 근 30년간 『고르고 13』을 연재하고 있는 일본만화의 위상과도 같은 존재이다. 주인공 고르고 13은 30년이 지나도록 늙지 않았으며 옴니버스로 진행되어지는 이야기들은 하나의 이야기 안에서만 시간이 진행되어질 뿐 연계되는 동안에 시간은 전편의 앞이 되기도 하고, 뒤가 되기도 한다. 『고르고 13』이 연재 될 당시 사이토 다카오는 연재를 하면서 실력을 늘려나갈 정도의 신예작가가 아니었다. 거기에 『고르고 13』이 30년 연재가 가능했던 부분은 그의 만화 안에 있는 모든 구성요소들이 하나의 캐릭터화 되있었기 때문이다.
고길동하면 둘리의 적대자, 또는 자식을 불한당으로부터 보호하려는 밉지 않는 아빠의 모습 등을 기억하게 된다. 이런 것처럼 고르고 13 내의 모든 구성요소들은 하나의 기표(記票)로서 그 각각이 기의(記意)를 지니는 것이다. 감히 그것을 탓할 수 있단 말인가.
미키마우스의 꼬리가 굵어지거나 짧아지지 않는다고-범용화된 캐릭터인 미키도 사실은 시기에 맞게 변화했지만- 한탄하는 것과 전혀 다르지 않다.
'5. 움직임을 보다.'에서는 만화를 잘 그리는 작가와 그림을 잘 그리는 작가는 다르다라는 서문을 두고 전자에 『아키라』의 오토모 가츠히로를, 후자에 『크라잉프리맨』의 이케가미 료이치를 들고 있다. 강도 높은 주먹을 맞는 장면과 오토바이를 타는 동일한 두 가지 장면을 예로 제시한다. 그리고 보다 효과적인 장면으로 자신에게 각인 된 오토모의 만화적 그림 연출법에 손을 들어준다. 필자는 그의 말도 안되는 비교를 접하면서 실소를 금치 않을 수 없다.
오토모는 사이버펑크 장르의 창출자로서 새로운 만화문법을 제시한-프랑스 만화가 뫼비우스의 작품에 기초한 것이긴 하지만-작가이고, 이케가미는 이미 아시아 전반의 만화가들에게 그 실력을 인정받고 있으며 그의 고유한 화풍만으로도 아시아 만화전이 가능할 정도의 영향력을 지니고 있는 작가이다. 이케가미의 장면 연출은 작품사이에 들어가는 간지나 아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는 모든 컷을 미디엄 숏-관객의 눈 높이-과 슬라이드 필름을 펼쳐논듯한 방법으로 처리한다. 이는 그가 다루는 하드보일드 류의 작품에서 주로 등장하는 폭력묘사와 성애묘사가 그림의 소실점 또는, 독자에 의해 과장되어지는 것을 거부하는 극 사실주의적 연출법이다.
이시카와 쥰의 이 비교는 마치 표현주의 작가와 사실주의 작가의 연출비교와도 같은 무모한 논리 적용일 뿐이다.
이시카와 쥰의 만화독법은 마니아의 위치에서 내려오기 싫은 어린자의 시기와 부러움 정도에 멈춰지고 있다. 그것이 우리만화를 읽는 일반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면 더없이 감사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파국지경에 몰린 우리만화를 읽어내지도 못하는 독자에게 일본만화를 읽을 수 있는 가이드북을 선사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우리만화시장의 영세성이 끌어들인 것은 일본만화 자체만이 아니다. 그 안에 녹아있는 일본의 문화와 정서기반까지가 포함된다. 그리고 만화가 주는 디포르메-과장된-적인 재미는 이미 우리의 것과 일본의 것을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동일한 지경이다. 이에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 작가층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창작정서 안에는 독자들이 만화에서 원하는 재미-일본정서가 창출할 수 있는 재미-가 잔존치 않는다는 것이다.
70 년 이전 세대들에게 그나마의 한국만화가 읽히고 있을 뿐 이후 세대에게 그것을 보이며 만화의 재미를 말하라고 하는 건, 필자 역시 민망스런 오기라 생각한다. 필자는 이런 90년대를 맞이하며 등장한 만화전문출판사 글논그림밭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고, 그것이 우리만화의 새로운 전기를 기술하게 될 하나의 요인이라 믿었다. 그런 글논그림밭이 선택한 이시카와 쥰과 『만화의 시간』은 필자에겐 낭패감을 전달한다.
작자 이시카와 쥰은 앞서 기술한 대로 일본대중정서를 논하고 이끌어 가는 대중문화인이다. 그가 읽어낸 것은 우리정서와 동일하지 않지만 일본만화 또는, 일본성향의 우리만화로 학습된 세대들이 믿고 있는 교육된 정서 안에서는 상통하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이에 글논그림밭은 '독자여, 당신의 독법은 정확한 것이었소. 당신은 진정한 만화 마니아요.'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제 독자는 보다 '자유로운 일본만화 독서환경'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라고 자부하는 것과 같다. 일본의 '서정과 지성'이라는 평가를 듣고 있는 이시카와 쥰에 의해, 우리만화의 부상을 계획한 듯한 집단들의 우매함에 도움 받은 채.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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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리가 '만화'라 지칭하고 있는 것은 일본식 표기를 한국식으로 읽어낸 것이다. 기실 그들의 어휘 표기를 빌린 것만이 아니라 최근엔 만화표현법 까지도 차용하고 있다. 하지만 이제 '만화'는 대중적 기의를 지닌 것이 되어졌다. 이에 일본의 만화-일본화된 만화-는 망가로 지칭할 필요가 있다. 그들의 작품일 경우 구분의 뜻으로, 우리작가에 의한 경우 멸시의 뜻까지 포함해서(그들은 국제행사시 그들의 만화표기를 manga라 적고 있다. 우리도 manhwa로 적을수 있어야 할 것이다.)
한국만화문화연구원, 코코리뉴스레터, 1997. 7. 21 발표
박석환, 만화시비탕탕탕, 초록배매직스, 1999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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