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바우 영감, 김성환
풍자와 비판으로 우리 시대를 연 영감님
작품에 대하여 : 14,139가지 권력적 사건과 비민주적 사고와 싸운 이웃집 영감님
김성환의 <고바우 영감>은 1950년 육군본부가 발행한 [사병만화]에 첫 선을 보인 후 1955년 2월 1일 [동아일보] 연재를 시작으로 [조선일보](1980년부터), [문화일보](1992년부터)를 거치며 50년 간 총 14,139회 연재된 최장수 4칸 시사만화이다. 작은 키에 안경을 쓰고 콧수염을 기른 고바우 영감은 뾰족 솟은 머리칼 한 올로 감정을 표하고 수염에 가려진 입으로 지배 권력을 비판했다.
이미 소년만화가로 인정을 받고 있던 김성환은 한국전쟁이 벌어지자 육군의 일을 돕던 중 인민군을 피해 다락방에 숨어 지내게 된다. 이 때 거리에 널린 시체들을 보면서 전쟁의 참혹상을 스케치로 남겼고 참담한 세상을 변화시킬 만화 주인공 200여 명을 구상했다. 잡지 [학원]에 연재되며 사랑을 받았던 만화 <꺼꾸리군 장다리군>이 청소년들을 위한 만화 주인공이었다면 고바우 영감은 빽빽한 글자로 가득한 신문에 창문을 내고 어른들을 위한 볼거리로 구상됐다. 몇몇 매체를 통해 모습을 드러냈던 고바우가 세인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1955년 당시 9만부를 발행하던 <동아일보>에 연재되면서부터이다.
초기에는 무언만화 형식의 유우머에 집중했으나 이내 정치․사회․문화 전반에 대한 풍자와 날 선 비판이 주류를 이루며 ‘김성환만화=고바우영감’이라는 등식이 만들어 졌다. 성과와 과오에 대한 논란은 여전하지만 4․19민주혁명으로 막을 내린 이승만 정권, 5․16군사정변과 12․12군사정변으로 집권한 박정희, 전두환 정권으로 이어졌던 한국의 현대사는 부정하기 어려울 만큼 혼탁했다. 한치 앞을 예단하기 어려운 시기를 고바우 영감은 특유의 걸음으로 돌파했다. 어느 사이 영감은 우리 사회의 권력과 비민주적인 것에 맞서 싸우는 투사가 됐다.
고바우가 인기를 끌면 끌수록 정부의 검열과 통제 수위도 높아졌다. 경무대(당시 청와대)의 절대권력을 비판하는 만화나 재벌그룹을 위한 법 개정을 비판하는 만화로 인해 즉결재판과 벌금형을 받기도 했고 군사정부를 비판한 내용으로 인해 괴인들의 미행, 정보부 요원들에 의한 취조와 공갈 협박 등을 받기도 했다. 1963년 AP통신이 ‘말을 함부로 못하게 된 한국인’이라는 제목으로 고바우를 소개하고 군사정부의 언론탄압 소식을 전하면서 고바우는 국내외로부터 주목 받는 만화 주인공이 됐다. 이후 군사정부의 탄압은 더욱 심해졌고 ‘고바우가 신문에 실리지 않는 날은 한국에서 특종이 터지는 날(무언가 정부가 감출 일이 생긴 날이라는 의미)’이라는 말이 외신기자들 사이에서 떠돌기도 했다. 고바우는 그렇게 한국 현대사에서 발생한 14,139건의 정치사회적 사건사고를 풍자하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시인 고은은 ‘저 유신 시절/ 며칠 동안 아무도 모르게/ 고바우는 끌려갔다/ 우리는 그가 어디 있는가 모른 채/ 그의 빈칸 신문을 넘겨야 했다’며 ‘네 칸 짜리 고바우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시대를 이루었다’고 노래했다. 문학평론가 이어령은 1973년판 <고바우영감>(한국만화사, 전5권) 발간 시 ‘고바우는 우리 국민들의 한숨 속에서 자라났다. 그리고 고바우는 한국인의 애환과 분노와 사랑의 화신이다. 우리는 고바우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동안 외롭지 않을 것’이라고 적었다.
이처럼 김성환은 고바우를 통해 ‘우리 자신의 시대’를 만들었고 국민과 함께 오늘을 향해 걸어 왔다. 1955년 문화교육출판사에서 <고바우영감> 첫 단행본이 발행된 이래 한국문화사, 세기출판사, 고려가, 신원문화사 등에서 <고바우영감> 연재물을 중심으로 한 단행본이 발행됐다. 1958년에는 김승호 주연의 영화 <고바우>가 개봉됐고 1976년에는 일본에서 연재물을 수록한 작품집이 발행되기도 했다. 1977년 미국의 파울 드레즈 교수가 ‘고바우의 언어’라는 논문으로 하버드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기도 했다.
정권의 탄압도 많이 받았지만 민주화 이후에는 공공기관의 관심도 많이 받았다. 1996년 국립중앙박물관에 개인전시실이 상설로 설치됐고 2000년에는 고바우 50주년 기념우표가 발행됐다. 2001년에는 한국기네스북에 ‘최장수 연재만화’로 등재됐고 같은 해 본인과 지인들의 출자로 ‘고바우만화상’이 제정되기도 했다. 2012년 만화의 날인 11월 3일에는 포털사이트 네이버의 로고가 고바우 영감으로 뒤바뀌는 이벤트가 벌어지기도 했다. 2013년에는 고바우영감 원화가 등록문화재 제538호로 지정됐다.
작가에 대하여 : 한국 현대만화라는 성벽을 쌓아 올린 선구자 김성환
김성환(1932년 황해도 개성 출생)은 해방과 함께 한국전쟁 전후의 만화계를 주도한 선구자로 한국 현대만화의 기초를 구성했다. 선배격인 김용환이 일본 유학파로 일본에서 배운 만화를 한국에 전파하고 이를 한국식으로 재구성했다면 김성환은 만화라는 신흥 장르를 나름의 방식으로 재창조 해냈다. 만주에서 소년기를 보내고 해방 후 서울에 온 김성환은 경복중학교(지금의 고등학교) 재학시절 이미 미술에 대한 재주를 보였다. 빈곤한 형편이었던 김성환은 학비라도 벌어 볼 생각으로 4칸 만화를 그려 [연합신문]에 보냈는데 이것이 곧 데뷔 무대가 됐다. 이미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던 김용환은 자신이 편집을 담당하던 <만화뉴스>에 김성환을 전속작가로 기용했고 김성환은 프로 만화가로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 질 수 있게 된다. 하지만 곧 한국전쟁이 벌어지면서 김용환과 김성환은 각각 인민군과 국군의 전쟁홍보를 담당하는 사병으로 갈라서게 된다.
국군이 서울을 수복하고 전쟁이 끝나기 전후부터 김성환은 억눌린 창작욕을 불사르듯 다양한 매체에 다종의 만화작품을 발표한다. 첫 번째 히트작이랄 수 있는 <꺼꾸리군 장다리군>이 1953년 잡지 [학원]에 연재되며 청소년들에게 큰 인기를 모으자 1954년에는 성인들을 대상으로 한 만화집 <세태만상>과 <캐카리카튜어>를 연 이어 발표했다. 당시 [경향신문]은 이 단행본을 성인을 위한 최초의 만화책으로 간주하고 ‘혼란과 무질서로 황폐한 오늘의 기류’를 위한 ‘예리한 비평의 메스가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김성환은 같은 해 [경향신문]에 ‘막동이’를 연재한 후 1955년 [동아일보]에 <고바우 영감>을 발표했다. 이후 <세모돌이 네모돌이> <소케트군> <빅토리 조절구> 등 아동만화까지 섭렵하면서 아동, 청소년, 성인에 이르는 전 연령층을 독자로 한 만화가가 됐다.
[문화일보] 2000년 9월 29일자로 <고바우 영감>의 연재를 종료한 김성환은 이후 풍속화가로 더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시시비비를 가릴 일 없는 과거의 한 시기를 정밀한 기억과 고증으로 풀어 낸 풍속화 연작과 인생의 참 의미와 가치에 대한 메시지를 담은 서화 등을 다양한 기법으로 그려내고 있다. 1956년 현대만화가협회 초대 회장을 지냈고 1992년 [문화일보] 상무이사 대우로 직업 만화가로서의 신문에서 벗어났다. 1990년 언론학회 언론상, 1997년 한국만화문화상, 2002년 보관문화훈장을 수훈했다.
명장면 명대사 : 이젠 나를 찾았는데 그동안 많이 상했구나
1958년 1월 28일자 [동아일보]는 김성환이 서울시경에 불려가 심문을 받았고 같은 해 1월 23일자에 그린 ‘고바우 영감’ 만화로 인해 입건 될 수 있다는 기사를 게재했다. 만화 내용이 국가에 대한 조롱이 담겨있고 불순하다는 이유로 경범법을 위반했다는 것. [동아일보]는 ‘신문만화가 본시 사회풍자를 지향하는데다가 만화 자체가 과장된 표현을 사용하는 것인데도 이를 악의적으로 곡해하고 수사기관에서 입건하려는 태도를 보이고 있는 점’은 선거 대비용이라 논하며 ‘어디까지나 사회의 어지러운 현상을 풍자를 한 것이지 경무대를 모욕할 의사는 추호도 없는 것이며 또 결과적으로 모욕이 됐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는 김성환의 입장을 전했다. 벌금형으로 끝난 이 사건 이후로도 김성환과 <고바우영감>은 권력의 북이라도 되는 양 시시때때로 뚜드려 맞았다. 하지만 고바우의 머리털이 구부러질지언정 김성환과 영감님은 이를 피하지 않았다. 탄압이 있으면 또 그 사건을 만화화하는 방식으로 절대권력과의 싸움에 물러섬이 없었다. 만화의 힘을 믿었던 것이다.
그 중 백미는 1960년 4월 27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만화이다.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를 결의했다는 기사가 1면에 실린 이날 <고바우영감>(1840회)은 달라질 세상에 대한 안도의 한숨과 함께 ‘검열제가 철폐되어 이젠 나를 찾았는데/ 그동안 많이 상했구나.’라며 기대 또는 또 다른 걱정이 담긴 한마디를 내 뱉는다. 이를 4칸 안에 담기 위한 연출 방식 역시 돋보인다. 점점이 사라졌던 고바우의 모습이 원상태로 돌아오지만 마지막 컷 속에서 거울을 보는 고바우는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 있다. 그런 일이 반복되는 것이 또 십 수 년, 반백년을 한국 현대사의 격변기와 싸웠던 고바우는 2000년 [문화일보]를 통해 마지막 인사를 하며 고바우 또는 김성환이 걸었던 길을 묘사한다. 그 혹독했던 시기를 ‘춘풍(春風)’이라 했고 ‘추우(秋雨)’라 기억하며 사람들의 ‘건강’을 빌었다. 반백년, 지금의 우리와 오늘의 여기를 이끌어낸 이가 던지는 마지막 걱정이다. 그의 걱정처럼 지금 우리는 ‘건강’한 걸까.
글에 남긴 여러분의 의견은 개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