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석환, 독고 탁-결코 포기하지 않는 삶에 대하여, 아홉개의 빨간모자-서평, 2021.08.25

1. 아홉 개의 빨간 모자

 

<아홉 개의 빨간 모자>는 당대 최고의 아동교양잡지 어깨동무에 별책부록 형식으로 연재된 야구 소재 만화이다. 19807월호 부록으로 1권이 발행됐다. 권당 64페이지 분량으로 무선제본 형태를 취했다. 작품 전체 분량이 1천 페이지 규모여서 17개 월 가량 연재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연재분을 단행본으로 묶어 처음 발행한 것은 1982년 은성문화사(물개만화) 판이고 마지막으로 재발행 된 것은 1994년 세주문화사(팀아트) 판이다. 제목을 <그라운드의 빨간모자>로 바꿔서 낸 우석 판도 있다.

씨엔씨레볼루션 신장판

 

이 시기 아동교양잡지들은 본지를 구매하면 전면 만화로 된 별책부록을 제공했다. 본지가 교양성과 지식을 강조했다면 부록은 오락성과 감동에 집중했다. 본지에도 연재만화가 게재됐지만 별책부록으로 제공된 연재만화와는 규모가 달랐다. 본지 연재만화의 경우 1호당 16페이지 분량이 게재됐는데 별책부록 연재만화는 1호당 64페이지 분량을 게재했다. 본지 기준으로 보자면 한번에 4화 분량이 공개되는 파격적인 연재 시스템을 도입한 것이다.

많아진 분량만큼 묘사는 세밀해졌고 극적인 연출이 강화됐다. 만화팬들은 별책부록 만화에 열광했다. ‘어깨동무와 함께 트로이카 체제를 구축하고 있던 소년중앙’ ‘새소년도 별책부록 만화에 공을 들이며 치열한 판매 경쟁을 벌였다. ‘별책부록 연재만화 시스템의 등장은 대본소용 단행본만화를 작업하던 작가들을 아동교양잡지 시장으로 불러들이는 계기가 됐다. 당대 최고의 신예들이 이 무대에서 스타작가로 성장했고 이상무도 그 중 한명이었다.

 

2. 80년대와 이상무

 

이상무는 1946년 경북 김천에서 태어났다. 김천중앙고를 졸업하고 1964년 상경해 박기준 문하에서 수련했다. 1966<노미호와 주리혜>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지만 본격적인 데뷔작은 1972<주근깨>부터이다. 이 작품에서 이상무의 대표 캐릭터 독고탁이 처음 등장한다. 독고탁은 이름에서 느껴지는 것처럼 외톨이에 고집불통이지만 낙천성과 유쾌함을 잃지 않았던 불굴의 소년이다.

2009년 만화평론가 김성훈과의 인터뷰에서 이상무는 자신의 작품세계와 관련해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어린 시절, 전쟁 직후여서 고아들이 많았고 고아원도 가까운 곳에 여러 곳이 있었어요.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가까운 고아원에 자주 놀러 가서 그곳의 아이들과 잘 어울리기도 했었지요. 그러다 보니 고아들의 모습들도 가까이서 보게 되었고, 그런 것들이 작품 속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나게 된 것 같아요.”

 

독고탁 또는 이상무 만화의 세계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전쟁으로 인해 버려진 고아이거나 부랑아였다. 국가재건을 이유로 산업전선이라 명명된 제2의 전쟁터에서 장애를 얻고 쫓겨난 실패자였다. 어찌된 영문인지 일본인 또는 미국인의 가족이 되어서 정체성 혼란을 겪는 혼혈아이기도 했다. 해방과 한국전 후 미군정과 군부 통치 하에 우리 사회는 빠르게 성장했고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기적은 공평하게 분배되지 않았다. 빈부격차에 따른 새로운 계급이 만들어졌고 가장 낮은 계급에서도 이탈되는 이들이 있었다.

이상무는 그렇게 이탈 된 가장 낮은 자들 속에 독고탁을 세우고 가장 높은 자들과 맞서게 했다. 하지만 독고탁은 낮은 자들을 위해 앞장서는 영웅이나 지도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낮은 자들을 흉보며 가장 높은 곳으로 자신의 분노를 쏟아내고 마는 위험인물이었다. 이상무는 승패가 뻔한 싸움을 벌려놓고 어떻게 할지 묻고 독고탁은 하나라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고 말한다. 40년대 생 이상무가 60~70년대에 태어나 저 80년대를 살아낸 만화세대에게 던진 메시지인 셈이다.

 

3. 다시 읽는 빨간 모자

 

<아홉 개의 빨간 모자>는 과곡리에 있는 부랑아 수용시설 형제원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다. 작품에는 지역에 대한 설명이 없지만 김성훈과의 인터뷰에서 이상무는 중고등학교 시절 가까운 고아원에서 원생들과 어울렸다고 했음으로 김천시에 실재했던 공간이 모델이 됐을 것으로 보인다.

슬램덩크 보다 먼저 나왔던 명대사... 야구가 하고 싶습니다.

 

작중 형제원은 보육원으로 가기에는 나이가 많은 부모와 가정 없이 돌처럼 굴러다니는 소년소녀들을 보호하고 교화하기 위한 곳이다. 11기의 기술을 익혀 사회로 배출하는 곳으로 불우 소년들을 선도하겠다는 숭고한 뜻이 있는 어른들이 만든 공간이었다. 하지만 작중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주인공 소년 독고탁은 벌써 다섯 번째 시설을 탈출하다가 붙잡혔다. 주임 선생은 그런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전근 온 옥기호 선생에게 구제할 수 없는 애들이라며 숭고한 뜻낭만일 뿐, ‘며칠만 지내보면 정나미가 뚝 떨어질것이라 경고한다.

형제원은 충···4개 반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충반은 목공, 의반은 선반, 숙반은 재봉과 미용, 용반은 영농 일을 했다. 기술을 가르치기 보다는 온갖 잡일을 하고 있었다. 특히, ‘용반은 기술을 가르칠 수 없는 말썽쟁이들을 모아둔 곳이라 했다. 옥기호 선생이 담당할 반이고 탁이 속해 있는 반이다. 그 곳에 거리에서 싸움질을 하다가 경찰에 잡혀 온 재벌집 아들 봉구가 합류한다. 봉구는 자신의 신분을 감추고 원생들과 함께했다.

형제원 사택에는 원장 가족이 거주했다. 사택은 원생들이 지내는 곳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 고교야구선수인 원장 아들 준은 용반 아이들을 하인 다루듯 했다. 여동생 숙은 오빠의 행동이 잘 못됐다고 지적하지만 원생들과 자신이 다르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탁은 숙을 흠모했지만 숙의 마음에는 어느 덧 봉구가 들어와 있다.

인물 간의 갈등선이 얽히고설킨 상황, 옥기호 선생은 원장 아들 준의 비웃음과 멸시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원생들을 변화시키려 한다. 첫 달 월급을 몽땅 털어 야구 장비를 사고 원생들을 훈련시켜 준이 다니는 야구 명문 제일고와 경기를 한다. 글러브질도 제대로 못하는 아이들을 이끌고 질 수밖에 없는 경기를 고집스럽게 이어가는 옥기호 선생, 아이들은 온 몸으로 공을 막으며 자신들이 만만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해 간다.

하지만 주인공 독고탁은 철저하게 이기적이다. 옥기호 선생처럼 원생들에게 의지를 심어주는 이도 아니고 봉구처럼 기회를 만들어주는 이도 아니다. 숙처럼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지도 않다. 오히려 준처럼 지기 싫어하고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독선과 아집으로 가득한 구제할 수 없는 애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준은 좋은 환경과 조건 아래서 실수를 해도 용서받을 수 있었지만 탁은 잘못하면 반성실에 갇히고 시설에서 쫓겨나 소년원에 보내져야 했다.

모든 걸 걸어야 가능한 단 한 번의 기회, 독고탁은 팀이나 다른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울분을 터트리기 위해 오직 직구로만 준과 봉구에 맞선다. 80년대, 한국 사회 전반을 옭아매고 있던 부패한 공권력이라는 체제와 가식적인 재력이 만든 질서에 저항한 것이다.

 

아다치 미츠루보다 먼저 한 선언... 직구로 승구할 뿐

 

4. 만화 속 형제원과 현실 속 형제원

 

<아홉 개의 빨간 모자>가 발표된 1980년은 그야말로 격동의 시기였다. 197910·26사건으로 박정희의 유신체제가 붕괴되면서 서울의 봄이 오는 듯 했다. 하지만 12·12군사반란으로 전두환 신군부가 들어서고 19805·18민주화운동에 대한 무력진압 사태가 발생하면서 한국의 민주화는 또 한 번 멈춰 섰다. 박정희에 의한 군부통치에 이어 전두환에 의한 군부통치를 받아들여야 했던 시기, 우리 사회 전반은 군부에 의한 감시와 통제에 익숙해졌고 반민주적·반인권적 사건사고에 무감각해졌다.

그 시절... 아무렇지 않게 행해지던 인권유린...

 

<아홉 개의 빨간 모자>는 얼핏 역경 속에서 고교야구대회에 출전한 고아원 출신 선수들의 감동스토리로 기억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작품이 그려낸 세계는 부랑아 수용시설의 반인권적 운영 실태였고 이에 저항했던 선생님과 원생들의 울분이었다. 고교야구대회를 소재로 한 근성의 스포츠만화처럼 보이지만 당대의 문제를 정면으로 응시한 사회 고발성 극화였다.

1980년부터 1981년 사이에 창작 된 만화 속 형제원은 작은 시골 도시의 사회복지 시설에서 펼쳐지는 인권침해의 모습들을 스치듯 제시하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작품이 연재되는 기간을 전후로 한 1975년부터 1987년까지 현실 속 형제원에서는 500여 명 이상이 살해 또는 고문에 의해 사망하는 천인공노할 인권유린 사건이 발생했다.

부산 형제복지원은 1960년 개원한 유아보호시설형제육아원이 모태이다. 직업군인 출신인 박인근이 1962년 인수, 1971년 형제원으로 명칭을 변경하고 부랑아 보호시설로 운영했다. 만화 속 형제원과 동일 명칭이지만 유사 명칭의 시설이 많았던 만큼 같은 곳이라고 할 수는 없다. 1975년 박정희 정부는 영구집권을 위해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하는 긴급조치를 발표한다. 내무부 훈령 제410호도 그 중 하나로 영장 없이 부랑인을 단속하고 시설에 수용할 수 있도록 했다. 부랑인을 건전한 사회 및 도시질서를 저해하는 자’, ‘사회에 나쁜 영향을 주는 자로 정의해 누구라도 부랑인으로 지목되어 강제수용 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를 근거로 박인근은 1979년 형제원의 명칭을 형제복지원으로 변경하고 부랑아 및 부랑인 직업보도 업무를 개시한다. 작품 속에서 형사 반장에 의해 시설로 보내 진 봉구의 모습이 겹쳐지는 대목이다.

 

 

5. 80년대 소년, 불굴의 독고탁

 

어떻게 된 일일까? 긴급조치 시대에 대중문화는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감시와 통제 속에서 탄압 받았다. 특히 과장과 풍자가 제 몫이었던 만화는 아주 작은 현실 비판적 묘사도 허용되지 않는 청정구역(?)으로 관리 됐다. 그런데 어떻게 당시 사회 시스템의 인권유린 실태를 고발하고 부조리에 맞서는 내용의 만화가 아동교양잡지 별책부록으로 유통되고 큰 인기를 얻을 수 있었을까?

<아홉 개의 빨간 모자>어깨동무의 별책부록으로 탄생한 작품이다. 이 잡지는 박정희 대통령의 부인 육영수가 어린이 복지사업을 위해 1969년 설립한 육영재단에서 발행했다. 당시는 한국도서잡지주간신문윤리위원회가 각종 간행물에 대한 내용심의를 철저하게 진행했다. 특히 만화부문에서는 198095만화정화 방안을 마련해 각 출판사와 만화가들에게 통보하기도 했다. 그 해 11월에는 사회정화위원회가 불량만화 출판업자 13명을 구속하고 69명의 만화가들을 미성년자보호법 위반으로 고발했다. 이 시기를 전후로 김경언, 김산호, 엄희자, 박부길 등 당대 인기 만화가들이 절필, 전업, 이민 등의 방식으로 만화계를 떠났다.

모든 발간물이 심의 대상이었으니 지적될 만한 소재나 내용은 이른바 자기검열 과정에서 제거되거나 편집진의 검토 과정에서 조정되어 심의위원 앞까지 갈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홉 개의 빨간 모자>는 당시 정권을 불편하게 할 내용들로 가득하다. 어떻게 이런 내용으로 심의필 도장을 받을 수 있었을까. 모를 일이다. 하지만 분명한 건 작가, 편집진, 심의위원이 이 작품의 내용에 동의하고 발간을 승인했다는 점이다. ‘어깨동무별책부록으로 발간된 책자의 속표지에는 글·그림 이상무라고 표기된 바로 아래 구성 어깨동무 만화기획실이라는 부기가 붙었다. 통상 저작물의 권리가 누구누구에게 있다는 점을 공표하기 위한 방식이다. 하지만 이는 내용에 대한 법적 책임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 책임을 나누는 방식이기도 했다. 심의 과정에서는 내용에 대한 신뢰를 강화 시켜주는 역할도 했을 것이다. , ‘이런 내용을 다뤄도 되는지에 대한 걱정이 작가와 편집진 모두에게 있었다고 유추해 볼 수 있다.

독고탁은 결코 명랑하지만은 않았다...

 

<비둘기 합창>, <울지 않는 소년> 등을 발표하며 이미 인기작가 반열에 오른 이상무였으니 차기작 선택권은 작가에게 있었을 것이다. 서슬 퍼런 신군부의 비호 아래 무서울 것 없던 심의위원회라지만 전 정권과 연결되어 있는 육영재단 사업에 간섭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시쳇말로 어깨동무 만화기획실에서 구성한 것이라고 하면 무사통과 됐을 수 있다. 또 다른 측면에서는 독고탁이라는 캐릭터가 만든 신화와 이데올로기가 당시 신군부가 원하던 한국사회의 가치나 신념과 일맥상통한 측면이 있지 않았을까하는 점이다.

독고탁이라는 존재는 체제에 불응하는 불평분자였다. 돌보는 사람 없는 고아였고 할 수 있는 일을 아직 찾지 못한 부랑자였다. 시설에 부정부패가 있다는 점이 노출되고 다소 체제 저항적인 모습이 그려졌다 하더라도 결국 그런 이들을 사회로부터 분리하고 갱생 시키는 역할에서 정당성을 찾았을 수 있다. 모든 것이 비정상이었던 사회였지만 훈련을 통해, 훈육의 방식으로 정상화를 시도했고 독고탁은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결코 포기하지 않는 방식으로 성취의 순간을 만들어냈다. ‘온갖 어려움에도 굽히지 아니하는 사람이라는 불굴의 신화를 대표하는 주인공이 된 것이다.

독고탁은 통제 되지 않아 다소 불편하지만 결국 체제에 저항하는 방식으로 체제의 정당성과 권고함을 만들어 낸 80년대 소년이었다. 하지만, 불굴의 독고탁은 80년대에 머물러 있지 않다. 그 시대 만화팬들을 중심으로 수없이 많은 독고탁들이 성장했고 굽히지 아니하는 사람들은 결국 훈육의 시대를 종결시켰다. 훈육의 방식을 제거하고 나면 독고탁에게 남는 키워드는 결국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다. 이상무는 독고탁을 자신이 경험한 한국 사회의 여러 문제 앞에 세웠고 미래세대라 할 수 있는 독자들은 독고탁을 통해 당대의 문제들을 어렴풋이나마 대리체험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독자들은 어떤 어려움 앞에서도 결코 포기하지 말라던 독고탁 신화와 당대의 이데올로기를 부적처럼 가슴에 품고 오늘을 만들어 냈다. ()

 

* 이 원고는 독고탁 탄생 50주년을 기념해 복간 된 <아홉개의 빨간모자> 서평으로 쓰여졌습니다.

http://www.yes24.com/Product/Goods/104122153

 

아홉개의 빨간모자 1~3 세트 - YES24

독고탁 탄생 50주년 기념 ‘다시 보는 이상무 걸작선’『아홉개의 빨간모자』故이상무 작가의 독고탁이 탄생 50주년을 맞이했다. 이를 기념해 ‘다시 보는 이상무 걸작선’ 『아홉개의 빨간모

www.yes24.com

 

기념 행사와 관련 된 내용은 아래 사진 및 게시물을 참고해주세요. 

 

독고탁 50주년 기념 포스터

 

이상무 선생님의 영원한 편집자였던 사모님
토크 전 일어나를 열창하는 가수
먼길 찾아오신 작가님들 오른쪽부터 허영만, 박기준, 김동화 선생님

 

김동화, 박기준 선생님과 한 컷...
이상무 선생님이 생전에 작업하시던 옥탑방 화실

 

특별전이 열렸을 때 후배 작가들이 그렸던 헌정 작품들이 파티션을 가득 채우고...

 

** 당일 행사 사진은 김종익님께서 촬영해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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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kseokhwan

만화평론가 박석환 홈페이지. 만화 이론과 비평, 웹툰 리뷰, 인터뷰, 보도자료 등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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