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 Story
한국의 근현대사를 조망한 웹툰과 그 의미
풍자하고 꿈꾸는 21세기의 방식
카툰, 현실과 평가를 담는 형식
단순화·과장화·풍자화의 특징을 지닌 그림, 이를 바탕으로 글과 조합된 형태의 예술 형식을 통상 ‘만화’라고 부른다. 그런데 만화라는 예술에도 다양한 분야가 있다. 만화의 역사에서 윌리엄 호가스(1967~1764)가 회화의 한 형식으로 캐리커처(인물풍자화)를 주도했다면 오노레 도미에(1808~1879)는 카툰(단순화-두꺼운 종이에 그린 밑그림), 루돌프 퇴퍼(1799~1846)는 코믹스트립(연속화)의 전형을 이끌어냈다. 이를 토대로 현대만화의 주류 형식인 유럽의 ‘방드 데시네(Bande Dessinee)’, 미국의 ‘코믹북(comicbook)’, 일본의 ‘망가(漫畵·マンガ)’가 탄생했고 인터넷 시대가 열리면서 한국의 ‘웹툰’이 세계 만화의 한 형식으로 인정받고 있다. 물론, 이토록 다양하게 발전한 세부 형식이 있음에도 ‘만화’라는 한 단어로 통칭하는 것이 비단 우리만의 언어 습관은 아니다.
서구 사회에서는 우리가 만화로 통칭하는 그것을 ‘카툰’이라 부른다. 유럽에서는 벽화 등을 그리기 전에 두꺼운 용지에 시안을 그렸는데 이때 사용한 용지의 이름이 카르통이었다. 그래서 카툰이라고 하면 ‘본 그림을 그리기 전에 단순하게 그린 그림’을 뜻했다. 그런데 1843년 영국의 시사풍자잡지 <펀치>에는 존 리치가 그린 <카툰-1호>라는 이름의 작품이 게재됐다. 그림의 윗부분에는 웨스트민스터 궁전 벽면에 그릴 왕족의 초상화 시안이 있고 아랫부분에서는 초라한 행색의 시민들이 그 초상화들을 바라보고 있다. 위정자들이 시민의 궁핍한 삶은 고려하지 않고 무리하게 세금을 걷어 궁전을 새로 치장하고 있다는 점을 비판한 것이다. 당시는 노동자들이 의회에 참여해야 귀족과 자본가 중심의 정치 질서를 개혁할 수 있다는 차티스트 운동(Chartism)이 한창이던 시절이다.
이는 작품의 소재가 왕족의 초상화를 그리기 위한 시안, 즉 카툰이었다는 점을 강조한 이름인데 이 작품 역시 ‘카툰을 보고 있는 사람들을 그린 카툰’이라 할 수 있다. 위정자들이 시민의 삶과 무관하게 왕족의 초상화를 미리 보기 위해 시안(카툰)을 그리게 했다면 작가는 이를 바라보는 시민의 모습까지를 시안(카툰)으로 그려내 당대의 정치적 상황을 비판하는 한편, 시민에게 당면한 현실과 달라질 것 없는 미래를 미리 볼 수 있도록 하고, 이 같은 현실이 변화하기 위해서는 노동자들이 정치에 참여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웹툰, 과거를 재현해 미래를 변화시키는 형식
캐리커처가 작화 기법이었다면 카툰은 메시지를 담는 창작 형식이었다. 잡지 <펀치>는 당시 영국의 식민지와 일본, 중국 등 여러 국가를 통해 보급되면서 당대의 정치 지도자와 자본가들을 강도 높게 비판했고 일반 대중과 노동자의 정치 참여를 촉구했다. 이후 카툰은 복수의 프레임에 글과 함께 그린 그림(코믹스트립), 연속되는 프레임을 여러 페이지에 걸쳐 그리고 대사와 효과음 등을 조합해 연상 작용을 강조한 연속화(코믹북), 페이지 단위의 전개 방식을 스크롤 마우스와 인터넷 환경에 맞춰 재구성한 웹툰 등의 창작 형식으로 분화됐다.
현재 세계 만화 시장은 일본의 고유한 만화 형식인 망가(우철 방식, 장편 흑백만화)와 미국의 코믹북(좌철 방식, 단편 컬러만화)이 점령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하지만 인터넷과 스마트폰이 인쇄 미디어를 빠르게 대체하면서 한국이 창안한 웹툰(세로 스크롤, 장편 컬러만화)이 세계 만화 시장에서 주목받고 있다. 현재 한국 웹툰은 한 해 2,000편 이상의 신규 작품이 생산되면서 미국의 코믹북 생산량을 압도하고 있고 일본의 망가 생산량과 비슷한 수준을 유지 중이다. 신작 생산량이 증가하면서 오락성을 기반으로 한 특정 장르 중심에서 탈피한 이른바 다양성 웹툰의 생산도 증가하고 있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한국의 근현대사를 소재로 한 웹툰이 다수 등장해 대중적 인기와 함께 호평을 받고 있다는 점이다.
일제강점기를 소재로 한 이무기 작가의 <곱게자란자식>(다음웹툰), 6·25전쟁과 미군정기를 소재로 한 윤태호 작가의 <인천상륙작전>(네이트·다음웹툰), 군사 독재 시기를 소재로 한 수사반장 작가의 <김철수씨이야기>(레진코믹스) 등이 대표적이다. 역사적 사실을 소재로 했지만 사실 그 자체라기보다는 불온한 시대의 한복판에 선 인물을 주인공으로 한 작품이다. 역사의 주인공인 위정자들이 아니라 그들이 벌여놓은 시대 속에서 소중한 것들을 빼앗기고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으면서도 나름대로의 가치를 위해 목숨 걸고 저항하던 이들의 이야기다.
<곱게자란자식>은 일제 강점기에 절대 곱게 자랄 수 없었던 간난이를 통해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친일반민족행위자와 위안부 문제를 꺼내놓고, <인천상륙작전>은 어떻게든 살아남는 것이 소중했던 철구네 가족을 통해 한국전 당시 자행된 미군의 민간인 학살 사건을 드러내기도 한다. <김철수씨이야기>에서 주인공은 태어나자마자 쓰레기통에 버려져 미친 여자 손에 크다 고아원에서 양부모에게 입양된다. 마치 아무도 책임지려 하지 않았던 조국과 민족이 군부독재의 손에 넘어가 불행한 시기를 맞이한 것처럼, 김철수 씨는 불행했고 그 시기는 불온했다. 이제 주인공은 이 세상 모두를 향한 증오와 복수를 계획한다. 작가들은 한국의 현재를 구축한 역사적 사실과 설정된 인물의 세계를 병렬 배치하거나 병치 혼합하는 방식으로 당대의 문제를 재인식하게 하고 우리 시대와 다음 세대를 모색하게 만들었다. 세 작품 모두 연재 중 수많은 이슈와 찬반 논쟁을 불러왔지만 만화계와 정부는 이 작품들에 대한민국만화대상, 부천만화대상 등을 수여했다.
세 편의 작품이 ‘시대물’이라면, 성남시와 성남문화재단이 추진하고 있는 ‘성남 독립운동가 웹툰프로젝트’는 독립운동가를 소재로 한 ‘역사물’이라 할 수 있다. 이 프로젝트는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이해 독립운동가 100인의 삶과 정신을 3년에 걸쳐 그려내는 공공문화콘텐츠 사업이다. 프로젝트의 시작이었던 지난해 33인에 이어 올해도 33인의 일생이 8월 EBS툰을 통해 공개를 앞두고 있다.
역사 속 실존 인물을 웹툰으로 만나는 것도 반가운 일이지만, 서로 다른 영역에서 활동하던 신구(新舊) 만화가들의 필치를 한자리에서 목격할 수 있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다. 다음웹툰과 함께한 2019년 첫 프로젝트에서는 만화를 통해 역사 문제의 해법을 지속적으로 찾고 있는 박건웅 작가가 독립운동가 김산을 그렸고, 만화로 사회 문제를 고발해온 김성희 작가가 김마리아를 그려냈다. 독립만화 신에서 활동하던 김수박・최인선 작가는 이봉창과 정정화를, 사실주의 극화로 일가를 이룬 백성민과 김광성 작가는 김구와 신채호, 각기 다른 작품 세계로 주류만화 시장을 리드했던 허영만・김진・권가야 작가는 김원봉・홍범도・김상옥을 웹툰에 담아냈다. 홍혜림・이루다・이규석 등의 신예 웹툰 작가와 웹툰 신에서 만나보기 어려웠던 김현민・조명원・김금숙 등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한국만화와 웹툰계가 총 출동해 '과거의 오늘'을 재현한 것이다.
이 뜻깊은 행보는 올해 2년차 프로젝트로 이어진다. 이현세 작가, 이빈 작가, 이강민 작가 등이 우리가 기억해야 할 또 다른 독립운동가를 그려가고 있다.
자기 동일시를 통한 판타지, 거리두기를 통한 리얼리티
흔히 ‘만화’ 하면 ‘어린아이들이나 보는 것’ ‘허무맹랑한 가상의 세계를 다룬 백일몽’ 등으로 비난하기도 한다. 하지만 만화의 역사는 만화가 매우 정치적이고 아주 혁신적인 방식으로 대중의 정치 참여를 유도한 예술 형식이자 의사소통 매체였음을 증명한다. 정치가 어린애들이 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위정자들이나 사회 지도층 인사들이 만화를 비하하는 이유는 명확하게 ‘자신들의 이익에 반하기 때문’이었다. 이런 주장이 정치·시사 풍자만화에만 국한된 것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다. 만화의 상업적 효과와 목적이 강화되면서 아동·청소년 만화나 성인만화는 이른바 폭력성과 선정성만을 강조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도 있다.
일부 수용해야 할 부분이 없지는 않지만, 아동·청소년 만화나 성인만화라 하더라도 만화가 재현해낸 현실의 비루함과 이를 극복하기 위한 ‘상상으로서의 도전적 삶’은 언제나 우리 사회의 불공정한 질서와 그들만의 안정적 리그를 뒤흔드는 것이었다. 여성의 관점에서 서술되는 이른바 순정만화도 ‘사랑타령’이나 하는 것으로 오해받기도 하지만, 종래의 순종적 여성이 아닌 자기 주도적 여성의 선택과 삶을 다룬다. 주인공과 독자가 동일시되어 작품 속 세계를 누비다 보면 작품 속 현실에서 벗어나 독자적 현실을 인식(거리두기)하게 될 때가 있다. 이때 만화와 웹툰이 보여준 세계가 자신의 삶과 환경에 대한 변화 의지로 작동하게 된다.
만화가 정치를 소재로 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정치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물론, 역사물이나 시대물이라면 그 정치적 힘과 역할은 더할 것이다. 만화가 세상이라면 독자는 그 안에서 정치를 하기도 하고 투표를 할 때도 있다.
글. 박석환 만화평론가, 한국영상대학교 교수
1997년 <스포츠서울> 신춘문예 만화평론 부문에 당선돼 만화계에 입문했다. 한국만화산업의 디지털·글로벌·융복합화와 관련해 연구해왔으며 산업 실무와 정책 입안 등의 분야를 두루 거쳤다. 한국애니메이션학회 총무이사 겸 편집위원, 한국예술인복지재단 만화분야 예술활동 심의위원 등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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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트뷰 본문 보기 https://www.snart.or.kr/ebook/2020/20200809_artview.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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