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만화 100년史 '뮤지엄 만화규장각'에서 한눈에
무료신문 노컷뉴스가 창간 3주년을 맞은 올 해는 '한국만화'가 이 땅에 선을 보인지 1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노컷뉴스도 '만화'와는 뗄레야 뗄 수 없는 사이입니다. 매일 아침마다 권범철 작가의 '노컷만평'과 윤서인 작가의 '조이라이드(joyride)'를 통해 독자들과 늘 함께 울고 웃기 때문입니다. 노컷뉴스는 창간 3주년을 맞아 '우리 만화 100주년'을 기념하는 짤막한 만화기행을 준비했습니다. 장소는 경기도 부천에 위치한 한국만화영상진흥원의 'Museum 만화규장각'입니다. 자 이제 함께 떠나보실까요? [편집자 주]
◈ 당신은 아직도 사랑하는 이를 위해 뭐든지 할 수 있는가?
무인도에서 지옥훈련을 마친 '공포의 외인구단'과의 한 판 승부. 9회말 2아웃 1스트라이크 1볼. 타석에 들어선 까치 '오혜성'이 매서운 눈매로 마운드를 응시하고 있다. 이 때 감독이 '타임'을 요청하고 구원투수를 올려 보낸다. 구원투수는 바로 '당신'이다. 귓가에는 야구캐스터의 흥분한 목소리가 요란하다.
만화속 이야기가 아니다. 경기도 부천시 상동에 위치한 'Museum 만화규장각'(www.komacon.kr/museum)에서 매일같이 펼쳐지는 현실이다. 드디어 당신이 야구공을 손에 쥐었다. '까치'와 당신의 피할 수 없는 맞대결. '과연 승부는 어떻게 될까?'
'공포의 외인구단'(이현세 작)은 지난 1980년대 "난 네가 좋아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라는 명대사로 청소년을 물론 성인들까지 '만화의 세계'로 흠뻑 빨아드렸다. 그런데 당신은 그 시절 만화를 읽을 때 다짐처럼 '아직도 사랑하는 이를 위해 뭐든지 할 수 있는가?'
야구장 옆에선 2130년 태백산을 배경으로 '라이파이'와 우주에서 온 '녹의 여왕'의 대결이 숨가쁘게 펼쳐진다. 'ㄹ'자를 새겨 넣은 두건을 쓴 라이파이는 로켓분사기를 등에 메고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며 악당을 물리친다. 레이저광선을 구름에 비추어 영상을 나타내는 홀로그램과 지구와 우주를 오가는 우주왕복선 제비호도 이채롭다.
만화가 김산호 선생이 1959년에 첫 선을 보여 전국 어린이들의 손에 땀을 쥐게 했던 우리나라 최초의 장편 SF 만화 '라이파이'를 재현해 논 것이다.
어린시절 부모님이 부산에서 만화가게를 운영했던 박재동 화백이 지금도 가장 사랑하는 만화가 바로 이 '라이파이'다. 그는 결국 시사만화가가 됐지만, 이 만화를 보고 과학자나 소설가가 된 사람도 적지 않단다.
김산호 선생의 시대를 앞선 상상력은 그 시절 코흘리게 어린이들에게 새로운 꿈과 비전을 선물했다.
◈ 고바우 영감의 1958년 '경무대 똥통사건'
'Museum 만화규장각'은 1970년대 '만화방'도 그대로 재현해 놓았다.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벽을 따라 길게 이어진 딱딱한 나무의자. 그리고 가운데에는 연탄난로 하나가 덩그런히 놓여 있다.
벽에는 만화책들이 빽빽히 들어차 있다. 만화책들이 앞으로 떨어지지 않게 검정 고무줄로 둘러쳐 있다. '수퍼스타 강가딘', '꺼벙이', '주먹대장', '코미디 홍길동', '심술통', '손바닥 위의 사또님'... 배는 고팠지만 순수했던 그 시절 만화책 표지를 보니 옛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그 때 만화책 한 권을 빌려보는데 '10원'이었던가? 아무튼 용돈만 생기면 만화방으로 달려갔다. 속편은 나왔는지, 또 내가 찜해둔 만화책을 누가 먼저 읽고 있지는 않은지 마음을 졸이며 만화방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갔다. '또 여기서 만화 보고 있냐'며 한바탕 꾸중을 듣고 어머니 손에 끌려 나가던 친구의 풀죽은 얼굴도 생각난다.
하지만 우리는 거기서 만화주인공들과 함께 꿈을 꾸고 사랑을 하며 인생을 배워 나갔다.
'만화방'을 나와 어슬렁 어슬렁 걷다보니 저 쪽에 '고바우 영감'이 보인다. 무슨 일일까?
"앗 저기 온다"하며 사내 둘이 바짝 긴장한다. 사내들은 어깨에 지게를 진 채 "어흠"하며 거드름을 피우며 지나가는 이에게 "귀하신 몸 행차하시나이까?"하고 머리 숙여 인사한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고마우 영감이 사내들에게 "저 어른이 누구신가요?"라고 묻는다. 사내들 가운데 한 사람이 "쉿"하며 목소리를 낮추란다. 잠시 후 이 사내가 대답한다. "경무대에서 똥을 치는 분이요"
1958년 1월 23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김성환 화백의 시사만화다. 이승만 정권시절 하늘 높은 줄 모르던 경무대의 위세를 꼬집은 이른바 '경무대 똥통사건'이다.
김성환 화백은 이 일로 국내 시사만화가로는 처음으로 만화때문에 즉결심판에 넘겨져 경범죄처벌을 받았다. 서민의 애환을 따뜻하게 달래며 권력의 부조리를 준엄하게 풍자한 '고마우 영감'은 아직도 우리 안에 살아 숨쉬고 있는가?
◈ 미국 헐리우드에 진출한 한국만화 '프리스트'
'Museum 만화규장각'에서 어린이들에게 가장 인기있는 곳은 '애니메이션 전용 4D영화관'이다. 안으로 들어가 봤다. 영화관에서는 '사비의 꽃'이란 애니메이션이 한창 상영중이다.
한 소년과 소녀가 외적의 침략에 맞서 백제를 구할 수 있는 '신비의 꽃'을 용감하고 지혜롭게 끝까지 지켜낸다는 내용이다.
말을 달리는 장면이 나올 때는 실제로 의자가 흔들리고, 강을 건널 때는 물이 뛰며, 꽃이 흩날릴 때는 향기가 나도록 자동으로 장치가 작동된다. 어린이들은 말똥말똥 눈만 껌벅이며 애니메이션 속 환상의 세계로 푹 빠져들고 있었다.
만화는 그림과 스토리로 구성된 순수예술이지만 대중적인 영상매체로 OSMU(One Source Multi Use) 비즈니스에 가장 적합한 문화산업이다.
현재 만화원작은 애니메이션과 게임, 영화 등으로 활발히 콘텐츠산업 영역을 넓히고 있다. 또한 만화 캐릭터를 활용한 액세서리와 의류, 생활용품 등 '라이선스 비즈니스'와 직접 상품을 기획하는 '머천다이징 사업'을 통해 엄청난 부가가치를 창출하고 있다.
실제로 순정만화 '리니지'는 온라인게임으로 다시 태어나 매출 1조원을 달성했다. 요리만화 '식객'과 '풀 하우스', '궁' 등은 폭발적인 인기를 끌며 영화나 드라마로 제작됐다. 1983년에 태어난 '아기공룡 둘리'는 지금까지 모두 2000여종의 상품으로 판매됐다.
특히 악마와 싸우는 카톨릭 신부 이야기를 다룬 형민우 작가의 '프리스트'는 도쿄팝 코믹스사를 통해 미국 헐리우드에 수출돼 현재 영화로 제작되는 등 만화원작이 미치는 영향력은 대단하다.
하지만 우리 만화산업이 넘어야 할 산은 아직 많다. 박석환 한국만화영상진흥원 콘텐츠비즈니스팀장은 "일부 포털사이트의 과점과 낮은 저작권 보상체계, 불완전한 저작권 보호시스템 등의 문제점들은 하루빨리 해소돼야 한다"고 말했다.
◈ 만화는 '밥'이다
또 다시 이곳 저곳을 둘러보는데 어디선가 한 여성의 나긋나긋한 전화음성이 들려왔다. 1980년대 대표적인 월간 만화잡지였던 '보물섬' 편집기자의 목소리였다.
"선생님~ 보물섬 권기자예요. 왜 전화 안받으세요. 내일이 마감이신건 아시죠. 지난 번처럼 늦으면 절대 안돼요. 저 인쇄소에서 욕 바가지로 먹었다구요. 편집장님도 화가 머리 끝까지 나셨구요. 혹시 지금 주무시는 거 아니죠. 만약 이번에도 늦으시면 저 처녀귀신이 돼서 평생 괴롭힐거예요!"
만화가가 잠든 사이 궁금했던 그의 머릿속에 들어가 무한 상상력을 체험해보는 코너다. 항상 마감시간에 쫓기며 새로운 이야기와 인물들을 만들어내는 만화가의 머릿속에는 정말 뭐가 들어있을까. 다행히 'Museum 만화규장각'에서 몇몇 유명 만화작가들을 다큐멘터리를 통해 만날 수 있었다.
15세때부터 숨을 거둔 67세까지 한 번도 펜을 놓지 않았던 故 고우영 화백. '풍자'와 '해학'은 결코 그와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다. 그는 마치 '숨은 그림 찾기'를 하듯 자신의 작품 속에 '비딱함'을 숨겨 놓았다.
허영만 화백은 '만화 그리기'를 '자전거 페달 밟기'에 비유한다. 자전거도 페달 밟기를 멈추면 곧 쓰러지듯 만화도 며칠 쉬면 그림이 안그려진다는 것이다. '철저한 자기관리를 통한 쉼없는 전진'이 만화에 대한 그의 철학이다.
만화가 황미나씨에게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 일은 '만화 그리기'다. 때문에 지금까지 '성공'이나 '돈'을 위해 애써 그림을 그리지는 않았단다. 그녀는 아직도 "자신은 21살"이라고 말한다.
만화가 강풀은 외로운 인물을 늘 작품에 등장시킨다. 편견과 오해로 우리 사회에서 소외된 이들을 따뜻하게 보듬어 주고 우리의 얼어붙은 마음을 '사랑'과 '용서'로 치유하는 것이 그의 소망이다.
만화박물관 기행을 마치고 막 나서려는 데 문득 아까 들어올 때 입구에서 본 글귀가 떠올랐다.
"만화는 밥이다. 만화는 어렵게 획득한 또 하나의 언어이기 때문에 먹어도 먹어도 또 다시 내게는 배가 고파지는 밥과 같다."
공포의 외인구단을 살아 숨 쉬게 한 이현세 화백의 말이다.
[데일리노컷뉴스 변이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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