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 판의 변화에 맞춰 협회 임원진 쇄신에 성공
과열된 세대 간 갈등을 해소할 수 있는 포용의 리더십 필요
새로운 시대적 요구에 맞는 사업과 함께 표현의 자유 사수해야
들어가며
지난 2014년 1월 29일 (사)한국만화가협회는 부천시청 어울림마당에서 정기총회 및 임원선거를 진행했다. 선거를 통해 임기 3년의 26대 회장으로 만화가 이충호(1967년 생)가 선출됐다. 모든 임원진을 선거로 뽑는 회칙에 따라 부회장 선거를 통해 엄재경·윤태호·정재홍·조원행 작가가 선출됐고 이사로는 강풀·김수용·신영우·송래현·임덕영·원수연·정철 작가가 선출됐다. 정관 개정을 통해 만화장르별 분과가 신설됨에 따라 각 분과에서 지명한 노명희·연제원·이동규·이종규·조재호·홍용훈 작가가 당연직 이사로 합류하면서 임원단 구성이 완성됐다.
회장으로 선출된 만화가 이충호(출처 : 한국만화가협회 홈페이지)
이번 임원선거는 지난 선거에서 볼 수 없었던 상황이 여럿 도출되며 만화계 내외부 인사들의 걱정을 사기도 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역대 가장 많은 만화가들이 참여한 선거, 가장 화제가 많았던 파티로 마무리되며 새집행부에 힘을 실어줬다. 선거 결과는 항상 어떤 의미를 도출시키고 나름의 시사점을 만들어낸다. 이번 선거의 경우는 크게 ①경쟁체제의 와해 ②세대 간 갈등 과열 ③SNS시대의 트랜드 반영 등으로 정리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1. 경쟁 체제의 와해
한국만화가협회는 여러 분야에서 활동 중인 만화가들의 모임이다. 협회의 구성이 분과체제로 재편된 것처럼 직전까지의 만협은 캐리커처부터 극화까지, 아동만화부터 성인만화까지, 신문연재부터 단행본만화와 스토리작가까지. 어찌 보면 ‘한 가지’라고 볼 수 있지만 세세하게 보자면 전혀 다른 그룹의 연합체라 할 수 있었다. 활동무대가 다른 만큼 사회적 인식과 만화에 대한 관점이 제각각이었다. 여기에 연령대와 계파, 친소관계까지 따지다 보면 '만화가'라는 직명을 같이 쓰고 같은 지붕 아래 있는 것이 부담스러운 지경인 이들도 있었다.
회장으로 입후보한 만화가 강촌(출처 : 구글)
역사적으로도 만화계는 50~60년대부터 대한만화가협회와 현대만화가협회로 나뉘어서 서로 대립했고 각기 다른 목소리로 사회적 이슈에 대응해 왔다. 이런 나누기 문화는 70~80년대 창작만화가회, 90~2000년대 바른만화가회, 젋은작가모임, 여성만화가협회 등으로 이어져 왔다. 물론 이 같은 나누기 문화는 당대에 새로운 활력이 되기에 충분했고 그만한 사회적 명분과 성과를 만들어냈다. 이를 최근 세대까지로 연결시켜 단순화하자면 잡지를 중심으로 한 연재만화가 그룹이 있고 대본소를 중심으로 한 단행본만화가 그룹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양대 계파는 한국만화가협회라는 하나의 테두리 안에서 각 계파를 대표하는 만화가를 협회장 후보로 내세워 왔다. 시이소 게임을 하듯 균형을 유지해왔던 이 같은 흐름은 25대 회장 선거에서 강촌(1950년 생) 후보가 조관제 후보에게 4표차로 석패하고 26대 회장 선거에서는 강촌 후보와 하승남(1958년 생) 후보를 이충호 후보가 크게 따돌리면서 현실적으로는 와해된 양상이다.
회장으로 입후보한 만화가 하승남(출처 : 구글)
강촌 후보는 대본계를 대표하는 만화가 중 1인으로 이번 선거기간중 대중적 지지도가 낮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지만 80년대 대본소를 중심으로, 90년대에는 스포츠신문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중진이다. 협회의 이사로, 부회장으로 그간 꾸준히 활동해 온 만큼 그동안의 협회 정서로 볼 때는 '차례가 됐다'는 인식이 강했을 것이다. 같은 계파로 볼 수 있던 하승남 후보 역시 선거가 과열국면으로 치닫는 상황에서 불현듯 입후보하면서 '우리 차례다'라는 점을 강조하는 듯 했다. 그런데 이 '정서'가 오히려 반대표를 결집시키는 결과로 이어졌다.
2. 세대 간 갈등 과열
25대 선거 때 카투니스트 출신이면서 부천을 중심으로 만화진흥정책에 입지를 지니고 있던 조관제 후보가 당선되면서 기존의 양대체제는 더 이상 작동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맞다. 즉, 더 이상 만화계가 연재만화와 단행본만화 또는 연재매체의 영향력과 대본소의 영향력 안에 있지 않다는 점을 분명히 한 것이다. 거기에 더해 이번 선거에서는 코믹스만화계의 인기스타로 학습만화계와 웹툰만화계로 활동의 폭을 넓혀온 이충호 후보에게 표몰이 현상이 벌어졌다. 선거를 전후로 웹툰만화가 그룹이 대거 협회에 가입하면서 예견된 상황이기도 했지만 기존의 협회원들 역시 기존의 양대체제 관점에서 탈피해 상당수가 이충호 후보를 지지한 것으로 보인다.
만화계에 파쟁이 있어 만화가협회에서 빠져 나온 일군이 있다는
1956년12월15일 자 동아일보 보도. 이후 현대만화가협회가 발촉됐다.
문제는 이번 선거가 기존 체제 안에 위치해 있는 기존 협회원들과 신체제 안에서 협회원이 된 이들 사이에 보혁 갈등, 세대 간 갈등을 심화시켰다는 점이다. 활동 무대가 다른 만큼 장르나 유통망에 따라 만화에 대한 다른 인식을 지니고 있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인식의 차이로 비롯되는 내부적 갈등과 세대나 연령을 구분하여 표면화된 갈등은 전혀 다른 무게를 지닌다. 전자가 상호 존중을 전제로 한 긍정적 갈등의 양상이라고 볼 수 있다면 후자는 편가르기에 불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역시 어제 오늘 일은 아니다. 60년 전에도 이 같은 갈등은 존재했고 결국 만화계는 양대 협회로 분화되기도 했다. 어떤 계파의 주장이 옳고 그르다는 점을 떠나서 반대의 목소리를 안고 가는 것이 사회이고 양쪽 날개로 날아야 하는 것이 협회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아쉬운 대목이다.
스포츠서울에 연재된 후 대본소용 단행본으로 발행된 강촌의 대표작 [혈맥]
물론 입후보 자체가 기성과 신성으로 판이 짜였기 때문에 선거운동 역시 정책공약보다는 연령대가 비슷한 투표권자에게 어필하고 그만한 입후보자에게 지지의사를 분명히 한 것도 당연한 귀결이라 하겠다. 만화계의 여러 층위에서 걱정한 대목도 이 부분일 것이다. 이는 세대간 분파주의의 양상을 보였고 선배만화가들의 서운함도 이 부분에서 강화됐다. 연배가 비슷한 입후보자간의 대립도 선거 후의 화합이 걸림돌이 되는 터에 연배 차이가 확연한 상황에서 승자와 패자가 나뉘는 선거가 개운할리 없다. 선출된 회장과 임원진은 협회 업무를 인수인계 받고 협회의 체제를 다지는 한편 승자로서가 아니라 선후배 협회원으로서 서운함이 남아있을 협회원들을 강하게 끌어안아야 할 것이다. 또한 반대표를 던진 이들의 회장이기도 한만큼 그들의 견해와 입장을 수용하는 지혜와 균형감각도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3. SNS시대의 트랜드 반영
이번 선거는 다른 어느 시기의 협회장 선거보다 더 뜨거웠다. 참여율도 역대 최대였다. 대면과 전화, 기껏해야 메일 정도가 전부였던 시기의 협회장 선거와는 전혀 다른 수단이 등장하기도 했다. 만화가들이 자주 들르는 각종 카페와 커뮤니티 사이트의 게시판, 블로그,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등으로 선거운동이 진행됐다. 팟캐스트를 활용한 선거방송이 진행되기도 했고 한 후보는 유튜브 동영상을 직접 제작해 활용하기도 했다. 전에 없던 방식이었다.
일본 잡지를 통해 연재되어 코믹스 단행본으로 발행된 하승남의 대표작 [삼국지] 중 한 장면
직접 관계자들 외에는 알 수 없었던 선거운동의 과정이나 전개 국면이 인터넷 상에 생중계 됐고 판세를 읽기에 충분할 정도의 코멘트가 고스란히 공개됐다. 굳이 뚜껑을 열어보지 않아도 좋을 만큼 선거의 지지세가 감지되기도 했다. 실명을 내걸고 하거나 익명이라 하더라도 조금만 찾아보면 누구인지 알 수 있는 협회원들이 공개적 지지를 선언하고 타인의 지지를 독려하는 것은 확실히 전에 없던 형태였다. 하지만 이 과정 속에서 어떤 이는 상처를 입었고 어떤 이는 분노하기도 했다. 이 같은 흐름에 염증을 호소하며 이탈한 이도 있었다. 지지의사 표현이야 자유롭게 해야겠지만 부절적한 비난과 비방은 제한되어야 할 것이다.
다음 만화속세상에 연재되며 한국형 그래픽노블로 불렸던 이충호의 대표 웹툰 [무림수사대]
하지만 이 같은 열성적 지지와 참여의 흐름은 우리 만화계가 소중히 가꿔야할 자산임에 분명해 보인다. 선거 시기에만 집중적으로 표출되는 관심이 아니라 이를 협회사업과 활동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가려는 의지와 노력이 필요해 보인다. 참여와 공유, 소통은 그간 협회에서 찾기 힘든 부분 중 하나였다. 정보가 공유될 때 참여는 있는 것이고 참여가 활성화 될 때 소통은 큰 힘이 될 수 있다. 몰라서, 관심이 적어서, 시간이 없어서 굳이 챙겨보려 하지 않았던 것이 협회 일이라는 생각보다는 점 더 적극적으로 알리고, 관심을 요구하고, 시간을 할애할 수 있도록 하는 SNS시대의 협회 운영 방안이 절실해 보인다.
선출직이라고는 하지만 협회장 자리는 '이익보다는 손해가 많을 것이 분명해 보여서‘ 형편이 괜찮은 저명 작가가 ’봉사‘하는 자리로 알려져 왔다. 특히 '회비 수익을 통한 운영'이 기초가 되는 사단법인은 회비가 곧 운영비가 된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회비수급이 쉽지 않은 관계로 회장이 협회 운영비를 후원하고 각 임원진이 각출하는 방식을 취해왔다. 그러다보니 선거철이 되면 입후보군이 드러나면서 경쟁구도가 만들어지기도 했지만 대체로 '임원진의 추대와 후보자의 수락에 의한 선출'이라는 흐름이 존재했다.
이전보다 회원이 많아지고 운영재원이 늘었다고 하더라도 회비 수납 상황이 전보다 좋아질 것이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 여전히 회장과 임원진의 각출이 예상된다. 하지만 이 같은 방식은 건전한 협회 운영과 발전을 위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있다. 그렇다고 운영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협회가 수익사업을 주도적으로 벌이는 것 역시 바람직하지 않다. 비영리단체인 사단법인의 수익사업은 의도적이거나 일회적이기 보다는 자연스럽고 지속적인 것이 좋다. 또 이를 위해 만화진흥을 목적으로 하는 정부부처와 관련 기관과의 협력을 통해 고정사업비를 유치하는 형식 역시 자연스러워 보이지 않는다. 협회는 정부부처와 관련 기관의 지원사업 수혜자라기보다는 수혜 받아야 하는 협회원들을 위한 감시자로서의 역할에 충실해야하기 때문이다.
결국 협회의 사업은 원칙에 충실 하는 것 밖에 없다. 협회는 회원의 권익증대를 위해 활동하고 회원은 회비 납부의 의무를 지니고 협회는 이를 통해 운영되는 것이 원칙이다. 회원들이 회비를 내어야 하는 상황을 자연스럽고 지속적으로 만드는 사업. 그런 상황을 만들 수 있는 사업. 협회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사업을 논의하고 연구해서 실현 시켜가야 할 것이다.
새 집행부에 딱 3가지만 요청한다면
1) 협회의 기본은 회원관리
현재 한국만화가협회에는 1200명이 넘는 회원명부가 있다. 신규 가입분도 있지만 갱신되지 않은 정보도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협회의 힘은 회원으로부터 나온다. 그리고 회원에 대한 정보가 명확해야 회원의 권익증진 요소를 찾을 수 있고 만화진흥의 미래를 설계할 수 있다. 회원신상정보, 회원작품정보, 회원창작활동실태조사는 협회가 수행해야할 첫 번째 내부 쇄신방안이 될 수 있다. 기실 세부적인 신상정보를 제외하면 한국콘텐츠진흥원과 한국만화영상진흥원은 유사한 데이터를 생산하거나 관리할 수 있는 형태의 사업 항목과 예산을 확보하고 있다. 이를 위탁받아 수행하거나 진행과정에 관여하고 공유하는 형태로 얼마든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2) 회원의 생애주기에 따른 사업
협회의 사업 추진 역량을 어느 세대에 맞춰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세부적 논의가 필요할 수 있다. 하지만 거시적 관점에서 협회는 회원을 중심으로 운영되어야 하고 회원의 연령에 따른 세부 사업항목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가령 협회의 구성원을 원로, 중진, 신예로 나눌 수 있다. 원로를 위해서는 그간의 공로를 기리는 한편 수입단절 부분을 해소해 줄 수 있는 복지 측면의 사업항목이 필요하다. 중진을 위해서는 과거 또는 현재의 활동과 역할을 강조하는 한편 경력단절을 방어할 수 있는 형태의 사업항목이 필요하다. 신예의 경우는 정보 공유와 기술 교류를 중심으로 저작권, 세무, 국제계약 등 실무적 차원의 교육 및 행정지원 측면의 사업항목이 필요해 보인다. 물론, 협회의 한정적 예산으로 이 같은 사업항목들을 주도적으로 실효성 있게 추진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공공자금이 유입되는 각급 기관을 중심으로 유사개념의 목적사업들이 시행되고 있는 만큼 이를 협회의 필요와 요구에 맞게 조정 시행될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은 충분히 실행할 수 있다. 새로 출범한 부설 만화문연구소가 이 같은 정책적 제언을 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신규 임원진은 이를 널리 주장하고 조정할 수 있을 것이다.
3) 표현의 자유가 창작자 협회의 정체성
기실 26대 협회 출범의 전초에 웹툰심의 문제가 있었다. 조선일보의 웹툰시비로 촉발된 이 논란은 일련의 웹툰작가들을 분노하게 만들었고 조선일보의 시비에 적당한 액션이 필요했던 방송통신윤리위원회는 협회와 웹툰심의를 위한 업무협약을 맺는 사진 한 장으로 자신들의 책임을 ‘퉁’ 쳐버렸다. 협회와 웹툰작가들 사이에서는 이것이 ‘심의질’에 대한 만화계의 연합반격이었고 웹툰의 승리로 기억할지 모르겠다. 물론 그만한 역할들이 있었고 그 것이 노고에 대한 성과이자 상식적 판단의 승리일 수 있다. 하지만 ‘일’로서만 이를 본다면 아쉬운 부분이다. 조선일보도 방심위도 이 부분을 ‘일’ 이상으로 처리하지 않았다. 언론이 문제를 제기하고 책임이 있는 기관이 이를 시행하겠다고 나섰는데 민간이 우리가 하겠다고 하니 그들 입장에서는 손 안대고 깔끔하게 ‘일’을 완수한 셈이 됐다. 조선일보의 문제제기에 협회가 응답했고(비판적일지라도) 방심위의 귀찮은 책임도 협회가 껴안았다. 물론 당시 상황은 방어가 필요했던 전시태세였다. 기관이 함부로 휘둘러 상처를 입힐 수 있는 칼자루를 빼앗아 와야 했던 상황인 것도 맞다. 하지만 만화계가 스스로 칼을 쓰겠다고 한 것은 오판이다. ‘자율심의’가 아니라 ‘자해심의’가 될 수 있다. 건전한 창작풍토를 조성하는 것은 창작자 협회의 몫이 아니다. 국가나 이를 통해 이익을 취하고자 하는 기업의 몫이다. 창작자 협회는 창작자의 자유로운 창작활동을 옹호해야 하고 그들이 지닌 고유한 정체성인 표현의 자유를 변호해야 한다. 방심위의 책임은 방심위에 주고 우리사회가 적절하지 않다고 보는 표현물이 유통되고 있다면 그 책임은 유통기업에 주면 될 일이다. 창작자는 그 다음이다. 그 때문에 창작자가 문제에 처하고 표현의 자유가 심각한 위협을 받고 있다면 그 창작자를 옹호하고 변호하면 된다. 대안은 그들이 마련하는 것이다. 협회의 유일한 목적은 표현의 자유를 사수하는 것이지 표현의 수위를 조정하고 협의하는 것이 아니다. 한국만화사는 ‘자율’이 ‘어용’이었다고 분명히 적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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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하, 26대 만화가협회 회장 및 임원 선출과 지난 2년의 경과 http://comixpark.pe.kr/130184419616
김낙호, 만협에 바라는 7가지 http://capcold.net/blog/108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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