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석환, 만화가 이두호 인터뷰, 조선을 그린 이두호, 씨엔씨레볼루션, 2013.12.06

조선을 그린 이두호, 만화계의 큰 바위 얼굴 이두호

 

인터뷰를 위해 세종대학교로 향했다. 공식적으로는 정년이었지만 학교측의 배려로 교수 연구실을 그대로 쓰고 있다고 했다. 작업은 학교 인근에 별도로 마련한 작업실에서 했고 주에 한 두 차례 연구실에 나와서 창작 실기 수업을 진행한다고 한다.

 


‘째마리’에 담은 희망 ‐ 스포츠신문 사건 이후

박석환(이하 석) : 97년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이두호 만화 인생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분기점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두호(이하 이) : 97년에는 화나는 일 밖에 없었어. 이거 왜 이러나 싶기도 하고, 내가 뭔가 싶기도 하고. 만화 그리면서 죄짓는다 생각 안 하는데. 검찰에 불려가 취조 당하고 지장 찍고 하다 보니까 ‘이러는 게 아닌데’ 하는 생각만 들더라고. 죄 안 지었는데 죄지은 것처럼 대하니 기분 나쁘더라고. 진짜 나쁘더라고.

이두호는 일순간이지만 강한 분노를 표했다. ‘진짜 나쁘다’는 그가 평소 생활에서 선택할 수 있는 매우 강한 ‘욕’ 처럼 들렸다. 그의 성정은 그만큼 순했다.

 

 석 : 청소년보호법이 그 해 3월에 실행됐지요. 청소년 보호를 위해 음란성 매체의 유통을 통제한다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고. 사실 ‘음란 폭력성 조장 매체 대책 시민 협의회’는 그 이전부터 스포츠 신문을 고소하고 불매 운동을 지속적으로 해오던 단체였는데 기사, 사진, 광고에 대해서 문제제기를 하다가 만화와 만화가를 한꺼번에 고발 한 거죠.  

5월에 조사를 받았고 7월에 ‘만화 표현 수호를 위한 범 만화인 비상 대책 위원회’가 결성됐습니다. 8월에 검찰이 14명의 만화가를 기소했고요.  

선생님 연표를 정리하다 보니 97년 이전과 이후가 구분됐습니다. 97년 이전이 작품 목록 중심이었다면 97년 이후는 직책과 각종 상 이름 중심이던데요. 당시 사건으로 인해 작품 활동이 위축되었던 건 아닌가요? 

 

이 : 나는 뭐 심의 때문에 작품 활동에 영향 받은 거는 없었어. 하고 싶은 것은 했으니까. 또 이전에는 잡지에서만 작품을 했으니까 심의가 없었지. 그때는 단행본만 했거든.  

그런데 어느 날 [소년중앙]에서도 심의를 받기 시작했어. 내가 하던 게 <뛰어야 벼룩이지>였는데 이 제목을 못 쓰게 하더라고. 나는 이 제목 아니면 안 된다 했고 담당한테 네가 알아서 하라고 했지. 그래서 결국 그대로 했지. 그 때 힘 있는 양반들이 이래저래 하던 때인데 ‘그래 봤자지’ 정도로 들렸던 모양이지.  

그래서 심의실에서 알아서 빼려고 했던 가봐. 또 한번은 대사 중에 ‘야 이 공부벌레야’하는 게 있었는데 편집부에서 심의실에 가져갔더니 이걸 못 쓰게 한다는 거야. 기가 막혔지. 그게 그냥 너무 공부만 하는 캐릭터라 나가서 좀 놀라는 의미로 상대가 했던 대사인데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 이런 게 미치는 거지.  

걸렸다는데 잘 모르겠는거야. 그러면 나중에 자기검열 같은 걸 하게 된다고. 97년도에 검찰 가서 조서에 지장 찍고 온 뒤로 진짜 신경질 나더라고. 그리고 만화가들이 절필을 선언했었지. 하도 화가 나기도 하고 그 때는 더 하기도 싫더라고. 나는 신문에 더 못 그리겠다는 만화를 발표하고 두 달 가량 안 그렸다가 신문사에서 다시 하자고 해서 했지. 스포츠신문이 만화 없으면 안되잖아.  

그러다가 2003년에 <파행>이라는 작품을 하자고 해서 다시 시작했다고. 문하에 있다가 데뷔한 강희우가 많이 도와줘서 했지. 그런데 이런 게 있다고. 연출도 선택인데 이렇게 저렇게 해보다가 자신도 모르게 표현을 막으려는 마음이 생기는 거지. 그래도 해야 하는 건 포기하지 않았다고. 그런 것에 위축 받아선 안되지.  

 

당시 진행한 '만화 표현의 자유를 위한 범국민 서명 운동'을 위한 성명서

http://reocities.com/CapitolHill/lobby/5404/declare1.html

 

석 : <파행>은 <임꺽정>의 후속편 격이었죠. 임꺽정의 아들 차손의 삶을 다룬 것이었는데요. 이순신과의 우정, 남치근 아들 이야기 등 흥미로운 소재가 많았습니다만 차손의 귀환으로 급하게 연재가 끝나서 말들이 많았어요.  

이 : 지금 생각해보면 한 2년 가량은 연재해야 됐던 작품인데 신문사에서도 1년만 하자고 했고 나도 1년만 하고 싶었어. 그래서 내 나름대로는 그렇게 마무리를 한 거지. 제대로 완결됐다고 볼 수는 없다고. 단행본 내자는 출판사가 있었는데 이건 안 된다고 했지.

석 : 다른 인터뷰에서 ‘55세 은퇴’를 언급하신 적이 있는데요. 심경대로라면 <째마리>까지가 1일 연재극화를 할 시기였던 건 아닌 가요. 또 과거에는 한번 했던 소재 중에서 미진한 부분들을 새롭게 작업하기도 했는데요. 

이 : 이건 잘 모르겠어. 연재를 여러 개 하던 시절에 마누라한테 ‘55세까지만 만화 그리고 그 뒤에는 안 그렸으면 좋겠다’고 했지. 내가 심각하게 말하니까 아내도 심각하게 ‘아이들 시집, 장가 갈 때까지는 하라’고 하더라고. 허허허. 지금은 뭐 다 보냈다고.

석 : 스포츠신문 사건 전후로는 작품 외적 활동으로도 바쁘셨잖아요.

97년 스포츠신문 연재만화의 검찰 기소 사건 때 이두호는 다른 작가들이 불구속기소, 약식기소 처분을 받은 것과 달리 기소유예 처분을 받는다. ‘죄가 있지만 죄가 약해 검사가 처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후 이두호는 만화인들과 함께 거리로 나갔다. 기소유예를 받은 터라 당사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이 더 분했던지 다른 만화가들을 대표해 검찰의 부당성에 대해 따졌고,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사회에 닥칠 위기를 온 몸으로 알렸다. 곧이어 터진 만화가 이현세의 <천국의 신화> 사건 때도 이두호는 자신의 일처럼 나섰다.

 

‘파행’을 이겨낸 원칙 ‐ 교수, 단체장, 기관장 시절

 

이 : 다 학교부터 시작됐지. 96년에 세종대학교에서 연락이 왔어. 박세형 교수가 찾아와서 꼭 좀 맡아 달라고 하는 거야. 나는 못하겠다고 했는데 그러면 누구를 추천해달라고 하는 거야.  

그래서 처음에 허영만씨하고 김수정씨한테 요청을 했지. 영만씨는 씨도 안 먹히고 수정씨도 ‘형님 미쳤어요’ 그러는 거야. 그래서 나도 안 한다고 하다가 다음 해에 또 하자고 하는 거야.  

그래서 이현세한테 이야기했지. 그랬더니 ‘형님이랑 같이 하면 하지요’ 그러는 거야. 그래서 시작한 거지. 처음 할 때는 작품 하던 것도 있었고 한편 연재하는 정도의 시간을 쓸 수 있게 해달라고 학교 측에 말했었지. 그런데 이후로 아무것도 아닌데 내가 꼭 해줘야 하는 일이 너무 많은 거야. 안한다 안한다 했는데 자꾸 하라고 하니까 하게 된 거지.  

 

석 : 얼마 전 나온 신간이 <이두호의 가라사대>인데요. 오래 전부터 해오셨던 작업의 연속이라고 알고는 있습니다만. 만화 독자들에게는 잡지 [팝툰]에 연재를 하면서 알려졌죠. 이두호의 대하서사극, 스포츠신문 연재만화를 기대했던 독자들에게는 아쉬운 컴백작이기도 했어요. 

이 : [대학입시]에 연재하던 시절에는 우리 역사 속에 담긴 짧고 재미난 이야기를 해보고 싶어서 했던 거지. 그런데 내가 강의를 하다 보니까 학생들한테 보여주고 싶은 욕심이 생기더라고. 외국에 나가보면 우리가 보는 만화와는 전혀 다른 만화들이 많잖아. 그래서 그걸 슬라이드로 보여주기도 하고 그랬는데 내가 직접 작업해서 보여주고 싶더라고.  

매일 같은 도구로 작업하는 게 아니라 나 스스로도 작품의 내용에 따라서 새로운 재료와 도구를 사용해보고 싶기도 했고 학생들한테 그런 방법들을 보여주고 싶기도 했어. 그러기에는 이렇게 짧은 이야기들이 좋을 것 같았고. 그래서 예전에 연재했던 컨셉트로 야사에 있는 이야기들을 끄집어내서 그리기 시작했지. 하고 싶은 데로 재료랑 도구를 선택하고 그랬더니 어떤 것은12페이지 그리는데 1년씩 걸리고 그랬어. 그래도 지치면 안되니까 천천히 하자고 그랬지. 그런데 [팝툰]에서 그걸 연재로 하자는 거야.  

조금 그려둔 것이 있었지만 연재 속도를 맞추기에는 턱없이 부족했지. 그래서 연재 시작하면서는 하고 싶은 만큼 못하기도 했다고. 그래도 책으로 묶은 것은 12가지 기법을 활용했어. 내 강의는 실기 수업이니까 학생들한테 좋은 사례가 되고 자극이 되면 좋겠다 싶지. 오히려 내가 학생들한테 많이 배웠어. 그만큼 주고 싶다고. 

 

석 : 교수직을 수행하시면서 여러 직책을 맡으셨어요. 만화가협회장 하신 이후로 협회 살림 규모가 커졌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협회 이끄실 때 어떤 슬로건 같은 것이 있었나요.  

이 : 협회장 맡으면서 인사말 할 때 그랬다고.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게 한가지 있는데 ‘모르면 묻는 거다’ 그랬어. 난 잘 묻거든. 그리고 만화가협회가 뭐 하는 데야 했더니 ‘만화가를 위해 있는 거다’ 그러더라고. 그럼 ‘만화가들에게 도움되는 일을 하겠다’ 했지. 그리고 나서 능력 없는 사람이 일하니까 이사들보고 도와 달라고 했지. 대신 내가 하는 작업보다 이 일이 우선이다 했지. 누가 만나자 하면 만나자. 거절하지 말자. 그리고 협회 일하는 사람은 굶기지 말자 했지. 그렇게 시작했어.  

그때 내가 살면서 만났던 사람들보다 더 많이 만났다고. 또 이사들한테 나 돈 가져올 때 없으니까 이사들보고 돈 내 놓으라 그랬지. 그때 고행석씨가 매달 60만원씩 찬조를 해줬다고. 고마웠지. 또 벽산그룹에서 사무실을 빌려줬는데(현 동양물산기업 김희용 회장이 당시 만화가협회 명예회장이었다) 이걸 빼야 하는 상황이 된 거야. 그래서 만화가들한테 그림 한 장씩 그려서 내라고 했어. 이걸로 8폭 병풍을 만들어서 김희용 회장을 만났지. ‘내가 오늘 아부를 좀 해야겠다’ 그러고 병풍을 내놓으니까 좋아하더라고. 사무실을 더 써야겠다 했지. 그래서 거기 더 있게 됐어. 자존심 상하는 일도 많았지. 연재를 해야 하니까 시간도 없었고. 그런데 부르는 곳도 많고. 한번은 불렀는데 거절을 했어. 그런데 앉아있으려니 걱정이 되는 거야. 그래서 다시 찾아가서 잘못했다 그런 적도 있었다고. 그러니까 상대방이 웃더라고. 허허허.  

사실 이런 게 잘 안돼. 마음은 있는데 내가 정상적인 회사생활이나 이런 것을 해본 것이 아니라 인간관계가 서툴지. 한번은 도올 김용옥 교수가 만나자고 몇 번했는데 그때마다 못 만났어. 세 번 미루고 나니까 미안하잖아. 그래서 몇 년 전엔가 연초에 김교수 캐리커처를 그렸어. 선물 주려고. 그런데 아직 못 보냈어. 저기 들었다고. 개인적인 일로는 이런 게 잘 안 되는 거지. 그나마 협회장 할 때는 내가 아니고 협회장이니까 거기에만 집중했지. 그 다음에 김수정이한테 넘겼는데 그 때 통장에 1천8백 만원 남겼다고. 그랬더니 이희재가 그러는 거야. ‘아이고 돈 남길 줄도 아네’하는 거야. 허허허. 

석 : 부천만화정보센터 이사장 시절은 어땠나요.  

이 : 부천 할 때도 난 잘 모른다고 했지. 뭘 해야 하느냐고 하니까 만화계와 센터가 조화롭게 일을 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해서 그렇게 하겠다고 했지. 월에 세 번 정도 부천에 내려가서 현안을 챙기고 그랬지. 그런데 이렇게 일해보면 뭔고 하니 좀 양보하면 될 것 같은데 그게 잘 안 되는 거야. 공무원들도 우리를 이해해 줘야겠지만 우리도 공무원들을 이해해줘야 하는데. 그러면 더 잘 될 것 같아.

 

당시 부천시장이었던 국회의원 원혜영과 이두호, 부천타임즈

 

석 : 관의 관심과 도움만큼 기대도 컸지요. 많이 달라졌고 발전했지만 기대만큼 우리 만화계가 좋아진 것 같지는 않아요. 

이 : 이렇게 생각해보면 관이 많이 해줬다고. 관의 도움이 많았어. 그런데 왜 이럴 까. 많이 고민해 봤는데 요즘 생각은 작품이 없는 거 같아. 왜 없나. 난 잘 모르겠는데 예전 같은 그런 작품이 없어. 현세처럼 이끌어주는 만화가 없는 거지.  

만화가 책임이야. 관이 해줄 수는 없고 만화가들이 만들어내야 하는데 방법이 없어. 미디어 환경이 변하잖아. 여기에 맞춰서 뭔가 다른 것이 나와야 하는데 그게 안돼. 관이 해주는 것은 어떤 풍토를 조성해주는 거겠지. 요즘은 이런 생각도 해봐. 차라리 잘하는 사람 집중적으로 지원해주는 것은 어떨까 싶어. 세계적으로 키워주는 거지. 그런데 다수에게 나눠줘야 하다 보니 효과가 크지는 않은 거 같아.  

석 : 선택과 집중은 관의 해법 아닙니까. 공평하지 않을 수 있잖아요. 

이 : 나는 거기에 공감한다고. 이거 저거 많이 해봤으니까. 안 한 걸 해야 하는데 그게 또 쉽지는 않겠지. 결국 다시 만화가들 책임이지. 우리가 작품으로 해내야 한다고. 

석 : 만화계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요직을 거치셨어요. 제정된 만화 관련 상도 다 받으셨고. 훈장 이야기 좀 해주세요.  

이 : 허허허. 안 할 거 같은데 응큼 하게 다 했네. 어느 날 희재가 ‘많이 컸네’ 그러는 거야. 그래서 ‘많이 컸다 우짤래’ 그랬지. 교수하고 협회 일하고 그러다 보니까 거절 못하고 연결되어서 그렇게 된 거지. 보관문화훈장 받을 때 문화에 끼친 영향이 많다 어쩌고 하는데 참 미안 터라고.  

어느 자리에선가 나가서 그랬다고. 만화가들한테도 이런 훈장을 줘야 한다고. 2002년에 김종래 선생님이 첫 훈장을 받게 된 거야. 내 경우에는 하지 말라고 했는데 협회에서 추서해서 2007년에 받은 거지. 이 훈장을 김종래 선생님, 고우영 선생님, 박기정 선생님이 받았지. 올해 산호 선생님이 받았고. 맘이 무겁지. 고생한 사람이 얼마나 많아. 빚이다 그러는 거지.  

 

평생의 업으로 삼았던 작품활동에 대한 평가가 ‘음란물 기소’라는 결과로 돌아왔을 때의 혼란스러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터. 이후 ‘글그림 이두호’라는 타이틀보다 단체나 기관 명의의 직책을 단 이두호의 모습을 더 많이 보게 됐다. 아쉽기도 했지만 스스로 재주 없는 사람이라 꼭 필요한 한가지라도 잘하려 했다고 말한다. 파행 중에도 꼭 필요한 것을 찾아 길을 만드는 사람의 아름다운 원칙이다.

 

‘바람소리’를 듣다 – 초기 작품 활동 시절

 

석 : 스승과 제자가 훈장을 받았어요.  

이 : 그러네. 박기정 선생님이 ‘네가 압력 넣었나’ 그러는 거야. 아니 내가 그럴만한 위치도 아닌데 선생님은 그때 내가 이거 저거 하고 있으니까 힘 좀 썼겠다 싶었던 가봐.

석 : 박기정 선생님 문하에는 1년 간 있었어요. 굉장히 짧은 편인데요. 

이 : 들어갔을 때 바로 데생을 했다고. 사실 1년이 짧은 시간이었는데 너무 많은 걸 배웠지. 잡아 앉혀놓고 하나하나 가르쳐 주시지는 않았지. 그런데 선생님이 주신 스토리를 보고 데생을 하려니까 그게 다 공부인 거야. 아 이야기를 이렇게 푸는 구나. 복선은 이렇게 까는 구나 하는 것이 다 공부였어. 그때 같이 있던 친구들이 김마정, 이우정, 최덕규라고. 이상무는 박기준 선생님 문하에 있었는데 나 있기 전에 우리 화실에 있었고. 그때 다들 날렸지.

석 : [소년중앙]을 통해 곧 데뷔하셨는데요. 요즘 인터넷 만화수집가들 사이에 그 시절 만화책을 모으는 것이 유행입니다. 선생님 작품도 많이 있고요. 우선 <타이거마스크>가 궁금합니다. 카지와라 잇키가 스토리를 쓰고 츠치 나오키가 그렸던 68년 작품인데요. 

이 : 몇 번 이야기했는데 허허. 그때 [소년중앙]에서 일본만화를 가져왔어. 인기가 있어서 하려는데 이건 우철이고 세로쓰기니까 다시 그려야 된다는 거야. <요괴인간>은 모씨에게 갔고 <타이거마스크>가 나한테 왔지.  

그때는 출판사에서 하자고 하면 처음부터 막 안 한다고는 못했어. 책을 줬는데 경기장면 있는 부분을 준거야. 앞뒤가 없었지. 그래서 앞에는 내가 새로 쓰고 뒤에는 주인공을 군대에 입대시켜버렸다고. 그리고 그만합시다 했지. 그래서 그만 했는데 이게 인기가 있으니까 다시 본지에 연재하자는 거야. 그래가 또 하는 수 없이 제대시켜가지고 했지. 허허허.  

그 때 할 때는 이름도 안 넣었어. 이건 그냥 복사니까. 그런데 문제는 뒤에 생겼어. 모 출판인이 이 걸 모아서 몰래 단행본으로 찍으려고 심의실에 넣은 거야. 이름이 없으니까 심의가 안 난 거야. 그때 모씨가 내 이름을 넣은 거지. 그런데 이 사람이 여러 게를 해가지고 고소 당하고 난리였었지. 그런데 이게 또 인기가 있어가지고 그때 ‘호돌이와 호순이’라는 TV프로그램이 있었는데 출연해달라는 거야. 난 못하겠다 했지. 그거 내 것도 아니니까 못한다고.  

석 : 초기작은 치바 테츠야, 이후로는 시라토 산페이의 영향을 받았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요.  

이 : 치바 테츠야는 내가 몰랐던 사람이고. 시라토 산페이는 좋아했다고. 내가 이건 아는 형님한테 개인적으로 읽으려고 작품을 번역 해달라고 한 적도 있지. 이게 너무 재미있는 거야. 아주 일본적이라고 생각했는데 이걸 보고 난 한국적으로 그려야겠다 했지. 일본에 갔을 때 만나보려고 했는데 병원에 입원했다고 해서 아들만 만나고 왔지.  

<무지개 행진곡>도 <타이거마스크>와 같은 식이었지. 이게 치바 테츠야 작품인지는 몰랐고. 그게 원본에서는 가족이 다 죽는다고. 그런데 내가 보니까 너무 슬퍼서 다 살렸어. 얼굴도 바꾸고 내 정서를 담으려고 하기도 했지. 그것 때문에 또 TV에서 출연해달라고 했는데 내 꺼 아니라고 안 했지. 그 때 다 그랬다고는 하지만 아닌 건 아닌 거지. 지금 보면 시대극보다 그 때 만화를 기억하는 독자들도 참 많아. 그것도 다 빚이라고.  

이두호는 과오라고 생각될 만한 일을 남의 일 말하듯 쉽게 이야기했다. 자신의 빚이라며 숨길 일도 아니라고 했다. 잘 기억나지 않는 대목에서는 난감한 표정도 지어 보였지만 그렇게 보낸 10년을 후회하지도 않는다 했다. 그 과정이 있었기에 80년대로 접어들면서 시대물을 선택할 수 있었고 그만한 성취를 이룰 수 있었으리라.

 

이두호 ‘가라사대’ – 최근 작품 활동과 후속 계획

 

석 : 최근 활동과 후속 계획에 대해서 좀 말해주세요. 이두호 만화의 독자가 원하는 것은 정통 시대극일 것 같아요. 부당한 것에 분노하고 싸우는 민초의 이야기일 것 같은데요. 요즘 하시는 작업은 너무 따듯해 보여요. 특히 컬러 원고는.  

이 : 재료나 도구를 뭘 쓰느냐에 따라서 달라지겠지. 어떤 내용이냐에 따라서 다른 재료를 택하기도 하는데 하기 전에 알면 좋은데 하던 중에 깨닫게 되는 경우가 많다고. 이런 것은 차라리 다른 재료를 사용했으면 더 강렬한 컷을 만들 수 있었겠다 싶어. 하면서 배우게 되는 거지. 컴퓨터 그래픽도 많이 배웠지. 그런데 나는 한번 작업 들어가면 7~8시간씩 앉아 있는다고. 한번은 그렇게 작업하고 일어났더니 물체가 두 개가 보이는 거야. 깜짝 놀래가지고. 그래서 요즘은 될 수 있으면 손 작업으로 하려고 그래.

석 : 한국사 만화 작업을 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 : 제목은 ‘이두호의 만화 한국사’로 나올 거 같은데 출판사에서 정하겠지 그런데 이게 시작할 때부터 고민이 많았어. 전부터 한국사는 꼭 하고 싶었는데 내가 지금까지 했던 것은 조선사였고 그것도 갈기갈기 찢어진 것이어서 역사를 총체적으로 알지 못하니까. 하기 힘들겠더라고. 그래서 출판사에 고민을 이야기했더니 이은홍씨 이야기를 하더라고. 전부터 잘 알고 있던 친구여서 그럼 그렇게 하자고 했지. 이은홍씨가 스토리를 보내면 내가 정리를 해서 연출하고 그림 작업을 하고 있지. 1권 작업은 끝났고 2권은 데생을 하고 있어. 컬러를 손으로 해봤으면 어떨까 했는데 아무래도 시간이 문제야. 컬러 잘하는 제자랑 같이 컴퓨터로 컬러 작업을 하고 있어.

석 : 기존 한국사 만화와의 차이점은 뭐가 있을까요.  

이 : 하는 사람이 다르지. 허허허. 일단 10권으로 계획하고 있는데 이 경우 1권에서는 대개 상고사부터 삼국의 형성까지를 다루더라고. 나는 1권 전체를 상고사로 정했으니까 좀 더 무게를 둔 셈이지. 문제는 여전히 고증이야. 다른 만화가들이 그린 한국사를 다 봤는데. 참 어렵게 작업했겠다 싶더라고. 웃음이 ‘씨익’ 나는 거지. 나도 고민이 됐던 부분인데 이렇게 피해갔구나 하는 걸 보게 되니까.  

자료가 있다면야 어떻게든 찾아서 보고 그려야 하는데 자료가 없는데 그려야 할 때가 있어. 그런데 함부로 그릴 수도 없어서 어떻게든 피해가는 거지. 그때는 이제 연출로 가리는 거야. 가령 장수들의 고리 장식 같은 게 그려져야 하는데 모르니까 팔로 가리거나 하는 거지. 허허허.  

석 : 이미 많은 만화가가 한국사 만화를 그렸는데 이두호 버전은 어떻게 나올지 무척 궁금합니다. 얼마 전 아들한테 이현세 선생님 버전을 사다 안겨줬는데 이거 저거 책에 나온 것을 물어보기 시작하니까 덜컹 겁나더라고요. 그래서 살금살금 제가 더 열심히 읽었습니다. 하하하. 읽으면서 좀 생경한 느낌이 들더라고요. 학습교양만화가 아이들을 위한 만화가 아니라 이렇게 가족만화가 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나저나 역시 이현세 버전은 웅장한 힘이 느껴지던데요. 언제 출시 예정인가요. 다른 작업 계획은.  

이 : 난 한꺼번에 10권 다 하고 내자고 했는데 출판사에서는 그렇게 하면 마감 못한다고 그러더라고. 언제 나올지는 모르겠고. 다른 작업은 준비하고 있는 건 없는데 하고 싶은 건 많지. 

자꾸 하기 전에 말하면 거짓말이 되는데. 내 유년시절 이야기를 꼭 해보고 싶어. 요즘 젊은 사람들은 못 그리는 것이 있잖아. 그러니까 김용환 선생님 같은 경우 옛날에 진짜로 갓 쓰고 도포 입고 살아본 사람이잖아. 그러니까 김선생님이 그린 것은 정확해. 옷고름 매는 것부터 갓 쓴 모습까지 진짜처럼 느껴지는 거지.  

마찬가지로 내가 유년시절에 개울가 같은 곳에서 뛰어 놀면서 본 것은 내가 진짜로 그릴 수 있을 거 같아. 나만 봤던 그 시절의 서정적 풍경들이 있었다고. 이걸 아무 형식 없이 하고 싶은 데로 한번 해보고 싶어.  

 

석 : <이두호의 가라사대>, <이두호의 만화 한국사>에 이어서 유년기 만화까지 나오면 그야말로 과거의 시대극과는 전혀 다른 작품 세계를 구축하게 되는 것 아닌가요. 많은 사람들이 ‘바지저고리’ ‘조선의 혼’ 등으로 선생님의 작품세계를 평가하는데요. 혹 선생님께서는 자신의 작품 세계를 한 마디로 정리해 본 적이 있으신지요. 

이 : 내 작품이 딱 뭐라고 하는 건 생각 안 해봤는데. 필요하면 뭐든지 하겠다 했지. 다만 살면서 공평해야 한다는 생각은 했다고. 사람 사는 것이 공평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지. 작품 할 때도 그랬던 거고. 큰 의미를 담아서 작품을 하는 것은 아닌데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고 그 이야기를 하다 보니 거기서 평론가들이 다양한 의미를 찾아주는 거 같더라고.

석 : 저는 분노라고 생각해 봤습니다. 거기에는 어떤 지향점이 분명히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현대물을 하시다가 시대극을 선택했고 무대도 조선으로 국한했습니다. 조선의 역사는 왕조사인데 주인공은 백성으로 했어요. 시대에 대한 분이 있었던 것 아닌 가요.  

이 : 백성이 죽는 법은 없지. 백성은 잡초 같은 생명력을 지니고 있잖아. 절대 죽는 법은 없지. 하나가 아니니까. 그래서 내 작품에서 백성은 죽지만 결국 죽지 않는다고. <덩더쿵>에서도 주인공 독대가 죽지만 ‘불씨’가 있다는 지문을 넣었고. 내가 앞으로 또 어떤 작품을 할지는 모르지만 내 손으로 그리니까 그런 게 달라지지는 않지. 얼마 전 교수회의 하는데 퇴임하는 사람보고 한마디 하라고 해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고등학생 때 문예지 편집을 했는데 편집후기를 적었어. 거기다 이렇게 썼지. ‘안 가보고 후회하는 것보다 가보고 후회하는 것이 백배 낮다고.’ 이렇게 적어놓고 혼자 흡족해했지. 지금도 같은 생각이야. 안 해보고 후회하면 뭐 할건데. 해봐야지.

석 : 40여 년 창작을 하셨고 10년 넘게 학생들을 지도했는데요. ‘만화는 엉덩이로 그린다’는 엉덩이론이 유명해요. 아직도 엉덩이로 그린다고 생각하시나요.  

이 : 학생들한테는 여전히 ‘만화는 엉덩이로 그린다’고 하지. 오래 앉아서 집중하는 것 외에 좋은 만화를 그릴 수 있는 다른 방법은 없다고. 최선을 다했으면 좋겠다는 거지. 그래야 후회가 없지. 하나 더 추가 하자면 비슷하게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래야 앞서 갈 수 있다고. 남의 걸 그리면 기다려야 한다고. 그 사람이 다른 걸 그릴 때까지. 자기만의 그림을 그려야지.

석 : 독자들에게는 어떤 만화가로 기억되고 싶으신지요. 

이 : 바지저고리를 그렸던 만화가가 있었구나 정도로 기억해주면 고맙지.

 

2013년 앙굴렘국제만화페스티벌에서 사인회를 하고 있는 이두호, 부천타임즈

이두호는 70년대 재주 많은 인기 만화가에서 80~90년대에는 고집스런 시대극화의 장인으로 그리고 2000년을 넘어서면서는 우리 만화계의 바른 스승으로 자리 매김 했다. 한때 세상은 그의 만화를 ‘몹쓸 찌꺼기(째마리)’ 처럼 취급하기도 했다. 모든 게 ‘순조롭지 않게 흘렀지만(파행)’ 이두호는 쉬이 흔들리지도 멈춰서지도 않았다. ‘내가 많이 모자라지만 필요한 것 한가지만은 잘 할 수 있다’는 선명한 원칙으로 선택과 도전에 충실했다. 만화가로서뿐만 아니라 교수, 단체장, 기관장의 직분을 성공적으로 수행해냈다. 그러는 동안 작품에서는 조선 민초의 힘을 담았던 서사가 옅어지고 채색 만화의 따스한 감성과 서정이 강조됐다. 더 이상 싸우지 않는 그의 만화가 아쉬웠지만 ‘나이가 들면 다른 게 보인다’는 그의 눈은 빛났다. 예순 다섯의 이두호도 이두호다. 그의 확신에 찬 선택과 도전에 대한 열정은 또 다른 세계로 우리를 인도해 줄 것이다.

 

 

박석환, 1973년 생, 성균관대학교 언론정보대학원을 졸업했다. 1997년 스포츠서울 신춘문예를 통해 만화평론가로 등단했고 한국만화문화연구원에서 활동했다. ㈜엔조이삼육오 기획실장, ㈜시공사 콘텐츠연구실장을 지냈다. 저서로는 <만화시비탕탕탕>, <잘가라 종이만화>, <코믹스만화의 세계>가 있다. www.parkseokhwan.com

* 이 인터뷰는 2008년 진행 됐다. 이후 3년 후 '이두호의 만화 한국사 수업'이 출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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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석환(만화평론가, 한국영상대 만화콘텐츠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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