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가야
권가야(본명 권기만, 1966년 생)는 1995년 만화잡지 '아이큐점프'에 <해와 달>로 데뷔했고 데뷔 이전에는 천제황, 하승남 등 대본계 무협만화스타의 밑그림을 담당했다. 90년 초 대본계에서 활동하던 다수의 유령작가(Ghost Writer)들이 색다른 서사와 작화 스타일로 소년만화잡지의 새로운 흐름과 함께 자기 이름을 걸고 활동했던 것에 비춰본다면 '꽤 늦은 출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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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가 늦어진 것과 관련된 일화도 있다. 당대를 대표하는 만화편집자 김문환이 원고를 들고 온 권가야를 보고 작품을 수정해보자는 이야기를 한다. 권가야는 '그림 그려본 적 없는 사람에게 그림이 어떻다 소릴 들을 정도면 10년 그린 게 헛 거다"라면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고 한다. 그로부터 3년 뒤 권가야는 김문환을 다시 찾았고 <해와 달>이라는 전대미문의 소년만화가 탄생하게 된다.
(C)권가야, 시공사
권가야의 공성전
이 일화는 창작에 대한 작가의 고집과 진정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자주 인용된다. 하지만 돌려 생각하면 아쉬운 대목도 있다. 편집자는 독자에게 조금 더 설명적인 만화를 제공하기 위해 틀에 맞는 서사를 원했을 것이다. 여기서 서사는 인물에 얽힌 사건이고 공간의 변화이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말풍선 속 대사와 인물 간의 격돌일 것이다. 무협만화에서는 일합을 겨루는 것이고 합의 결론이 곧 전개가 된다. 그러나 권가야는 싸우게 하지 않았다. 최대 출력을 지닌 머신의 엔진소리만 우렁차게 들려줄 뿐 오르게 하지도, 달리게 하지도 않았다. 생경한 작법이다. 독자들에게 주인공은 최고수로 인식됐으나 그 내공은 공개되지 않은 채 끝났다. 대결도 없고 승부도 이뤄지지 않은 작품, 독자가 받아든 것은 주인공의 이야기가 아니라 작가의 관념뿐이었다.
(C)권가야, 서울문화사
권가야는 주인공의 싸움을 그리지 않는 대신 편집자와 싸우고, 만화창작이라는 틀에 박힌 기준과 싸웠다.편집자가 받았을 압박이 선하다. 편집자는 권가야를 세상에 알렸으나 권가야의 작품을 당대의 독자가 이해할 수 있도록 틀에 가두지 못했고 조율하지 못했다. 편집자의 조율을 넘어선 권가야는 그렇게 자기만의 산성을 쌓았다. <남자이야기>를 쏟아냈고 <풍운남아>를 거쳐 <푸른길>을 돌았다.
(C)권가야, 학산문화사
대중과의 소통 대신 권가야가 택한 것은 권가야라는 작가가 되기 위한 기간이다. 그 기간을 담보하기 위해 권가야는 나름의 산성을 쌓았고 공성전을 펼쳤다. 대중의 폭 넓은 이해는 뒤로 한 채.
조선의 남한산성, 권가야의 <남한산성>
남한산성은 신라 문무왕 때 쌓은 주장성의 옛터를 활용해 1624년(인조 2년) 축성하여 1626년 완공한 성이다. 적의 침입에 대비해 쌓은 이 성은 천혜의 요새이자 가장 강한 무기였다. 400여 년의 세월이 지났으나 흐트러짐 없는 이 성은 기본에 충실하고 튼튼하다. 그러나 성은 지키기도 하지만 가두기도 하는 것. <해와 달>의 주인공 백일홍 역시 스스로 만든 성에 갇혀 살았다. 그렇게 처연하게 죽음을 맞이했기에 독자들에게는 더욱 선명한 주인공의 모습으로 각인되어 있는 것이다. 기쁨보다 슬픔이 긴 남한산성은 권가야가 작품을 통해 추구했던 삶에 대한 회의와 또 그것을 능가하는 의지와도 닮아 있었다.
만화 <남한산성>은 왜란과 호란이 연이어 발생했던 1592년부터 1637년까지를 시대적 배경으로 한다. 임진왜란은 무력한 조정에 비해 이순신이라는 명장과 강력한 의병이 봉기했던 승리의 역사이다. 물론 승리의 배경 뒤에는 일본 전국시대를 지휘했던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급작스런 죽음과 파병됐던 두 장수의 종교적 갈등 등의 이유도 있었다. 하지만 긴 국란에 대처했던 민중의 힘이 컸다는 것이 일반적 견해이다. 반면 호란은 나약한 조정의 이전투구만이 난무했던 패배의 역사였다. 북방 외교 실패로 조선은 스스로 청의 대군을 불러들인 격이 됐고 청 태종이 이끈 군대는 어떤 적군보다 빠르게 조선을 유린했다. 인조는 청 태종 앞에 무릎 꿇고 머리가 깨지도록 사죄해야 했고 세자는 강화도에서 인질이 되어 청나라까지 끌려가게 된다. 이후 청일전쟁에서 청이 패배하기 전까지 조선은 청의 조공국 신세를 져야했다. 왜란의 위협과 두려움으로부터 축성되어 호란 때는 인조의 피신처로 활용된 것이 곧 남한산성이다. 적을 성에 들이지 않고 수성하는데 성공했지만 청의 압박을 못 이겨 스스로 성 문을 열어야 했던 곳이다. 그래서 남한산성은 조선의 패배와 치육을 잉태하고 출산한 곳이 된다.
패배의 씨, 치욕의 씨라도… 그래도 살아야 한다
<남한산성> 1권과 2권이 그린 것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다. 양반집 딸인 혜령은 왜군에게 욕을 당하느니 죽으라는 아버지의 칼에 상처를 입고, 왜군에 의해 온몸에 화상을 입었지만 강인한 의병장 정인홍(실존인물)의 씨를 받아 삶의 의지를 불태운다. 패배의 씨 하림이다. 반면 왜군이 마을에 진입하자 마을의 유지인 안진사는 '何事非君 何事非民(누가 다스린다고 임금이 아니며 누구를 섬긴다고 백성이 아니겠는가)'이라며 항복을 선언하고 점령군을 위한 잔치를 벌인다. 안진사의 며느리 영임은 점령군에게 유린당한 후 집 안에서 쫓겨난다. 수차례 자살을 시도했으나 죽지 않고 살아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왜군의 씨가 성장한다. 상원사의 머슴인 돌쇠는 주지 스님의 뜻에 따라 영임을 아내로 맡이 하고 치육의 씨 희정을 거둔다.
서로 다른 공간에서 등장했던 패배와 치욕은 왜적을 맞아 연전연승하며 국가와 국민을 지켰던 수군통제사 이순신을 함께 바라보고 있다. 역적이라는 누명을 쓰고 한양으로 압송되던 행렬에서다. 이제 그들은 어떻게 봉기할까?
(C)권가야, 거북이북스
임금이 곧 국가이고 믿음이던 때, 임금이 있어야 할 곳에 있지 않자 국가는 사라졌고 민의 믿음도 사라졌다. 극도의 불안과 혼란 속에 조선은 무너져 내렸다. 남한산성은 적군을 눈앞에 둔 성 안의 사람들을 보듬었다. 반면 성 밖의 사람들은 죽지도 못하고 살지도 못한 채 다 버리지 못한 믿음을 부여잡고 있다. 남한산성은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이를 묵묵히 지켜보기만 한다.
권가야의 만화 <남한산성>이 그린 것은 남한산성이 지켜봤던 성 바깥의 풍경이다. 아름다운 조선의 풍경,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에 묻혀있던 민의 삶이 살아난다. 부끄러운 것이 무엇이냐는 듯, 격한 분노도 삶에 대한 광폭한 의지도, 침묵시위 하듯 엄정하고 섬세하게 드러낸다. 국가나 임금이 아닌 자기를 지키는 것, 그것이 곧 산성이고 스스로가 성이 되어 역사 보다 더 큰 역사를 이끌고 이를 증명하기 위해 ‘그래도 살아야 한다’는 냉엄한 삶의 태도를 유지해 간다.
역시, 권가야. 그의 만화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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