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메이션계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하울의 움직이는 성> 이후 4년 만에 신작 <벼랑 위의 포뇨>로 돌아왔다. 일본 개봉 당시 41일 만에 1천만 관객을 돌파하면서 일본 전역에 포뇨 열풍을 일으킨 작품이다.
호기심 많은 물고기 소녀 포뇨는 바다의 주인 후지모토와 그란 만마레의 큰 딸이다. 바다 생활에 싫증을 느낀 포뇨는 외딴 섬에 살고 있는 5살 소년 소스케를 만난다. 인면수가 육지에 올라오면 마을이 바다에 잠긴다는 전설이 있었지만 물고기 소녀는 인간이 되고 싶다. 소년이 지켜주지 않으면 물거품이 된다고 했지만 두려워하지 않았다. 미야자키 감독은 '좋아하니까 내가 지켜주겠다'던 소년의 약속을 실험이라도 하려는 듯 마을 전체를 바다에 빠트리고 두 주인공의 다음 행동을 기다린다.
올 해 67살인 거장은 새 작품이 나올 때마다 은퇴작이라는 풍문을 만들어 낸다. 하지만 스크린에 투영 된 그의 모습에서 그 연배의 노쇠함과 군내를 찾을 길은 없다. '내가 잘 할 수 있는 작업을 하는 것이 가장 행복한 일'이라고 밝힌 감독은 컴퓨터 그래픽의 미끈함을 쏙 빼고 17만장의 셀화를 손으로 그려 완성했다. 일반적인 애니메이션의 2~3배 규모로 초당 28장의 그림을 사용한 셈이다. 화면을 가득 매우는 아름다운 군중 씬과 속도감을 넘어 웅장함 마저 느끼게 만드는 질주 씬 그리고 하늘을 날 듯 바다 속을 유영하는 물고기들의 모습은 그 어떤 시절의 미야자키보다 밝고 건강하다. 나이는 겉모습을 탈색시킬 뿐, 그의 상상력과 따듯한 감수성은 여전히 총천연색이다.
이 작품은 바그너의 오페라 <니벨룽의 반지>에 등장하는 두려움 없는 영웅 지그프리트와 사랑을 위해 마법을 버린 브륀힐데 이야기를 모티브로 하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안데르센의 인어공주 이야기를 다시 쓴 것으로 읽힌다. 데본기 시대의 고대 어류, 어촌의 삶, 모호스 부호 등 볼거리도 다양하고 생명과 환경, 동경과 화합 등 주제어도 풍성하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사랑에 대한 책임'이다.
미야자키는 인어공주의 사랑을 알아보지 못하고 비극으로 몰고 간 동화 속 왕자가 한심했던 모양이다. 이를 질책하듯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는 성인 남자들을 불러낸다. 포뇨의 아빠는 소심증에 걸려 아무 결정도 하지 못하고 소스케의 아빠는 일에 쫓겨 바다에 난파된다. 반면 여성의 역할은 그 어떤 작품보다 강하게 표현됐다. 소스케의 엄마는 가사와 육아는 물론이고 마을 주민들까지 보호한다. 포뇨의 엄마는 두 주인공의 사랑을 위해 협상 테이블에 나서고 양로원의 할머니들은 모든 일에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남성은 못했지만 여성이 해낸 많은 일들 속에서 '사랑한다고 말하는 만큼 책임지지 못하고 사는 이 시대의 아저씨'들을 무릎 꿇게 만든다.
눈코 뜰새 없이 바쁘다는 아빠들의 연말연시. 가족을 위해 쥐꼬리만 한 시간을 내놨다면 엄마들이 나서서 영화관으로 아빠를 모시자. 즉석에서 아이들과 함께 흥얼거릴 수 있는 엔딩 타이틀곡을 들으며 아빠의 반성을 촉구하자.
글/ 박석환(만화평론가, www.parkseokhwa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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