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익 감독의 영화 ‘즐거운 인생’을 재미있게 봤다면 이탈리아 만화가 지피의 ‘창고 라이브’를 추천한다. 영화에 등장하는 활화산 밴드의 청소년 시절 이야기라고 보면 된다. 영화는 일하면 일할수록 가족으로부터 멀어지는 이 시대 가장들의 모습을 담았다. 가장들은 행복한 가정과 즐거운 인생을 위해 잊고 지내던 록의 열정을 되살린다.
반면 만화는 이제 막 밴드를 결성하고 연습을 시작한 아이들의 일상을 그린다. 노래보다 노래할 곳이, 열린 세상보다 자기들만의 닫힌 공간이 필요한 아이들의 이야기다. 단 한 번의 기회에 모든 것을 걸어 보는 아이들의 이야기다.
알렉스, 스테파노, 줄리아노, 알베르토 네 명의 아이는 아마추어 록밴드를 결성했다. 이들은 줄리아노의 아버지에게서 말썽 없이 지낸다는 조건으로 창고를 빌려 연습실로 쓰고 있다. 이 창고에서 아이들은 자신들의 일상을 소재로 노래를 만들고 연주에 몰두한다.
스테파노 아버지의 소개로 오디션 기회를 얻게 된 아이들은 5곡의 노래를 녹음한 데모 테이프를 제작하기로 한다. 그런데 연습 중 앰프가 고장 나면서 목표에 차질이 생긴다. 아이들은 다른 밴드의 앰프와 악기를 훔쳐서 녹음 작업에 매달린다. 하지만 곧 주인에게 발각되고 경찰이 출동한다. 이처럼 말썽이 생기자 창고 연습실에서 쫓겨난다. 스테파노는 그동안 녹음한 노래 3곡을 들고 음반 제작자를 만나지만 원하는 답을 듣지 못한다. 아이들은 공간도 기회도 잃고 다시 공터로 내몰린다.
이 작품은 대개의 유럽권 만화처럼 100쪽 내외의 짧은 컬러만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수십 권의 분량에 다양한 서사적 장치로 독자를 몰입하게 만드는 동아시아권 만화와는 전혀 다르다. 멤버들 간의 경쟁과 로맨스, 다른 밴드와의 대립과 갈등, 모든 문제를 해소하는 마지막 공연 무대 같은 익숙하고 흥미로운 요소들은 없다.
그 대신 무언가 몰두할 곳을 찾아낸 또래 아이들에게 닥치는 진짜 상황과 진짜 인식이 담겨 있다. 그래서 기대하는 것도, 읽는 법도 달라야 한다. 말 칸을 따라 글 읽는 속도를 높이기보다는 그림 읽기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것이 좋다. 그림에 빠진 뒤 글을 찾는 것이 이 만화를 제대로 소비하는 방법이다.
지피는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만화가다. 국내에는 이 작품을 통해 처음 소개됐지만 2005년 ‘전쟁 이야기를 위한 노트’로 프랑스 앙굴렘 세계만화축제에서 최우수 작품상을 받았다. 반항적 이미지의 화풍과 문예적 감수성으로 독특한 분위기의 작품을 창조해 낸다. 시시할 정도로 허름한 상황과 사건, 윤기 없는 대사와 주인공들의 맥없는 문제 해결 방법은 이야기의 과장을 막고 묘사의 사실성을 드높인다. 그 때문일까. 한국어판 추천사를 쓴 인디밴드 크라잉넛은 먼 나라 아이들의 이야기에서 우리 동네 밴드들의 하루하루를 찾아내며 ‘뮤지션들의 교과서가 될 만화’라고 소개한다.
박석환(만화평론가, www.parkseokhwa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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