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석환, 만화 속 영웅-불안한 사회에 던지는 희망의 메시지, 원대신문, 2007.09.17



1930년대 미국은 경제대공황과 함께 대량 실업 사태, 금주법, 마피아 등 각종 사회 불안 요인으로 몸살을 앓았다. 이 불행한 시기에 미국 만화계는 역사상 최초의 호황기를 맞이한다. 당시 평범한 미국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범죄자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사회정의를 구현할 수 있는 서부시대의 보안관이었다. 만화는 실재하지 않지만 대중이 원하는 동시대적 영웅을 그렸고 대성공을 거둔다. 

워렌 비티 주연의 영화로 더 유명한 <딕트레이시>가 이때 등장한 원조 형사만화다. 불안한 사회, 공포에 질린 대중은 늘 새로운 영웅의 등장을 기다린다. 그리고 대중의 요구에 가장 먼저 응한 것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만화였다. 물론 국가별로 영웅의 탄생배경과 그를 통해 얻고자 하는 가치는 달랐다.


미국, 이민자에 대한 공포와 기대


형사만화(Detective Comics)의 등장으로 불붙기 시작한 미국의 '도시 영웅물'은 <슈퍼맨>, <배트맨>, <엑스맨>, <스파이더맨> 등 다양한 초능력자의 등장으로 이어졌고 40~50년대를 거치면서 '강한 미국'을 상징하는 아이콘이 된다. 미국 만화산업을 대표하는 DC코믹스의 회사명 역시 '형사만화'라는 장르명칭에서 유래했다.



DC코믹스는 마블코믹스와 함께 미국의 양대 메이저 출판사 구도를 형성하면서 다양한 도시 영웅들을 양산한다. 이들의 탄생배경과 성격, 초능력 등은 동시대가 원하는 영웅적 가치와 위상에 맞게 조금씩 변모했다. 이들의 공통된 특징은 낯선 사람, 불안정한 사람이라는 점이다.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슈퍼맨>은 클립톤 행성에서 날아온 외계인이고 <배트맨>은 폭력배들에게 부모를 잃은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한 고아, 엑스맨은 돌연변이, 스파이더맨은 이상약물에 감염된 상태다. 이들은 그 자체로 미국 사회의 불안요인이다. 신분을 알 수 없는 불법 이주노동자고, 법과 질서가 사라진 무정부 상태의 보복폭행자며, 도시문명의 발전과 과학기술의 진보가 낳은 기형아다.

그들은 헐리우드 괴수영화의 주인공들처럼 동시대 미국인의 불안요인이다. 그러나 미국인들은 그들이 또 다른 불안요인을 제거해 주리라 믿는다. 그래서 영웅들은 더욱 전투적인 면모를 보였고 팀을 이뤄 싸우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대중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한 영웅은 퇴출됐다. 인종의 용광로인 미국에서 영웅은 그들의 이웃이 되기 위해 싸운 것이다.


일본, 원자력에 대한 공포와 기대




일본의 상징은 사무라이지만 일본만화의 상징, 일본인의 영웅은 <아톰>이다. 51년 첫 발표된 <아톰대사>는 원자력을 평화적으로 활용하는 가상의 나라를 배경으로 한다. 원폭 피해를 입은 유일한 나라로 패전의 상실감을 달래야 했던 일본인들에게 로봇아톰은 과학기술 발전을 통한 조국 재건이라는 시대적 가치를 상징하는 영웅이었다. 아톰은 인류의 평화를 위협하는 적과 싸운 전투형 로봇이지만, 막내아들 같은 모습으로 사람들과 함께 사는 가정형 로봇으로 동양적 정서를 대표하기도 한다. 

이후 로봇영웅의 모습은 <마징가제트> 유의 거대로봇, <메칸더브이> 유의 합체로봇, <트랜스포머> 유의 변신로봇으로 이어지다가 자동차처럼 로봇이 대량생산되는 <건담>을 거쳐 생체전투병기 <에반게리온>으로 발전했다. 이와 별도로 5명 내외의 변신영웅이 등장하는 <후레쉬맨>, <울트라맨> 등도 있지만 이는 만화라기보다는 TV시리즈 전대물 또는 특촬물이다.



칼, 표창 등의 무기와 가라데 등의 무술을 사용하는 거대 전투로봇(그레이트마징가)을 사무라이나 닌자에 비교하며 일본인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노력도 있고, 탑승형 거대 로봇이 오토바이나 자동차를 운전하고 싶어 하는 청소년들의 로망과 관련되어 있다는 분석도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로봇영웅의 공통된 특이점은 그들이 우연히 힘을 얻게 된 특별한 생명체가 아니라는 점이다. 천재 박사에 의해 제작되고 사람의 의지에 따라 조정(안드로메이드나 사이보그 유형의 로봇을 제외하면) 된다. 로봇영웅도큰 인적 재앙 중 하나였던 원폭 피해를 겪은 일본이 세계에 선보인 국가대표 선수다.


한국, 핍박받은 민중의 반란 


미국식 슈퍼영웅이나 일본식 로봇영웅처럼 한국을 상징하는 영웅 아이콘은 없다. 비슷한 유형을 찾자면 60년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라이파이>나 80년대를 상징하는 <로보트태권브이>를 들 수 있지만 두 주인공에게서 시대적 요구를 찾기란 쉽지 않다. 당대의 세계적 문화 트랜드를 국산화 한 공적이 있고 이를 현대적 가치로 복원할 필요가 있을 뿐이다.



물론 초현상이나 미래지향적 요소를 제거하면 건국영웅, 전쟁영웅 등을 다룬 만화가 있다. 역사적 인물에 대한 재해석과 평가가 동시대의 문제와 새로운 가치를 제공할 수 있고, 만화적 상상력과 서사가 그들을 현재적 인물로 재탄생 시킬 수도 있다. 그러나 아직 우리 만화계는 그만한 초능력 영웅 콘텐츠를 만들지 못했다. 

다만 80년대 만화 붐을 주도했던 스포츠만화 열풍과 스포츠 영웅을 비교해 볼만하다. 당시 군사정권의 집권 하에 정치적 암흑기를 보냈던 민중은 하루하루가 억압과 고통의 나날이었다. 이들은 갑갑한 현실 속에서 여유와 희망을 잃어갔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군부의 통제 하에 추진됐던 엘리트 스포츠인 육성과 프로스포츠 도입 정책이 색다른 감동과 희망을 만들어냈다. 이와 함께 스포츠만화도 거대한 열풍을 일으켰다. 축구에서는 울지 않는 소년 독고탁이, 권투에서는 무당거미 이강토가, 야구에서는 까치 오혜성이 활약했다. 이들은 공포의 대상이었던 외계인도, 희망의 상징이었던 로봇도 아니었다. 천부적 소질이 있었으나 발견되지 못했고 자신을 초월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시스템의 벽 앞에서 좌절해야 했던 민중의 모습이다.

영웅의 모습은 현재도 조금씩 변하고 있다. 미국은 자신을 보호해 줄 용병 영웅을 원하고, 일본은 해외에 드러낼 경제상품으로서의 영웅을 원한다. 그런데 한국은 한 많고 설움 많은 드라마 속 주인공을 찾고 있다. 올 여름 최고의 영웅이 된 코미디언 출신 영화감독 심형래도 한 많은 삶의 드라마가 더 아름다운 영웅이다.



이제 우리에게도 좀 색다른 상징과 이야기를 지닌 초월적 영웅이 필요하다. 한국 최초의 우주인으로 선정된 고산 씨가 '한과 설움'이라는 한국적 영웅의 키워드를 우주에 날려버리고 성공적으로 복귀하면 '우주 영웅'의 시대가 열리지 않을까.


글/ 박석환(만화평론가, www.parkseokhwan.com )


게재 : 원대신문, 2007. 09. 08 http://www.wknews.net/news/articleView.html?idxno=26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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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평론가 박석환 홈페이지. 만화 이론과 비평, 웹툰 리뷰, 인터뷰, 보도자료 등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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