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 열풍과 만화로 배우는 와인
최근 한 언론사는 ‘CEO 필독 만화’라는 제하의 기사를 신문 1면에 실었다. 과거 신문만평이 1면 하단에 실린 적은 있지만 만화관련 기사가 문화면을 넘어 1면에 실린 일은 없었다. 기사의 주인공은 <신의 물방울>이라는 제목의 일본만화였다. 와인을 소재로 한 이 만화의 작가가 취재차 한국을 찾은 이유도 있었지만 작가가 작품소재를 찾기 위해 한국에 건너왔을 정도로 우리 사회에 일고 있는 와인 열풍이 대단한 탓도 있겠다.
그런데 신문은 한국의 CEO들이 와인을 쉽게 공부할 수 있는 교과서로 이 작품을 선택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왜 CEO들이 와인을 공부하는지에 대한 분석이 없다. 바쁜 일정에 쫓기는 CEO들이 틈틈이 와인을 소재로 한 만화를 읽으면서 와인과 친숙해지려한다는 점은 이해한다. 하지만 와인을 즐기고 배우려는 것이 그저 호사스런 취미는 아닐 것이다.
2004년 SK의 최태원 회장은 연수원에서 신입사원들에게 요리만화 <미스터 초밥왕>을 읽으라고 추천했다. 그리고 주인공 쇼타의 장인정신과 인간성 등 행동 철학에 대해 연구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 이야기에 SK가 지향하는 경영원칙과 최고경영자의 기업가 정신이 녹아있었기 때문이다. 이 때도 언론은 그 작품이 전하는 감동적 이야기와 철학과는 무관하게 만화에 소개 된 진기한 초밥 종류와 식당을 소개하느라 바빴다.
품질제일주의에서 브랜드제일주의까지
술을 소재로 한 만화는 요리를 소재로 한 만화의 진화형이다. 요리가 인간의 오감을 통해 경험하는 문화라면 술은 오욕칠정을 드러내게 하는 문화이다. 즉 요리만화가 요리사 대 요리사, 요리사와 손님 간의 직접적인 대립 구도를 지니고 있다면 술을 소재로 한 만화는 직접적인 생산자가 아닌 이용자 성격을 지닌 이들의 개별적인 감흥이 주가 된다. 말 많은 만화가 되는 것이다.
같은 술을 소재로 한 만화일지라도 <명가의 술>(오제 아키라)이나 <식객-탁주, 청주편>(허영만) 등은 술을 직접 만드는 요리만화에 가깝다 할 것이고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신의 물방울>(아기 타다시), <소뮬리에>, <바텐더>(아라키 조) 등은 제작이 완료된 술을 이용하는 만화이다.
요리만화나 술 소재 만화를 통틀어서 일본에서는 구르메(gourmet) 만화라고 한다. 구르메는 미식가라는 의미로 쓰이고 있지만 어원은 포도주에 밝은 사람을 뜻하니까 술을 소재로 한 만화를 요리만화와 구분하는 의미에서 구르메 만화라고 해도 틀린 표현은 아니다. 요리만화가 생산자(producer) 대 소비자의 관점에서, 구르메 만화는 이용자(user) 대 소비자의 관점에서 이야기가 전개되는 만큼 인터넷 문화와도 상통하는 면이 있다.
이를 기업의 경영 전략에 견주어 해석하자면 요리만화는 품질제일주의 시대의 가치를 담은 이야기이다.
최고의 재료를 찾기 위한 투자, 최고의 맛을 내기 위한 과정 그리고 품질경쟁에서의 승리를 그려낸다. 단 한사람의 고객이 있다 할지라도 세계 최고의 상품과 견주어 손색없는 일류상품을 내놓겠다는 기업가 정신과 동일시된다.
반면 술을 소재로 한 만화는 품질이 아닌 브랜드제일주의 시대의 가치를 담고 있다. 원재료나 생산자가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것보다는 메이커에 대한 신뢰를 근간으로 한다. 또한 이것을 이용한 테스터의 품평과 고객의 개인적인 감흥이 중심이 된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최고의 명품이 아니라 가격, 용도, 상황, 기분, 취향, 추억 등 고객의 요구에 맞춰 폭넓게 준비 된 제품군을 필요로 한다. 이제 기업가들은 최고가 상품을 잘 만드는 메이커가 아니라 고객의 마음을 이해하는 브랜드를 지닌 기업이 되고 싶은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와인평론가나 바텐더는 이미 만들어진 우수한 제품을 구매해서, 세계 시장에 자신의 브랜드 가치를 붙여 판매하는 기업과도 닮았다.
만화를 통한 독서경영과 스토리텔링
요리만화나 술을 소재로 한 만화를 기업의 최고경영자들이 필독하고 조직원들에게 일독을 권하는 것이 우리사회 전체의 연성화 바람과 함께 가벼운 헤프닝 정도로 이해돼서는 곤란하다.
세계적인 명품, 세계적인 브랜드와 경쟁하고 있는 우리 기업에게 지금 가장 소중한 가치는 품질과 브랜드이다. 최고 경영자가 조직원들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은 쉽고 재미있으면서도 상식이 넘치는 만화를 읽고 미식가나 교양인이 되라는 것이 아니다. 최고의 제품을 만들고 최고의 브랜드를 형성하기 위해 노력하는 만화 속 주인공처럼, 최고가 되고자 하는 목표를 지닌 조직원이 되어 달라는 것이다.
이는 최근 다수의 기업에서 활용하고 있는 독서경영 기법과도 맥을 같이한다. 제도화 된 독서경영이 조직원의 역량강화나 자기주도형 학습 차원이라면 이 경우는 최고경영자의 경영의지나 철학이 담긴 도서나 이야기를 매개체로 조직원에게 동기를 부여하고 동일한 목표를 심어주기 위한 색다른 리더십인 셈이다.
술을 소재로 한 만화, 그중에서도 기업의 최고경영자 눈에 뛰어 독서경영의 텍스트로 활용되는 만화가 일본만화 일색인 점은 아쉽다. 그간 우리만화계도 술을 소재로 한 다수의 작품을 발표해왔다.
소주를 마시며 직장생활의 애환을 달랬던 <날자 고도리>(김수정), 술집의 <간판스타>(이희재)가 된 이농 여성의 삶과 <포장마차>(이상무)에서 소주를 사이에 두고 소시민들의 삶을 기록했던 우수한 작품들이 있었다. 최고의 인기만화가에서 알콜중독자가 되었다가 <지옥을 체험하고 싶은 자 알콜 중독자가 되라>(박원빈)고 외친 작가도 있었고 40년 간 술을 마셨고 앞으로도 40년 간 술을 마시겠다는 <술꾼>(이은홍)도 있었다.
그러나 이들 작품은 만화사적 의미와 작품 자체의 완성도에도 불구하고 최근 술 소재 만화에 담긴 기능과 역할을 지니지 못했다. 술은 곧 삶의 애환이라는 단순 명확한 신화에만 집중했기 때문이다.
지구에서는 우주를 보다가 우주에 데려 갔더니 지구만 봐서는 곤란하다. (끝)
글. 박석환(만화평론가, www.parkseokhwan.com)
한화건설 사보, 2007. 3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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