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석환, 구구스튜디오의 크로니클스, 컬쳐뉴스, 2007.05.17


교양의 발견, 학습의 회귀, 창작의 모험


구구스튜디오의 <크로니클스>


안드로이드 강의 연대기


일명 안드로이드 강, 강인선은 만화편집계의 울트라슈퍼우먼이다. 만화계에서 그 유례를 찾기 힘든 스타급 편집자로 순정만화잡지계의 거대한 계보를 잇는 ‘윙크’ ‘나인’의 편집장이었다. 잘나가던 출판편집자의 길을 접고 인터넷 붐과 함께 잠깐 우회로를 돌았지만 복귀해서 ‘오후’를 창간했다. 역시라는 평가와 함께 만화계는 환대했으나 뒷심이 부족했던지 잡지는 폐간됐고 한 때의 스타는 잠수를 탔다. 그러던 어느 날 독립을 선언하고 출판경영 일선에 나선다. 파격적인 도전과 기획력을 받쳐주던 자본의 힘이 쏙 빠진 독립출판이었다.

재능 있는 작가들과 함께 의미 있는 기획 출판물을 다수 발표했지만 시장은 크게 반응하지 않는 눈치였다. 울트라도 슈퍼도 빠진 우먼이었다. 창업 3년 차, 준박정도 되는 효자상품이 없다면 신간 출판 자체가 부담스러운 시기이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인간을 닮은 로봇(Android)의 지치지 않는 체력과 도전은 나이나 연차와는 무관했다.


크로니클스? 또 하나의 손오공 연대기


무능력 대표선수 무대리(<용하다용해>)의 이야기작가 김기정, 하드보일드 액션극 <이블아이>의 작화가 홍성군, 애니메이션 컨셉트 디자이너 이지윤 그리고 안드로이드강이 뭉쳐 구구스튜디오를 설립하고 첫 번째 프로덕션 창작 작품을 발표했다. 작가들의 조합부터가 쉽지 않다. 성인시트콤 이야기에 액션스타일리스트의 그림을 붙여서 아기자기한 채색으로 마무리한 스타편집자의 기획만화라는 것이 어떤 모습일까. 제목 또한 범상치 않은 <크로니클스>다. <나니아 연대기(The Chronicles Of Nania)>에서의 연대기를 뜻한다. 부제는 ‘상상지존, 동양신화 연대기’다.

뭔가 쉽지 않은 조합에 주독자층은 아동이고 분류는 교양학습만화다. 그리고 동양신화의 정체는 ‘서유기’다. 토리야마 아키라의 <드래곤볼>에 대한 감동과 여진이 남아있고 이를 재활용해 한자학습만화라는 거대 시장을 구축한 <마법천자문>의 기세가 여전한 터에 또 손오공 이야기라니. 지치지 않는 체력이 괜한 일을 벌인 느낌이다.


교양의 발견, 학습의 회귀 그리고


최근 출판만화는 빈부격차의 심화가 아니라 반상의 격돌과 신분혁명이 한창이다. 신세기 진입 이전까지 출판만화는 만화전문잡지를 발행하는 3대 메이저 출판사를 중심으로 한 코믹스만화계가 주도해왔다. 그 옆으로 만화방을 중심으로 한 대본소만화계가 있었고 그 아래로 서점을 중심으로 한 교양학습만화계가 있었다. 만화가들의 창작 성향이나 철학에 따라 3대 계파 중 한 쪽에 머문 대가들도 있었지만 최대계파는 코믹스만화계였다. 그런데 신세기 이후 주소비층이었던 청소년층이 게임, 인터넷, MP3, 핸드폰 등의 정보문화에 심취하면서 급속도로 상황이 바뀌기 시작했다.

코믹스만화계는 주변부에 있던 여성독자층을 부여잡으면서 순정만화 붐을 주도하기도 했지만 규모 유지가 벅찬 상황에 이르게 된다. 반면 맨 아래층에 위치했던 교양학습만화계는 소비위축기에 오히려 확대되는 교육비, 명예퇴직이 불러온 평생교육과 자기계발 붐, 거기에 힘 빠진 코믹스만화계에서 이탈한 만화가들이 뭉쳐 연이은 히트상품을 출시했다. 급기야 아동대상의 <만화 그리스로마신화>, 청소년 대상의 <파페포포메모리즈>, 성인 대상의 <식객> 등 전 연령층이 소비하는 작품군을 완비하며 출판만화계의 최대 계파로 부상했다.

이 같은 혁명적 변화의 이유로는 만화활용학습론의 제거와 스토리텔링의 도입을 꼽고 있다. 기존의 교양학습만화가 교과학습을 쉽게 이해시키기 위한 교사 강의식 구성으로 ‘학습’에 주안점을 뒀다면 새롭게 기획된 교양학습만화는 익숙한 이야기의 원형을 이용해 관련 정보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교양’에 무게를 뒀다. 즉 이 같은 출판물의 성공요인은 ‘학습 제거, 교양 발견’이다. 그런데 최근에 이 시장이 다시 ‘학습’으로 회귀하고 있다.


상상력, 그 아름답고 강력한 가치


지치지 않는 체력의 안드로이드강과 두두스튜디오 그리고 <크로니클스>가 주목하고 있는 것이 이 대목이다. 그간 출판만화의 강력한 계파로 성장한 교양학습만화계는 내부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다시 ‘만화활용학습효과’를 강조하는 쪽으로 경쟁력을 집중시키고 있다. 또 몇몇 히트상품의 유명세를 바탕으로 관련 출판물을 몰아 찍으면서 원작이 지녔던 스토리텔링 효과를 제거하고 만화가 그려진 학습지 같은 책을 내고 있다. 교양이라는 코드에 담겼던 풍요로운 탐구욕이 학습이라는 지긋한 일상으로 회귀하고 있는 꼴이다.

<크로니클스>는 이 같은 회귀에 반대하면서 한 발짝 더 큰 걸음을 내 걷는다. ‘가장 훌륭한 이야기를 가진 전사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미래학자 랄프 옌센의 말을 빌려 학습과 교양보다 더 중요한 것이 상상력이라고 선언한다. 교과학습을 도와주는 자습서용 만화나 교양 수준을 높여주는 다이제스트 정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상상력으로 가득한 이야기를 경험하고 그 이야기를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이는 얼핏 과거의 소년만화가 지녔던 가치와 동일시된다. 과거 소년만화는 꿈, 상상, 도전, 모험 등의 가치를 담은 이야기를 창작해냈다. 현란한 3D그래픽영화와 실시간 온라인게임과 경쟁해야 하는 지금의 소년만화에서는 찾을 수 없게 된 가치이다.

도전적 만화편집자 안드로이드강의 새로운 모험은 어찌 보면 만화가 지닌 근원적 가치에 대한 재발견이다. 팬시 캐릭터와 학습효과 같은 기능성에 매몰된 만화의 근원적 힘이 잘 만들어진 아동만화 <크로니클스>를 통해 재확인되길 바래본다. 물론 이 같은 의지와 가치가 <크로니클스>의 후속편에서도 지속적으로 발견될 수 있어야 할 일이다.


글/ 박석환(만화평론가, www.parkseokhwan.com)


컬쳐뉴스, 2007. 05.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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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평론가 박석환 홈페이지. 만화 이론과 비평, 웹툰 리뷰, 인터뷰, 보도자료 등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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