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석환, 이명진의 어쩐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저녁, 한국일보, 2003.10.14


한국형 미소녀 장르 `신호탄`, 당시 `만화계의 서태지`評, 청소년 性호기심 `해열제`


너무나 많은 이들에게 이미 현실이면서도 쉽게 꺼내놓지 못하는 이야기가 있다면 ‘동거’가 아닐까. 아무리 애써 봐야 실패한 첫사랑이고 여러 사람 불행하게 하는 것이 동거라고 말해 왔다. 동거가 풋풋한 연애의 즐거움과 안정적 미래설계가 될 수도 있다고 한 것은 TV드라마 ‘옥탑방고양이’로부터. 

여기서 동거는 궁핍한 청춘이 계획한 잠시의 일탈행위가 아니라 꿈과 열정으로 자신의 가능성을 개척하는 이들의 프리_프로덕션이고 대안적 형식의 가족모델로 설정됐다. 드라마 속 동거이야기가 낯 모르는 청춘남녀를 한 방에 몰아넣고 상열지사를 즐기는 쪽이라면, 만화 장르에서 동일한 소재를 다루는 방식은 ‘하숙집’에서 찾아볼 수 있다. 


만화가 이명진의 1992년 데뷔작 ‘어쩐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저녁’은 북예고등학교로 전학 온 싸움꾼 하숙생 남궁건과 하숙집 손녀딸 민승아의 알콩달콩 연애담이다. 이명진은 뽕짝이나 발라드 느낌의 케케묵은 ‘하숙집 소재’의 성장만화를 트래시메탈이나 힙합 풍으로 뒤집어놓았다. 

캐릭터 스토리 연출 효과 정서 등 작품 전반에 있어서 ‘망가’풍이 확연했지만 그것은 그대로 새로움이었다. 당시 청소년만화에서 학생의 성적(性的) 고민과 대리물 또는 해소장치는 논의대상이 될 수 없었다. 

꽉 끼는 청바지나 잘록한 치마를 입은 여성 캐릭터 정도가 성인만화에 등장하던 그때 그 시절. 이 작품에는 금발과 큰눈, 앵두입술, 왕가슴, 개미허리, 긴 다리, 그리고 꽉 끼는 블라우스에 짧은 플레어 스커트로 대표되는 세라복 차림의 여자 주인공이 등장했다. 이 불편한 옷차림의 소녀에게 활달한 성격을 주고 움직임이 큰 운동을 시키는 것만으로도 남학생 독자의 고민은 상당부분 해결됐다. 

이른바 일본에서 건너 온 미소녀 장르만화의 첫 번째 한국형 모델이다. 이는 당시 청소년 독자에게만 통하던 성적 코드였다. 물리적 칸막이를 둔 하숙 ‘집’은 정서적 칸막이만 두른 동거 드라마의 ‘방’에 비해 더 극적인 요소로 작용했다. 


만화잡지 ‘소년챔프’가 첫 번째 공모전을 통해 찾아낸 이 작품은 당시 고교 3학년이던 이명진을 밀리언셀러 만화가로 만들었다. 현재까지 국내 만화작품이 100만 부를 넘어선 사례가 손에 꼽힐 정도이고 보면 ‘만화계의 서태지’라는 당대의 평가를 가늠해 볼 수 있다. 

후속 만화 ‘라그나로크’가 기대 이하라는 평가를 받으면서 이 작품에 대한 평가도 ‘고3 만화지망생의 데뷔작 신화’로 폄하됐으나, 제작에 직접 참여한 동명의 온라인게임 ‘라그나로크’가 국내외에 호평을 받으면서 원위치로 돌아왔다. 이 작품은 2002년 완전판(대원씨아이, 전9권)이 재출간 됐고 두 편의 PC게임으로도 만들어졌다. 

전체 설정에 있어서는 다카하시 루미코의 하숙집 소재 연애 만화 ‘도래미하우스(원제 메존일각 めぞん一刻)’를 떠올리게 하고, 주체적 관점이나 철학은 없이 여러 장르의 이미지만 난무한다는 비판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비판은 작품의 재미를 넘어서진 못한다. 이 만화는 청소년의 연애감정과 주체 못할 성에 대한 해열제 역할을 했다. 


글, 박석환(만화평론가, www.parkseokhwan.com)



한국일보, 2003-10-14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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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평론가 박석환 홈페이지. 만화 이론과 비평, 웹툰 리뷰, 인터뷰, 보도자료 등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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