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석환, 김준범의 기계전사109, 한국일보, 2003.10.07


전자시대 해체된 가족의 엘레지…한때 `민중만화`로 분류도


핸드폰이 우리의 일상을 속속들이 변화시킨 게 언제부터였던가. 인터넷은 또 언제이고. 이제 디지털카메라가 대중의 손으로 넘어오면서 또 다른 삶의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너무나 인간적인 ‘기억’이라는 단어를 기계적인 냄새가 물씬 풍기는 ‘기록’으로 압도하며 등장한 디지털카메라. 여기저기서 동작 하나 없이, 소리 하나 없이 우리의 일상을 기록한다. 그리고 광고 카피처럼 우리는 이 기록에 지배당하고 있다. 


1989년 신인 만화가 김준범은 ‘기계전사 109’라는 작품을 통해 할리우드 SF영화가 담아냈던 고민을 슬쩍 던졌다. 고도로 발달된 전자사회에서 인간은 갈수록 기계적 사고에 빠져든다. 인간은 로봇을 만들고 자신이 잃어버렸던 인간성을 주입하는 것으로 ‘신의 실수’를 흉내 낸다. 기계적 인간과 인간형 기계의 대립은 이렇게 태어났다. 

경찰 로봇보다 뛰어난 전투능력을 지닌 ‘그리핀’의 특수대원 MX16은 사이보그 테러단체 ‘메탈브레인’과의 대치 중 아내 셰어를 잃는다. 아내의 두뇌를 지닌 사이보그로 아들을 위로해 보지만 이 위장된 가족은 곧 붕괴된다. 


거리에서 방황하던 셰어는 사이보그 폐기장으로 이송되던 중 메탈브레인에 의해 구출되고, 이 조직의 보스인 데이모스가 피살된 후 사이보그 해방전선의 여전사가 된다. 

기계적 사고의 남편과 아내(엄마)의 인간애를 지니게 설정된 기계가 아들을 사이에 두고 총부리를 겨눈다. 남편은 방아쇠를 당기지만 아내는 그럴 수 없다. 

소설가 아이작 아시모프의 로봇공학 제1원칙 ‘로봇은 인간을 해치면 안 된다’는 강령 때문만은 아니다. 남편은 아내에 대한 ‘기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지만 아내의 전자두뇌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가족과의 ‘기록’이었다. 기억은 인간성을 버릴 수 있을 만큼 느슨하지만 기록은 인간성을 지키도록 만드는 장치가 된 것이다. 


사회주의의 몰락과 미시담론이 횡행하던 시절 허리우드는 이 같은 테마를 사이버 펑크라는 장르로 묶었고, 우리 만화계는 이 낯선 작품을 아직 설명하지 못했다. 

정의의 이름으로 외계의 악당을 쳐부수는 절대자가 출현하는 것이 공상과학만화 장르의 법칙이거늘, 메카닉 전투 장면으로 가득한 이 작품에는 우리 편이 존재하지 않았고 ‘이기는 편 우리 편’을 외치자니 뭔가 진지했던 것이다. 

이 작품의 스토리작가 노진수는 이를 ‘계급 간 갈등과 착취’ 측면에서 읽어주길 바랬고 다수의 평자들이 이에 동의하면서 그 시절의 ‘민중만화’ 작품으로 분류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작품은 SF적 코드로 ‘전자시대에 해체된 가족’에 대해 이야기하는 ‘가족만화’이다. 

이런 이유로 이 작품이 재차 복간되어 읽힐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작품 이후 만화가 김준범은 주변의 작가들이 ‘학원폭력만화’에 빠져들었던 것과 달리 ‘부전자전’ ‘형 따로 아우 따로’ 등 자신만의 독특한 ‘가족만화 작품군’을 형성해냈다. 


글/박석환(만화평론가 , www.parkseokhwan.com)


한국일보, 2003-10-07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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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평론가 박석환 홈페이지. 만화 이론과 비평, 웹툰 리뷰, 인터뷰, 보도자료 등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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