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석환, 양영순의 정크북, 만화규장각, 2007.3.11

1995년 「미스터블루」 만화공모전을 통해 데뷔한 양영순(1971년 생)은 당선작 『누들누드』 단 한편으로 가능성 높은 신인에서 최고인기작가 또는 가장 영향력 있는 만화작가 중 한명이 됐다. 1998년 총 5권으로 완간 된 이 작품은 우리만화의 성표현 수위를 한 단계 높여 논 작품으로 평가 받고 있다. 『누들누드』의 성공으로 다음 작품 창작에 대한 절대적 자유를 얻은 양영순이 들고 나온 두 번째 작품이 『정크북』이다. 1998년 「영점프」에 연재했던 짧은 작품들을 서울문화사에서 1권의 책으로 출판했다. 

『누들누드』가 아무 거리낌 없이 폭발 직전의 성적 상상력을 토해내는 것이었다면 『정크북』은 제목 에서 알 수 있듯 온갖 잡다한 이야기를 양영순 식으로 풀어낸 것이다. 『누들누드』의 성공 후 몇몇 언론과 가졌던 인터뷰에서 양영순은 자신이 총각딱지를 때지 않았음을 확인시켜줬고 딱지 때지 못한 상상력이 『누들누드』에 녹아있음을 시사했었다. 양영순은 성적 분출 또는 욕망에 대한 억압에 시달리며 창작을 했고 이것이 해체되는 시기, 즉 결혼을 하고 나서 『누들누드』의 창작을 멈췄다. 딱지 땐 상상력이 진부해진 탓일까? 『정크북』에서 양영순이 보여 준 것은 질펀한 성적 농담이 아니라 수줍은 연애심리에 대한 해석과 거짓 상상상력에 대한 풍자, 일부러 알고 싶지 않은 것에 대한 추적이었다. 양영순이 그렸다는 것 외에는 한권으로 묶을만한 이유를 찾기 힘든 책이다. 

청소년보호법으로 성인만화잡지가 몽땅 폐간됐고 당대의 문화적 아이콘으로 거론될 법한 『누들누드』였지만 마땅히 연재할 곳도 없어져서 이렇다할 완결도 짓지 않은 모양으로 연재가 끝났다. 이 작품이 우리 만화와 문화 전체의 성적 표현 가능 수위를 높여놨다고는 하지만 높아진 표현 수위를 적용할 곳이 사라져 버린 마당이었다. 『정크북』은 그런 시기에 나온 소품이다. 당시 만화계에는 청소년지와 소년지, 순정지가 남아있었고 양영순은 『정크북』 이후에 청소년지 「영점프」에 『철견무적』을 고연령 취향의 순정지 「나인」에 『싸이캐치』를 연재했다. 『정크북』은 성인지 취향의 작품에서 성적 상상력의 맛난 부위를 슬슬 잘라 내기 위한 도마 역할을 했다. 스타가 된 양영순의 작품을 받기 위해 편집진은 이를 용인했고 작가는 다른 성향의 작품으로 거듭나기 위한 이 실험대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청소년판 『누들누들』로 읽힐만한 작가 자신의 결혼전후 이야기, SF 학원격투 만화를 표방했던 『철견무적』의 준비 운동 쯤으로 보이는 거대 로봇만화에 대한 비아냥, 『철견무적』과 『싸이캐치』를 떠올리게 만드는 피(생리혈)로 얼룩진 학원을 향한 농담 등. 『정크북』은 양영순 만화를 이루는 구성요소들을 색다르게 만나는 즐거움을 준다. 그리고 『누들누드』의 에너지가 2002년 현재 「일간스포츠」에 연재중인 같은 것 같지만 조금 다른 느낌의 『아색기가』로 이어지도록 견인한 작품이다. 『정크북』을 빼놓고 양영순의 창작 연표대로 작품을 읽은 뒤 이 작품을 보는 것과 그냥 연표대로 작품을 읽는 것의 차이만큼 『누들누드』와 『아색기가』는 다르다. 


글/ 박석환(만화평론가, www.parkseokhwan.com)



만화규장각, 부천만화정보센터, 2002 게재

이미지 맵

Parkseokhwan.com

박석환(만화평론가, 한국영상대 만화콘텐츠과 교수)

    'Critique/리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글에 남긴 여러분의 의견은 0개 입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