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릭터버스1.
북두칠성을 가슴에 세긴 사내
1. 켄시 로우 VS 켄시 로우
하라 테츠오의 박력 넘치는 필치와 화면구성, 대형 서사극 전문 스토리텔러 부론손의 능숙한 이야기 전개. 1990년대 초반 등장해서 밀레니언 셀러를 기록하고 스테디셀러로서의 위상을 획득한 작품이 <북두의 권>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 켄시 로우가 돌아왔다. ‘소년점프’ 6백 만 부 판매 신화를 만들어내며 일본 잡지만화의 황금기를 함께 했던 편집장 호리에 노부히코와 한 배를 타고 귀환환 켄시 로우의 무대는 <창천의 권>이다. <시티헌터>의 사에바 료와 카오리, 우리작품 <열혈강호>의 한비광도 함께 탄 청년 만화잡지 ‘코믹번치’의 창간 소식은 전 세계 만화팬의 최대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199X년 핵전쟁 후로 시작됐던 <북두의 권>의 이야기는 1935년 상해로 거슬러 올라가 <창천의 권>이라는 이름으로 무협 대전 액션물의 자리에 위치한다. 주인공은 북두신권의 계승자인 켄시 로우와 동명인 그의 아버지.
2. 흉내내기 주인공 켄시 로우
<북두의 권>의 주인공 켄시 로우는 캐릭터의 외형에서부터 내면, 그리고 그의 주변사 까지, 많은 부분을 멜깁슨의 <매드맥스Ⅱ>에 의존하고 있다. 매드맥스가 카체이서(자동차 추격물) 액션물의 주인공이라면 켄시 로우는 무협대전물의 주인공이다. 허리우드의 대표적인 마쵸 배우 멜깁슨이 자동차에 쏙 들어갈 정도로 얄상하게 생겼다면 켄시로우는 온 몸이 무기인 초인의 모습으로 마블 코믹스의 근육질 슈퍼영웅들을 떠올리게 한다. <매드맥스>의 설정을 맘껏 흉내낸 켄시 로우에게 전달된 또 하나의 흉내내기 아이템은 마크이다. 슈퍼맨의 S자나 배트맨의 박쥐문양 같은 영웅의 표식이 있다면 켄시 로우에게는 북두칠성 마크가 있다. 문신이나 상처의 이미지는 동네 양아치나 잡배들이 자신의 과거를 은연중에 드러냄으로서 상대적인 우월감을 확보하려는 장치로 읽혀왔다. 그래서 껄렁한 깡패가 아니라면 동양의 영웅들은 이를 감추려고 한다. 이 문신과 상처에는 나름의 전설이 담겨져 있어서 영웅 이야기의 해법이 된다. 그래서 대개는 이야기의 절정과 함께 그 실마리를 찾게 된다. 하지만 켄시 로우는 미국 만화의 주인공들처럼 이를 가슴에 드러내고 다닌다. 맨 살에 가죽옷을 입고, 가슴이 훤히 비칠 정도로 단추를 풀어헤친 켄시 로우. 얼핏보면 동네 양아치요, 자세히 보면 다양한 영웅신화의 절묘한 짬뽕이다.
3. 켄시 로우의 과장된 힘
켄시 로우의 세계는 다양한 영웅물의 장르적 코드를 집대성하고 있다. 무협 서사극의 비밀에 묻혀진 원한과 로맨스, 일본의 사무라이 액션 전대물, 미국만화의 슈퍼영웅물 등. 무수한 영웅들의 신화를 짬뽕하고 있는 켄시 로우는 이소룡, 슈퍼맨, 록키, 매드맥스 등의 이미지와 함께 그들이 공통적으로 간직한 캐릭터성을 한 몸에 담고 있다. 물론 이 오지람 넓은 캐릭터성의 본질은 `힘`이다.
일본식 스토리만화의 전형적인 장르 요소 중 하나는 ‘근성’이다. 짤막한 에피소드들의 감칠맛 나는 연결로 페이지에 페이지를 넘기게 만드는 스토리만화의 구조를 ‘힘의 구체화’라는 테마로 관찰한다면 그 안에는 ‘힘의 수련과 활용’이라는 절차가 드러난다. 대개의 근성물(팬시형 근성물의 주인공이 독고탁이라면 극화풍 근성물의 주인공은 오혜성 정도)은 힘을 얻기 위한 수련의 과정을 통하게 된다. 그러나 켄시 로우는 별도의 수련 과정을 지녔다기보다는 오디세이아처럼 목적지를 향해 유랑하는 과정 중에서 힘의 업그레이드를 이룬다. 수련 과정을 회상으로 간직하고 있는 켄시 로우는 그래서 더욱 더 과장된 모습이다. ‘가슴에 일곱 개의 상처를 지닌 남자와는 싸움을 논하지 마라’는 식의 전설이 무수하게 등장하고, 상대를 만나면 어김없이 그 전설을 확인시켜 주고 마는 켄시 로우. 켄시 로우는 이 드라마를 구성하기 위해 <북두의 권>이라는 세계에 액션 피규어(인물형 장난감 완구)처럼 딱딱하게 서 있는 캐릭터이다.
4. 켄시로우의 <창천의 권>
우끼유에(일본의 풍속화)에 그려진 일본인은 작은 체구에 비해 어마어마하게 큰 성기를 달고 있다. 19세기 유럽의 화가들에게 대단한 영향을 끼쳤다는 우끼요에의 과장 미학은 만화의 고유한 성격과 만나 ‘일본인은 태생적으로 만화를 좋아한다’는 인식을 주고 있다. 우끼요에(일본의 풍속화)의 ‘과장(과잉) 미학’이 남성의 드라마와 만나 잉태된 캐릭터가 곧 켄시 로우이다. 온몸에 처절한 운명과 막중한 의무를 지니고, 세상과 맞서서 지독히 개인적인 원인을 해결하기 위해 치를 떠는 사내. 이런 사내는 크나 큰 낭만 회오리를 독자에게 전달한다. 단 이들의 낭만은 대개 마론인형 처럼 관음적 요소를 지닌 여주인공의 등장과 맞물렸다. 그러나 켄시 로우에게 로맨스는 그다지 중요한 요소가 아니다. 남성들의 영화 <친구>에서 여자는 반쯤은 쓰레기 취급을 받았던 것처럼 켄시 로우에게도 여자는 그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여자 만화팬들이 중심이 된 일본의 동인만화계에서 지독한 비난과 함께 세라복 입은 켄시 로우 패러디만화 열풍이 있었던 것도 그런 이유 중 하나. <창천의 권>에 등장하는 켄시 로우의 아버지(켄시 로우) 역시 켄시 로우의 캐릭터성을 그대로 부여받은 인물이다. 슈퍼맨처럼 평소에는 돋보기 안경을 쓴 인물로 등장했다가, 화가 나면 안경을 벗고 머리를 헝클어 근육질을 드러내는 ‘변신코드’가 굉장히 심각한 듯 등장한다. 만화잡지 ‘코믹번치’의 한국어판이 업계에서 조심스럽게 거론되고 있어서 기가 막힐 정도로 심각한 액션 영웅을 곧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글/ 박석환(만화평론가, www.parkseokhwan.com)
씨네버스/ 북두칠성을 가슴에 새긴 사내, 켄시로우/ 2001-06-05
글에 남긴 여러분의 의견은 개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