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석환, 미야자키 하야오의 <미래소년 코난>, 씨네버스, 2001.01.09




애니랜드-추억의 TV만화


미야자키 하야오의 <미래소년 코난>


오후 5시 45분에서 6시, 또는 6시 30분까지. 그 어떤 부모도 그 시간대에 아이들을 TV 앞에서 내 몰 수가 없었다. 초등학생 아이부터 중고등학생 형제자매, 심지어는 부모들까지. "너 숙제는 했니?" 또는 "다른 데 틀어봐라!"라는 위협적인 물음은 뒤로 감추고 TV 앞에 줄을 섰다. 아직 그 맛을 모르던 눈치 없는 어른들이 가끔 다른 방송국의 뉴스나 다큐멘터리를 보자며 판을 깨곤 했고, 다음 날 아침 등교 길에서는 그 '방송국을 폭파해버리자'는 외침이 들리기도 했었다. 

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 중반까지 국내 TV방송은 그야말로 일본 산 만화영화 천국이었다. 이 천국의 지배자가 우리에게 모습을 보인 것은 5년 전쯤이다. 지배자를 불러낸 이들은 방송국을 폭파해서라도 온전히 그의 작품을 보고 싶었던 꼬맹이들일 것이다. 다행히 지배자는 꼬맹이들의 성장에 맞춰 자신의 작품을 꾸준히 업그레이드했고, 지배자의 위치를 고수하고 있었다. 

미국식 히어로물이었던 <레인보 특공대 로빈>, 마법소녀물의 선구작이었던 <요술공주 샐리>(원작 '마법소녀샐리'), 명작동화 유의 애니메이션으로 도에이 동화의 현재를 구축한 <장화 신은 고양이>, <동물 보물섬>, 꼬맹이들의 키워드였던 <서부소년차돌이>(원작 '황야의 소년 이사무') 그리고 하이디, 네로, 마르코, 앤, 홈즈 등 여전히 그 이름을 기억하게 하는 수많은 명작들이 그 시절, 그 시간을 채웠고 그는 극장용 대형화면에서 역시 건재함을 과시했다. 

3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20년이 흐른 뒤 ‘남겨진 섬’에서 할아버지와 살고 있는 12살 소년. 이 소년에게 찾아든 소녀 라나는 ‘보물섬의 지도’처럼 희망과 좌절 그리고 무엇보다 <원령공주>에서 보여줬던 ‘살아야 한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알렉산더 케이의 원작소설 <The Incredible Tide>를 미야자키답게, 그리고 ‘꿈 많은 소년’들을 위한 만화영화처럼 만들어 낸 작품이 <미래소년 코난>이다. 주인공 코난은 그 수많던 후일담의 근원처럼 어렸을 적 부모를 여윈 탓에 강력한 독립심과 함께 스스로 생존하는 법을 터득해야 했고, 어디라도 떠나야 하는 위치에 있다. 거기에 히어로가 지녀야할 특수한 능력(우습지만 가공할만한 발가락 힘)과 모든 아이들의 이입을 가능하게 만드는 솔직하고 단순한 성격. 또, 위기에 처한 소녀와 무언가 비밀스런 것을 전달해주고 떠날 할아버지, 위기를 전환시켜줄 동지(포비)를 만나면서 태생적으로 아찔한 모험을 벌려야 한다. 모든 소년들이 동경에 마지않는 그런 처지에 놓인 코난. 

나방처럼 생긴 비행정(기간트,Gigant)이 하늘을 날고, 마징가 제트의 유쾌한 전우였던 땅달이 로봇 같은 로보노이드가 사람 대신 일을 하는 곳에서 이 소년은 아이들이 펼쳐보고 싶어 안달인 모험을 즐긴다. 가공할 능력을 지닌 과학자의 손녀이자 텔레파시 능력을 지닌 아름다운 소녀를 울리지 않기 위해. 능력을 지녔으나 악보다 강하지 않아 정의라는 이름으로 형벌을 받고 있는 이들을 위해 코난은 자신의 모든 능력을 발휘한다. 

<미래소년 코난>은 스케일이 큰 모험극답게 여러 명의 캐릭터가 등장한다. 지금은 문법화된 이 캐릭터들은 하나 같이 어딘가 모자란 구석이 있는 인물들이었다. 결여의 흔적들을 감추기 위해 선이나 악으로 자신을 가장했고 결국에는 이를 극복해냈던 주인공들. 엘리트 야심가였던 레프카, 미워할 수 없는 악역이었던 다이스 선장, 팜므파탈의 매력을 지녔던 몬스리 등. 이들은 극중 자신의 위치를 확고히 하면서 이야기의 전개, 소년의 모험을 통해 ‘어른들도 아이들에게 배울 것’이 있음을 몸으로 실천해 보인다. 그리고 어느덧 극중 주인공화 된 꼬맹이 시청자들을 의젓하게 만들어 주곤 했다. 

TV를 통해 세 차례나 방영됐지만 아직도 볼만한 이 작품의 백미는 주제가와 함께 펼쳐지는 오프닝과 엔딩 타이틀이다. ‘푸른 바다 저 멀리 새 희망이 넘실거린다’로 시작되는 주제가는 여전히 노래 못하는 386들이나, 어깨동무가 필요한 자리의 18번. 그리고 코난이 되고 싶어 안달이었던 소년들이 이제 사내가 돼서 나른한 주말 오후 발가락의 힘으로 TV채널을 돌리거나(누르거나), 신문 따위를 끌어당긴다. 명작의 영향력이라고나 할까? 

중년의 사내 다이스가 꼬맹이 소녀 라나를 좋아하는 것처럼 묘사했던 미야자키의 속마음은 여전히 알 수 없지만 코난을 궁지에 몰았던 몬스리가 매력적으로 보인 이유는 알만하다. (끝)


씨네버스, 2001-01-09 게재


글/ 박석환(만화평론가, www.parkseokhwa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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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평론가 박석환 홈페이지. 만화 이론과 비평, 웹툰 리뷰, 인터뷰, 보도자료 등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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