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석환, 은하영웅전설의 라인하르트, 씨네버스, 2001.06.19


캐릭터버스 3.


아름다운 히어로의 표독스러운 야망


영웅들의 전설 

전설은 재미있다. 전설 따라 삼천리 같은 오래 된 옛 것의 이야기도 그렇거니와, 현재의 시점을 아주 먼 미래로 설정하고 이를 목격한 듯한 전지적 시점의 화자에게 듣는 것도 그렇다. 구술로 전해지는 전설이 허황 된 이미지를 남발하는 것에 그친다면 어문으로 전달되는 전설은 종이 한 장의 폭만큼이나 분명하고, 뚜렷한 기록만큼이나 선명하다. 그래서 구전되는 민가의 이야기보다 기록되는 왕조와 영웅들의 이야기는 탐스러운 ‘볼 것’, ‘읽을 거리’로서 가치를 지닌다. 전설이 가치를 지닌다는 것은 ‘가치’를 측정하는 현재의 시선에 따라 그 전설이 편집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냉전시대 전술 교본으로서 읽히던 <삼국지>가 현재에 이르러서는 인간경영을 위한 처세술 교본으로 읽히는 것은 이를 증명한다. 특정 지역에서, 고유한 역사적 토대를 지닌 곳에서 구축되는 전설은 나름의 지역성과 역사성을 지니게 마련이다. 그래서 현재와는 관계하지 않는 아주 먼 미래의 은하계에서 벌어지는, 벌어질 법한 전설에도 지금의 ‘가치’가 묻어나고, 그 가치는 때에 따라 달리 해석된다. 완결된 형태로 작가의 손을 떠난 이야기라 할 지라도 새로운 독자를 만나 다르게 해석될 수 있는 텍스트가 된다. 그 과정에서 고유한 영웅은 새로운 영웅 상에게 자리를 내주기도 하고, 가장 적절하다 믿었으나 실패한 전술은 전황을 잘 못 파악한 무능한 지휘자의 권능이 돼버리기도 한다. 


만화의 영원한 테마 ‘꿈, 도전, 승리’ 

일본의 스토리만화(망가)는 ‘꿈, 모험, 도전, 승리’라는 테마를 훈장처럼 달고 다닌다. 어떤 형식, 어떤 소재를 다루더라도 그 안에는 주인공의 꿈과 도전, 그리고 승리가 그려진다. 꿈을 지니게 하기 위한 장치로 시련을 주고, 도전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조력자와 연인을 주변에 서게 한다. 승리의 드라마를 연출하기 위해 지칠 줄 모르고 성장하는 대립자와 대립자와 만나기 전까지의 무수한 대전 상대를 만들어 간다. 학원만화이든, 스포츠만화이든 그것이 SF만화이든 다르지 않다. 더 이상 예전처럼 등장인물들의 관계도를 첫페이지에 수록하는 촌스러운 짓은 하지 않지만 익숙하게 작품에 몰입하고 빠르게 긴장감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관계도는 작품 초반에 선명하게 드러난다. 학원만화의 대개가 자기 성취를 위한 극기의 과정을 주 테마로 설정하면서 개인사에 의존하고 로봇대전물이나 사이보그물이 이를 SF적으로 해석하고 있다면, 우주함대 전쟁물은 대하 전쟁 서사물이나 역사시대물을 SF의 공간으로 이동시킨 것이다. 


영웅 선정을 위한 텍스트 

만화 <은하영웅전설>은 순정만화풍으로 구축한 SF 전쟁 서사물이고, 우주함대 전쟁물이다. 전제주의 국가 은하연방과 공화주의 국가 자유행성동맹의 정치적 혼란기와 지도층 세대 교체에 따른 대립을 아주 먼 미래의 은하계를 배경으로 묘사하고 있다. 은하연방의 우주함대 사령관으로 원수 계급장을 달고 있는 주인공 라인하르트는 순정만화풍의 금발 미소년이다. ‘조실부모’하고 어머니처럼 믿고 의지했던 누이를 권력자(황제의 후궁)에게 빼앗긴 핍박의 드라마를 지녔고, 권력 찬탈을 목표로 황제의 전쟁을 진두지휘하고 있다. 전제정치의 폐단으로 썩어빠진 왕조를 무너뜨리기 위해 한 걸음씩 황제에 근접하는 권위를 확보해 가는 주인공은 용병술 못지 않게 자신의 수하에 신뢰할 수 있는 인재를 등용하는 뛰어난 용인술을 보여준다-드라마 <태조왕건>의 무신 쿠테타가 연상되기도. 아름답고 냉철한 야망가 라인하르트가 자신의 과거사를 이유로 전제주의를 타파하는 전제주의의 구축을 꾀한다면 그의 야망에 재동을 걸고 나서는 자유행성동맹의 낭만적인 지략가 얀은 공화정치의 폐단(지자 확보에 우선하는)을 주시하며 평화로운 공조 체제 유지라는 입장으로 영웅신화를 구축한다. 일반적인 영웅 서사물이 지닌 교과서적인 히어로의 위치에서 그 외형상의 날카로운 아름다움으로 인해 ‘표독스러운’・‘은밀한’ 야망을 띄고 있는 라인하르트는 교과서적인 히어로 얀과 대비되는 주인공이다. ‘노력하지만 한계가 있는’, ‘노력하지 않는 듯 하지만 한계가 없는 듯 한’ 전쟁 천재들의 대립과 그들을 중심으로 등장하는 무수한 영웅 조력자들은 독자의 손에서 새로운 영웅 상이 논의 될 수 있도록 하는 훌륭한 텍스트가 된다. 


TIP 

원작 소설<은하영웅전설>(1권 1982년 발간, 총14권 1989년 완간)의 작가 다나카 요시키는 일본에서 책 쓴 돈으로 내는 세금이 가장 많은 사람 중 한 명이다. <창룡전>, <아루스란 전기> 등 많은 작품이 애니메이션, 게임, 만화 등으로 형태 변이를 이루었다. 이 글의 텍스트가 된 만화는 미치하라 카츠미가 원작 소설 1, 2권의 내용을 토대로 11권 분량으로 1988년 도쿠마 소덴에서 출판 한 것이다. 일본어판 발간 이후 국내 작가들의 창작 범위를 양껏 넓혀주기도 한 이 작품은 국내에서는 두 차례 해적판으로 발간된 후에 1999년 시공사에서 정식 한국어판이 발행됐다. 원작에 대한 이해가 없는 번역자의 오역(독일식 이름의 표기, 군사 용어, 대사 등)으로 인해 다나카 요시키의 국내 팬들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기도 했다.


글/ 박석환(만화평론가, www.parkseokhwan.com)


씨네버스/은하영웅전설 라인하르트/2001-06-19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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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평론가 박석환 홈페이지. 만화 이론과 비평, 웹툰 리뷰, 인터뷰, 보도자료 등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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