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석환, 만화잡지 [오즈]에 거는 기대, 코코리뷰, 1999

우리가 바라는 오즈, 아름답고 신비로운 [오즈]



단풍진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나 있었지요. 

두 길을 다 가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는 나그네의 몸이라

덤불 속으로 굽어 들어간 한쪽 길을 

아쉬운 마음으로 오래오래 보고 있었습니다.


어느날 강한 태풍이 불어닥쳐 행복했던 작은 소녀 도로시는 집을 잃어 버립니다. {오즈의 마법사}의 시작은 이랬던 것 같습니다. 도로시는 삽시간에 집을 잃어버렸고, 집을 찾기 위해 영험한 능력을 지닌 오즈의 마법사를 찾아 나섭니다. 어떻습니까? 지금 우리는 도로시가 되어 오즈로 향해야 하지 않습니까? 이른바 문화산업의 첨병 역할을 자임하고 나섰던 만화는 애니메이션의 붐에 자리를 빼앗겼고, 98년 만화사태를 불러왔던 스포츠 신문의 음란성 파문은 만화가와 언론인에게 각각 징역 1년을 구형하는 상황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수 년째 계속되어 온 출판불황과 IMF로 인한 원자재 가격 상승, 가계의 문화비 지출 급감 등도 우리가 도로시를 따라나서야 하는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더욱 불행한 것은 출판 만화계가 외적으로는 성장하고 있다는데 있습니다. 한국출판문화협회의 보고에 따르면 97년도 만화 발행 종 수는 6297종으로 전년대비 12.6%가 늘어났고, 발행 부수도 처음으로 2000만 부를 돌파한 2360만 5460부를 기록하면서 전년대비 30.9%의 성장세를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문화관광부에 납본된 만화도서에 의한 것으로 납본 되지 않은 것을 합한다면 발행 부수를 환산하기도 어려운 지경입니다. 이 대단한 생산력이 왜 불행하겠습니까? 우리가 그토록 바라던 만화세상을 만들어가고 있음이 확실해지는데 말입니다.

97년 말 통계로 도서대여점이 8700개소, 만화대여업소가 7670개소였습니다. 98년 한해동안 소규모 창업을 희망하던 수많은 실직자들이 만화대여업소를 늘리는데 기여했습니다. 실직의 고통으로 새로운 일에 대한 희망으로 들떠있는 얼뜨기 아저씨들을 데려다가 재고 만화 도서를 팔아먹고, 종 수와 부수를 늘리기 위해 다시금 만화공장 시스템을 가동하기 시작했습니다. 학원폭력만화라는 장르가 문법화되고 대여점용 만화도서인 코믹스 시장이 활성화되면서 우리는 다시 대본소의 일일만화 만들기(도제식 시스템으로 제작되는 만화도서)에 동참합니다. 명퇴자들의 손에 들린 두둑한 돈 봉투를 따먹기 위한 우리의 노력은 성공적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성공이라 말 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다시 이현세와 <<공포의 외인구단>>을 말해야 합니다. 이 한편의 작품은 흔히 '우리 만화계의 역량을 10년 앞당겼고, 앞당긴 10년만큼 우리만화를 고여 있게 했다'고 논의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코믹스라는 형태를 지닌, '학원 폭력만화 장르'라는 이현세와 <<공포의 외인구단>>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맘껏 이용하려 합니다. 이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10년을 하루같이 고여 있다가 이현세와 <<공포의 외인구단>>을 벗어던지고 새로운 만화세상을 만들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는 터에 다시 10년을 하루같이 고여 있어야 한다고 하는 것은 얼마나 난감한 일입니까.

대여점용 코믹스를 출판하고 있는 한 관계자는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투자비만 있고 운영자금이 없는 대여업소들이 하나 둘 쓰러지고 있다'고. '단기간의 가게 운영 수익만으로는 신간서적 구비가 불가능하다'고. '서점에서 만화도서 구비를 꺼리고 있기 때문에 고급만화, 전문만화의 출판 붐도 사그라들고 있다'고. 반면 '작가들의 원고료가 상승하면서 군소 출판사들이 무너지고, 자생의 방법으로 다시 일본만화의 재발간에 열을 올리고 있다'고. 그래서 우리는 도로시가 되야 합니다. 작은 소녀에게 집은 자신을 보호하고 길러주는 사회이고, 절대자입니다. 이것을 일순간에 잃은 소녀는 달리 할 일이 없습니다. 다시 그것을 찾아야 하는 수밖에. 그리고 그 방법을 지닌 이들을 만나는 수밖에. 우리에게 만화는 도로시의 집과도 같습니다. 나를 즐겁게 하고, 그 안에서 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하며, 그것 자체가 나의 보호장비가 되고, 나의 사회가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오즈로 가야 합니다. 도로시가 원래 자신의 집을 찾길 희망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희망이 담긴 집을 찾아 오즈로 가야 합니다.


그리고는 또 하나의 길을 택했지요.

두 길이 모두 아름다웠지만

그 길이 더 마음에 들었던 거겠지요. 

그 길은 풀이 더 푸르고, 내 발길을 기다리는 듯

발자국도 안 난 채 낙엽에 덮여 있었지요.

하기사 두 길이 거의 엇비슷한 상태였지만요.


길게 왔습니다. 그러고 보니 [오즈]라는 만화잡지가 내 앞에 펼쳐져 있습니다. 'DREAM of MANIA'라는 부재를 단 [OZ]. 열광적으로 만화에 빠져들 수 있는, 빠져든 마니아들을 위한 잡지가 되겠다고 말합니다. 신인 만화작가들과 아마츄어 만화가들의 단편 작품을 중심으로 만화관련기사와 평론, 정보 등이 수북합니다. 우리는 오즈로 가려는 길에 [오즈]를 선물 받았습니다. 타인의 꿈꾸기를 위해 밤을 세우던 일들은 잠시 접어두고 만화의 꿈을 찾아, 만화의 희망으로 지어진 집을 찾아가자는 여행길에 [오즈]를 만납니다. 그곳에는 용기를 얻기 위해, 따듯한 심장을 얻어 사람이 되기 위해 길을 떠나는 사자와 허수아비, 양철 나뭇꾼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사자와 허수아비, 그리고 양철 나뭇꾼을 만나 오즈로 향합니다.

우리가 바라는 오즈, [오즈]가 바라는 오즈를 찾아봅니다. 오즈에는 무엇이 있는고 하니 마법사가 있습니다. 우리의 바램을 알고 있을 마법사. [오즈]에는 무엇이 있는고 하니 만화가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만화는 창작의 자유스러움을 맘껏 즐기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글과 그림의 융합. 디지털에는 떨어진다고 하지만 금세기에 가장 탁월한 표현양식이고 기호였던 글과 그림. 만화가들은 이를 아무 구애없이 활용하고 있으리라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매체라는 함정에 빠져 허덕이는 매체의 생산자들을 말입니다. 자유스러운 매체라는 함의는 그 자체로 구속이 되곤 합니다. 그런 까닭인지 만화는 현실을 풍자할 뿐 현실을 담지 못한다는 오해를 갖고 있었습니다. 비현실적이라는 의미가 '만화'라고 믿어졌던 것도 사실입니다. 우리가 흔히 '작가주의 만화'니 '사실주의 만화'니 하는 것도 자유스러움의 구속을 벗어난 자유를 행사한 이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들입니다. 이뿐입니까? 만화는 '글'에 대한 인식욕이 떨어지는 아이들을 위한 '그림동화'라는 생각들도 있습니다. '글'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는 아이들을 '그림'이 이해시키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는 그대로 매체의 장점이기도 했지만 단점으로 인식됐습니다. '글'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이들은 '만화'를 대할 이유가 없으니 '만화는 아이들을 위한' 것이라고 확언하는 것입니다. 그릇된 생각입니다. 만화는 독자에게 이해를 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글의 이해를 돕기 위해 그림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그림의 이해를 위해 글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상호 표현의 한계들을 감싸주고, 독자의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작용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상호보완이 아닌 총체적 작용입니다. 한계를 감싸는 것이 아니라 효과적인 표현을 위한 창조행위입니다.

하지만 만화는 대다수의 잘못된 판단을 거듭하고 있던 이들에 의해 한동안 고행길에 올라야 했습니다. '아이들이 보는 것'이라는 사회적 함의와 '비현실적이고 자유스러운 표현 장르'라는 이해입니다. 독자는 전자와 후자 사이를 오갔고, 창작자는 전자의 늪에서 후자의 욕망에서 허덕이다가 지쳐버렸습니다. 결국 이는 만화라는 매체를 구속했고, 그야말로 '아이들의 문화'에서 허덕이게 만드는 동인이 됐습니다. 그러나 얼마쯤 우리는 기대감을 보기도 했습니다. 우리 곁에 다가왔던 몇몇의 작가들과 출판사들의 노력은 만화창작의 자유를 일깨웠습니다. 작가주의 만화가, 언더그라운드 만화가, 독립만화가, 비주류 만화가 등의 이름으로 그들이 왔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많은 자리를 내주지 못했습니다. 독자들의 외면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무엇보다 독자들을 찾아 나서는 출구가 없던 것입니다. 어렵게 그들이 작품을 엮고, 어찌어찌해서 책으로 만들어도 이를 담당할 유통시장이 없던 것입니다. 독자적인 유통망을 구성할 형편도 안됐고, 출판사업에 대한 마인드도 없습니다. 대안으로 제시됐던 통신판매, 직접판매 등의 방식도 기대 이하의 효과로 다가왔습니다. 그렇다고 시장의 한계가 뻔한, 말 그대로 상품성이 존재하지 않는 책을 전담해서 찍겠다고 하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출판사업에 대한 피해는 공익성이 있을 때야만 감수할 수 있다는 논리였습니다. 만화에서는 그런 것도 기대하기 어렵다는 태도로 보입니다.


더구나 그날 아침에는 두 길이 같은 모양으로 

흰 서리 위에 발자국 하나 나있지 않았었지요.

야! 나는 후일을 기약하고 한 갈래 길을 남겨 놓았지요!

다시 돌아오기 어려우리라 알고 있었지만


그래서 우리가 찾는 오즈는 멀기만 합니다. 만화를 '만화답게' 이해하자고 주장해보지만 결국 만화는 '만화 같은 것'으로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한 시인의 고백처럼 '꿈은 꿈일 뿐이듯' 여전히 만화는 만화일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늘상 새로운 것들을 소원했고, 새로움을 바래하는 독자들을 만나곤 했습니다. 극히 소수의 사람들의 바램일 것이라고 모른척하려 하지만 결국 몇몇 이들은 소수를 향하고 어느새 지쳐 쓰러져 버리곤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즈로 향하는 발걸음을 늦출 수가 없습니다. 동행을 자처했던 이들이 하나둘씩 사라지고 있는 탓입니다. 떠나는 사람들을 마중 나가기도 바쁜 터에 새로운 동행을 만나는 것은 그리 즐거운 일만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의 작품에서 갸웃거리는 창작욕과 시도들을 만날 때의 즐거움은 서운함 따위의 어설픈 감정을 잠시간 떨쳐버리게 합니다. 도로시와 그 일행은 오즈를 찾아 나서는 길에 자신들의 소원을 이룬 듯 합니다. 그러나 오즈의 마법사를 만날 수는 없었습니다. 그들의 소원은 그들 스스로의 움직임을 통해서, 깨달음을 통해서 얻어진 것들이었습니다. [오즈]가 우리의 오즈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아쉬운 부분이 이점입니다. 오즈에는 애시당초 마법사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만화잡지 [오즈]는 아름다운 희망이면서도 [오즈]의 만화가들은 어쩜 도로시 일행이 만났던 힘없고 초라한 사람일지 모릅니다.

개중 몇몇은 치열하게 만화창작에 대한 바램들을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발버둥치고 있고, 개중 몇은 자기표현에 심취되어 '만화'를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또, 몇은 만화에 대한 희망에 겨워 수련하지 않은 인식을 끄집어내느라 쌩고민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 이들을 하나로 묶어 바쁜 걸음을 재촉하고 있는 만화잡지 [오즈]는 신비롭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도 여전히 사람만이, 작가들만이 희망입니다. 네모란 책 속에 갇혀있다는 것 외에는 어떤 동일성도 쉽게 허락하지 않는 [오즈]의 작가들, 그들은 우리의 희망이기에 아름답습니다.


먼 훗날 난 어디선가

한숨 지으며 말하겠지요.

'숲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는데, 나는-

나는 사람이 덜 다닌 길을 택했지요. 그런데,

그것이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답니다'라고.

 


글/ 박석환(만화평론가, www.parkseokhwa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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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평론가 박석환 홈페이지. 만화 이론과 비평, 웹툰 리뷰, 인터뷰, 보도자료 등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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