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석환, 허영만 김세영의 사랑해, 코코리뷰, 1999


다마고치의 생을 움켜쥐는 것보다 사람이 되는 사랑을 해라

- 사랑은 사람을 만드는 기술입니다 



사랑해라고 말하는 사랑을 기억합니까


채찍을 들고서, 감호소의 철창을 사이에 두고서, 무턱대고 총질을 하면서도 그들은 두 사람간의 관계를 좁힐 수 있는 유일무이한 주문 처럼 '사랑해'라고 말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그렇게 어렵사리 '사랑해'라고 말하는 사람들 속에서 통닭 냄새 정도에 구역질을 하는 여자가 김세영과 허영만의 만화 <사랑해>에 나오는 나영희이다. 수줍게 '사랑…… 무슨 뜻 인지나 알고들 말하는 걸까?' 라며 스물 한 살에 혼자서 알아낸 사랑을 대견스러워 하는 사람.

이 이야기는 만화스토리작가 석철수가 친구의 소개로 만난 14살 연하의 여자 나영희와 결혼을 하기 전에, 그리고 그 후에 겪는 에피소드들로 이루어져 있다. 두 사람이 만나서 사랑을 느끼고, 그것을 보여지는 실체로 만들어가는 과정을 유치할 정도로 진지한 사랑의 시, 명언들을 통해 엮어 낸 작품이다. 국어 교과서에 등장해서 낯설지 않은 철수와 영희. 우리에겐 너무도 오래전부터 연인이었을 이들이 이제야 어른이 돼서 결혼을 한다. 사랑했고, 또 사랑하고 있는 이들이면 누구나 한번쯤 해봤음직한 '능글 쌉싸름한 표현'들이 담겨져 있는 이 만화는 우리에게 어제였을 수도, 아주 오래 전의 일일 수도 있는 사랑의 기억을 꺼내 놓으라고 말한다. 시인 장정일의 표현을 빌리자면 사랑의 기억을 꺼내놓고 '맛있게 핥아 먹으라'고 하는 것이다. 다음은 내가 핥아 먹은 맛있는 사랑의 기억 중 한 토막이다. 


사랑은 날개를 단 사람 


스무 살. 만난 지 백일을 기념해서 반지를 끼워주고는 '사랑해'라고 말했다. 쉽게 '사랑해' 라고 말했었다. 그보다 더한 말을 모르는 까닭이다. 세상의 어떤 단어가 지금 그 사람의 모습을, 내 감정을 흉내낼 수 있단 말인가? 그럼에도 온 밤을 지세워 나의 감정을 나열하려고 노력했다. 전자제품 설명서에 쓰여진 간결한 문장들. 그 정도면 넉넉히 나의 사랑을 자랑할 수 있을 것이라 믿으면서도, 말과 글에 꽃 단장을 하고 싶었다. 결국은 '사랑해'라고 말하는 것 이상의 표현이 없다는 결론을 내리면서도.


"너를 보면 이렇듯 가벼워지니, 너는 아마 날개인가 봐. 내게는."


가끔은 그 사람에게 단내 나는 말을 하기도 했다. 사실은 자꾸 커가는 사랑이 부담스럽다고 말하려 했는지도 모른다. 그를 만나서 가벼워지는 기분을 느껴야 할 정도로 스무 살의 삶이 내겐 무겁고 고단하기만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했을 때 진학이나 취업에 대한 희망보다는 술집에서 주민등록증을 까 보일 수 있다는 것에 더 기뻐했었다. 이것도 저것도 재미없는 스무 살의 한 때가 오면 '군대에 가겠다'고 말하면서 '바람은 이럴 때 뭐 하는 지 몰라. 폼 안 나게' 라며 맥없이 웃고 다녔다. 어른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한심하기 짝이 없는 놈'이 나였다. 반면 그 사람은 남들 한번 들어가기도 힘든 대학을 포기하고 적성에 맞는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는 소신과 열정을 지닌 여자였다. 한 살 연상의 여자. 그 사람이 아르바이트 끝나는 시간에 집 앞 공원으로 찾아와 주지 않는다면, 회사에서 퇴근한 누나가 '점심은 먹었니?'라며 방문을 열지 않는다면 죽은 듯이 자고 있었을 스무 살의 나는 아무런 희망도 준비하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가끔은 그 사람에게 '사랑해'라고 말하는 것이 죄스럽기도 했었다. 하지만 희망없는 스무 살의 남자에게 1살 연상의 여자는 부끄러울 만큼 큰 도움이었다. 술과 담뱃값을 쥐어주는 것이 도움의 전부는 아니었다. 그 사람은 '놓쳐버릴 것만 같다고, 놔 버릴 것만 같다고' 생각되던 스물 살의 삶을 용케도 쥐고 있게 하는 도움이었다. 

군대에 갔다. 군대에서 나왔다. 그 사람과는 다른 이들처럼 몇 번을 헤어지고, 다시 만났다. 그때마다 죄스럽게, 부끄럽게 '사랑해'라고 말했다. 조금씩 희망을 준비했음으로, 희망이 없던 시기를 지켜봤던 그 사람이 필요했음으로, 그리고 내가 더 아플 것이 두려워 '사랑해'라고 말했다. '사랑해'라고 몇 번을 더 말했던지, 우리는 결혼을 했다. 영희와 철수의 고민과 똑 같은 고민을 만든 뒤에야 말이다.


피로 쓰여진 사랑, 사람이 되는 사랑


다시, 아름다운 감성으로 풀어낸 김세영과 허영만의 <사랑해>를 보자. 그 안에는 나의 이야기, 당신의 이야기가 함께 담겨있다. 

'사랑의 기술'에 미흡했던 영희가 임신을 했다. 사랑의 좋은 느낌 정도로 믿었던 것에 피가 붙고 살이 붙어서 사람이 돼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사랑이 사람이 된 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하지만 철수에게 임신 사실을 알려야 한다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혹시라도 그가 '임신 후 결혼' 이라는 상황을 원하지 않으면 어쩌나 고민 인 것이다. 이런 고민들은 내가 잠든 사이, 당신이 잠든 사이에도 '사랑해'라는 말만큼이나 여기저기에서 생겨나고 있을 것이다. 영희와 철수 사이에 태어날 여자아이 석지우는 이런 고민들을 한 마디 외침으로 다독였다. 


"지우다니! 난 연필로 쓴 사랑이 아니야. 나는 피로 쓰여진 사랑이야." 


영화 <마이키 이야기>의 마이키처럼 이 만화에 등장하는 여자아이 지우도 태아였을 때부터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지우는 처음엔 사랑이라는 보이지 않는 개념이었다. 그리고 나중에 볼 수 있는 사람, 볼 수 있는 두 사람의 사랑으로 등장한다. 그래서 이 만화는 '지우의 이야기'이기도, '사랑이라는 이름을 지닌 아이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한때 이문세가 불렀던 노래 중에 <이별이야기>라는 것이 있었다. '탁자 위에 물로 쓰신 마지막 그 한마디. 사랑해~.' 

물로 쓴 '사랑해'도 '이렇게 눈물만'인데 피로 쓴 '사랑해'를 어찌 지울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영희와 철수는 결혼을 했고, 나는 그 사람과 결혼을 했다. 말로만 떠들었던, 종이 위에다나 적어뒀던 '사랑해'가 눈으로 볼 수 있는 '사랑해'로, 사람이 되는 사랑으로 바뀔 것에 감사하면서. 


사랑의 기술을 총 동원해서 만든 것


성인남녀, 부부의 삶에서 아기는 둘의 사랑만큼 커가기도 하고 작아지기도 한다. 그래서 아기는 두 사람의 사랑을 평가하는 감정관이자, 결혼 보고서의 작성자요, 사랑의 리트머스 종이이다. 아기는 엄마의 뱃속에서 밖으로 나오면서 체온이 떨어진다고 한다. 그것은 아기가 따듯한 나라에서 추운 나라로 가기 때문이란다. 그렇게 태어난 아기의 임무는 추운 나라를 따듯하게 만드는 것이다. 아기는 성인 남녀, 그의 부모가 만들어낸 사랑의 실체이고, 두 사람이 더 해 가는 '사랑의 정의'이기도 하다. 그래서 사랑은 세상을 따듯하게 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사랑은 쉽게 부서진다. 차가운 유리 처럼. 사랑하는 동안을 맘껏 기억하고 담아냈던 거울 역시 차갑고 쉽게 부서진다. 조각조각 부서지고, 파편처럼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다. 달빛에도 부서지는 유리처럼. 잠깐 한눈을 팔면 사랑은 유리처럼 부서져 버리고 차갑게 나뒹군다. 젊다는 것, 그것은 늘상 새로운 것을 가질 수 있고, 희망할 수 있는 시간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사랑은, 그로인해 주어지는 사람은 늘상 새로울 수 없다. 더군다나 그것이 짧은 즐거움을 목적으로 '연필로 쓰여진 사랑'이 아닐 때는 더욱 그렇다. 사랑이 주는 것은 사람. 사람은 다마곶찌로는 도저히 흉내낼 수도, 연속시킬 수도 없는 고통과 즐거움을 선물한다. 아기는 그렇게 눈으로 측정할 수 있는 사랑의 잣대이다. 아기는 온갖 '사랑의 기술'을 동원하여 만들어낸 결정이다. 


글/ 박석환(만화평론가, www.parkseokhwan.com )

이미지 맵

Parkseokhwan

만화평론가 박석환 홈페이지. 만화 이론과 비평, 웹툰 리뷰, 인터뷰, 보도자료 등 게재

    'Critique/리뷰' 카테고리의 다른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