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프랑스 출장기
1. 평창동계올림픽 성공 기원 프랑스 만화전시 및 프로모션
2018년 2월 9일부터 25일까지 강원도 평창에서 동계올림픽이 열린다. 1988년 서울올림픽, 2002년 한일월드컵에 견줄만한 메가이벤트이다. 만화계도 평창동계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를 기원하며 다양한 활동을 펼쳐왔다. 지난 1월 24일 프랑스 파리한국문화원에서 열린 ‘웹툰, 스페셜 평창’ 전시는 한국만화영상진흥원을 중심으로 정부와 만화계가 함께 한 평창동계올림픽 성공 기원 행사의 최종판이었다. 첫 번째 전시는 지난해 12월 강원도 강릉 임당생활문화센터에서 열렸다. 두 번째 전시는 지난 1월 10일 미국 LA한국문화원과 LA아트쇼 현장에서 열렸다. 프랑스 전시는 세 번째로 파리에 있는 주 프랑스 한국문화원과 앙굴렘국제만화페스티벌(Festival International de la Bande Dessinée d’Angoulême) 현장에서 열렸다.
전시는 기성작가가 작업한 ‘평창동계올림픽 홍보웹툰 제작 지원작’, 신예작가와 일반인들이 참여한 ‘동계올림픽 웹툰 공모전 선정작’, 카툰작가들이 참여한 ‘동계스포츠 소재 기획 작품’ 등으로 구성됐다.
작품 준비는 2016년 8월부터 시작됐다. 한국만화영상진흥원은 평창동계올림픽 홍보를 목적으로 동계스포츠 소재 웹툰 제작 지원 사업을 발표했다. 공모를 통해 각 6화 분량의 웹툰 2작품을 선정해 제작과 유통을 지원하기로 했다. 같은 해 9월 이영곤 작가의 ‘하나 된 열정’과 곽인근 작가의 ‘리드 미 컬링’이 지원작으로 선정됐다. 이영곤 작가는 컬링·스피드스케이팅·스노우보드·스켈레톤 등을 소재로 한 옴니버스 단편 웹툰을 창작했고 곽인근 작가는 작은 마을에서 열리는 컬링 대회를 소재로 한 연재 웹툰을 작업했다. 6개 월 여의 작업 끝에 완성된 웹툰은 2017년 3월 케이툰(https://www.myktoon.com/web/works/list.kt?worksseq=6254)에 연재되며 일반에 최초 공개 됐다.
동계올림픽 웹툰 공모전은 전국 30개 곳에 위치한 웹툰창작체험관 수강생들을 대상으로 진행됐다. 2017년 3월 공고 후 체험관 멘토와 수강생 출신 멘티가 팀을 이뤄 참여했다. 예선과 본선을 거쳐 같은 해 11월 총 19편(어린이부 5편, 청소년부 7편, 일반부 7편)의 작품이 수상작으로 선정됐다. 어린이부 대상에는 군포시평생학습원 체험관의 김다현(‘고스트스포츠’), 청소년부 대상에는 한국영상대학교 체험관의 임형영(‘딛다’), 최우수상은 전라북도문화콘텐츠산업진흥원 체험관의 김다인(‘Draw’), 일반부 대상에는 목원대학교 체험관의 김대훈/이동훈(‘우리는 평창으로 간다’), 최우수상은 경상남도문화예술진흥원 체험관의 하강호(‘승리의 비결’) 등이 수상했다. 선정작은 강릉 전시에서 최초 공개됐다.
한국카툰협회 회원들이 ‘스마일 평창’을 테마로 그린 기획 카툰 40여 편도 강릉 전시에서 처음 공개됐다. 동계스포츠를 소재로 펼쳐낸 한 컷의 기발한 유머는 웃음뿐만 아니라 다양한 해석과 감상을 가능하게 했다. 한국 서정 카툰의 대가 조관제 회장을 중심으로 사이로, 조항리, 이해광, 성문기, 김평현, 백영욱 작가 등 현존하는 카툰작가 대부분의 작품이 출품되어(https://www.coreacartoon.com/pyeongchang2018) 한국카툰의 전체상을 가늠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홍보 웹툰, 공모전 당선작, 기획 카툰까지. 1년 6개 월 여의 준비 기간을 거쳐 창작된 작품들은 강원도 강릉 전시에서 한 자리에 모였다. 그리고 바다 건너 미국으로, 대륙을 넘어 프랑스로 갔다. 강릉 전시가 만화계가 참여해 평창동계올림픽에 대한 국민적 관심을 고취하는 역할을 했다면 LA에서 열린 미국 전시는 만화를 통해 평창동계올림픽을 해외에 홍보하는 역할을 했다. 파리와 앙굴렘에서 열린 프랑스 전시와 이벤트는 올림픽 홍보와 함께 세계만화의 한 장르로 성장한 웹툰을 세계인에게 더 널리 알리라는 임무도 있었다.
1월 23일 프랑스 파리로 떠나기 위해 인천공항에 모인 전시 참가단은 총 20명. 한국만화영상진흥원 임직원 7명(김동화, 안종철, 김대진, 김태훈, 최하전, 김보금, 문가연) 카툰전시 참여 작가 2명(백영욱, 김평현), 공모전 당선 작가 4명(김대훈, 하강호, 임형영, 김다인)과 당선 작가를 배출한 웹툰창작체험관 멘토 4명(장효진, 김보람, 박석환, 김은희), 초대작가 1명(김정기), 웹툰작가/산업체 대표 2명(전선욱, 이소현)이었다. 전시대행사 임직원(이현정, 양동석 등)과 현지 가이드(김성재, 문우림 등)를 포함하면 총 28명의 대규모 참가단이다. 공모전 수상작가와 멘토는 수상의 특전을 누리며 행사를 참관하면 됐지만 다른 참가단에게는 막중한 개별 임무가 부여됐다. 인천공항 제2여객터미널에 집결한 참가단은 각자의 임무를 재확인했다. 적지 않은 긴장과 결의가 흘렀다. 참가단은 한 자리에 모여 단체사진을 촬영한 뒤 비행기에 탑승했다. 시간을 거슬러 날아가는 12시간의 비행. 파리 드골공항은 10일 이상 내린 비에 푹 젖어 있었다.
진흥원 참가단은 도착하자마자 파리 숙소에 짐을 풀고 전시가 열릴 한국문화원으로 향했다. 나머지 참가단은 인근 레스토랑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에펠탑과 개선문을 둘러봤다. 프랑스에서의 첫 밤이 지났다. 다음날, 1월 24일 18시. 한국문화원 갤러리에서 ‘웹툰, 스페셜 평창’ 전시 오프닝 행사와 이벤트가 열린다. 바쁘게 시작된 아침. 일부는 전시장으로 가 막바지 점검을 했고 일부는 현지 특파원/기자 간담회를 준비했다. 물론, 참관이 주 목적이었던 일부는 ‘공식 일정에 따라’ 루브르 박물관과 오르세 미술관을 돌며 눈과 마음의 호사를 누리기도 했다.
전시가 열린 한국문화원은 만화계와 인연이 깊은 곳이다. 2003년 앙굴렘국제만화페스티벌에 한국이 주빈국으로 참가했을 때 거점이 됐던 곳이고 2009년 2월에는 한국만화 탄생100주년 기념전시, 2010년 2월에는 대한민국만화대상 수상작가 특별전시가 열렸다. 당시 한국문화원의 7대 원장 최준호(임기 2007~2011)가 ‘꺼벙이’로 유명한 만화가 길창덕(생몰 1930~2010)을 장인어른이라고 밝혀 만화인들 사이에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 날 주 프랑스 한국문화원은 마치 파리에 있는 한국만화홍보관 같았다. 유리 외벽에는 웹툰 전시를 알리는 대형 안내물이 부착됐고 로비에는 평창동계올림픽 마스코트 수호랑과 패럴림픽 마스코트 반다비 전신인형이 방문객을 맞이했다. 전시의 시작은 카툰협회 회원들의 작품으로 채워졌다. 겨울 스포츠를 소재로 창작한 40여 점의 카툰은 전통적인 패널 전시 방식을 택한 것도 있지만 동적인 화면 구성과 연출 방식을 적용해 디지털 액자에 전시한 작품도 있었다. 이른바 움직이는 카툰으로 마지막 프레임에 메시지의 변화나 반전을 꾀해 웃음을 유발했다.
두 번째 전시 존은 공모전 수상작들로 꾸며졌다. 평창올림픽을 소재로 한 웹툰을 프랑스어로 번역해 태블릿PC에서 볼 수 있도록 했다. 웹툰은 개인미디어를 활용해 즐기는 콘텐츠인 만큼 개방된 전시공간에서 열람하고 의미를 파악하는 데는 다소 어려움이 있었다. 하지만 프랑스 만화팬들은 다소 부적합한 환경 속에서도 이 색다른 방식의 만화에 담긴 내용과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몰두했다. 세 번째 존에는 평창올림픽 홍보웹툰이 디지털본과 출판본으로 전시됐고 네 번째 존에는 한국에서 유행하고 있는 웹툰에 대한 소개가 이뤄졌다. 라인웹툰, 레진코믹스, 타파스미디어, 델리툰, 태피툰 등 영미권과 프랑스어권에서 웹툰서비스를 하고 있는 업체의 작품이 소개됐다. 다섯 번째 존에서는 VR기기를 머리에 쓰고 미래의 만화를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됐다.
갤러리 중앙에서는 백영욱 작가의 드로잉쇼가 진행됐다. 대형 캔버스 앞에 선 백작가는 거칠고 빠른 붓 선으로 강렬한 힘이 느껴지는 수호랑과 반다비를 그려냈다. 하키 스틱을 든 호랑이와 곰이 한반도 마크를 달고 경기하는 장면은 갤러리에 선 이들에게 진한 감동을 줬다. 이벤트 존에서는 김평현 작가가 현지인들을 대상으로 캐리커처를 그려주는 행사를 했다. 김작가는 프랑스인 특유의 얼굴을 간결하고 정감어린 펜 선에 담았다.
오프닝 행사는 컨퍼런스를 겸해서 진행됐다. 개회사에서 박재범 한국문화원장은 ‘2003년 앙굴렘만화축제에 한국만화 특별전이 열리면서 우리만화의 세계시장 진출이 이뤄졌다’며 이번 전시가 ‘평창동계올림픽은 물론이고 한국이 만들어낸 웹툰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했다. 안종철 한국만화영상진흥원장은 축사를 통해 주 프랑스 한국문화원과 우리만화의 인연에 감사함을 전하며 ‘한국만화의 디지털화가 일단락 된 만큼 글로벌화를 위해 함께 노력하자고 제안했다.’ 컨퍼런스는 프랑스 만화평론가 로랑 멜리키앙(Laurent Mélikian)의 사회로 진행됐다. 한국만화영상진흥원 이사장인 김동화 작가, 네이버웹툰에 ‘프리드로우’를 연재하고 있는 전선욱 작가가 참여했다. 유럽만화계에 대부분의 작품이 번역 출판되면서 수출유공자 표창을 받기도 한 김동화 작가는 자신의 작업방식을 중심으로 웹툰의 변화에 대해 이야기했고 전선욱 작가는 디지털 방식의 작업 과정을 소개하며 한국식 디지털만화의 생산과 소비 방식이 좀 더 넓게 퍼지기 바란다고 말했다.
컨퍼런스 후 이어진 간담회 자리에서 주 프랑스 대한민국 대사 최종문은 오프닝 행사를 찾은 100여 명의 프랑스인들과 언론사의 취재 열기에 놀랐다며 만화에 얽힌 자신의 사연을 털어놓기도 했다. 최대사는 어린 시절 ‘땡이’ 시리즈로 유명한 임창 작가의 옆집에 살면서 자녀들과 친구 사이였다고 한다. 땡이가 펼쳤던 모험과 도전이 평생 외교관으로 살았던 자신의 삶을 위로하고 지탱해줬다며 ‘한국 만화가 세계인의 마음을 위로하고 삶을 지탱하는 매개체가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동태탕과 와인을 함께 한 밤. 수호랑과 반다비가 하나가 되고 한국의 만화인과 정책가들이 프랑스의 만화인들과 하나가 된 시간이었다. 만화가 당대의 재미를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위태한 시간마다 우리와 함께하고 있다는 것을 재확인한 밤이기도 했다.
2. 프랑스 앙굴렘국제만화페스티벌과 한국 만화
1월 25일 이른 아침. 파리는 여전히 비에 잠겨 있었다. 센 강은 지속된 비로 한계 수위를 넘었다는 보도가 이어졌다. 루브르 박물관 수장고에서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짐을 싸고 있다고 했다. 참가단은 숙소를 나와 파리 몽빠르나스역으로 이동했다. 역에서 간단히 아침을 하고 앙굴렘으로 가는 기차에 올랐다. TGV로 2시간 거리. 세계인의 만화도시, 앙굴렘으로 가는 기차 안에는 자신이 만화도시로 향하는 만화인 또는 만화팬 임을 알리는 표식들이 넘쳐났다. 만화캐릭터가 그려진 의상을 입은 사람, 만화 회사 로고가 선명한 버튼을 단 사람, 앙굴렘 팜플렛을 펼쳐놓고 관람 동선을 짜고 있는 사람 등등. 그 사람들 속에 우리도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앙굴렘국제만화페스티벌(Festival International de la Bande Dessinée d’Angoulême)은 1974년 시작해 올 해 46회 째 행사가 개최된다. 1월 24일부터 28일까지 열리는 올 해 행사에는 2천여 명의 작가가 참여하고 387개의 크고 작은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23개국의 만화관계자들과 228개의 만화출판사, 835명의 내외신 기자가 참가한다. 행사 조직위원회가 예상하고 있는 관람객 수는 27만 여 명. 프랑스 서부 샤랑트 주에 있는 인구 5만(2006년 기준)의 작은 도시가 이 기간 중 전 세계 만화인들의 성지로 뒤바뀐다.
프랑스 만화는 통상 BD(베데, 방드데시네, Bande Dessinee)라고 불리며 형식적 특징은 ‘48CC’로 요약된다. 48쪽의 컬러만화를 하드커버로 출판한다는 의미이다. 제한된 형식에 맞춰 내용도 작가의 경험담이나 내면의 고백, 성찰이 주를 이룬다. 이 같은 특징으로 인해 프랑스에서 만화는 앨범이라고 불리며 제9의 예술로 추앙되기도 한다. 24~32페이지 분량의 중철 제본을 한 영미권 코믹북(Comicbook)과 거친 만화용지에 흑백 인쇄된 일본의 망가(Manga), 망가의 전통 속에서 이해되고 있는 한국의 만화(Manhwa)와는 다른 모습이다. 이런 차이점으로 인해 그간 만화와 베데는 서로 다른 길을 걸어왔다. 베데의 극도로 제한된 페이지 형식은 절제된 스토리라인과 함축적 이미지 컷으로 발전했다. 반면, 일본의 망가는 영화적 연출과 전개방식을 제한 없이 컷에 담아 장편 서사를 만들어냈다. 베데가 고급화 전략을 취했다면 망가는 대중화 전략을 취했다. 프랑스 만화팬들은 자국의 베데와 일본의 망가, 미국의 코믹북을 세계 만화의 주류 형식으로 소비하고 있다.
올 해 행사에서도 앙굴렘은 베데와 망가 그리고 코믹북에 전시 공간 대부분을 할애했다. 특히 망가에 대한 배려가 눈에 띄었다. 프랑스 만화계 내에서 망가의 상업적 영향력이 얼마나 커졌는지를 체감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앙굴렘 시의 상징적 공간이기도 한 앙굴렘박물관에 ‘망가의 신’ 데즈카 오사무 전시가 열렸다. 같은 공간에서 프랑스-벨기에 만화의 황금기를 대표하는 작가 자끄 마르탱(Jacques Martin)의 전시도 열렸다. 대표 캐릭터 ‘알릭스’의 70주년을 기념하는 전시였지만 망가의 신과 아톰에 가려 힘을 쓰지 못하는 형국이었다. 2017년 그랑프리 수상 작가인 코제(Cosey, 스위스 출신)가 유럽만화의 저력을 보여주는 전시를 펼쳐 보였지만 액자 속에 갇힌 대표 캐릭터 ‘조나탕(Jonathan)’의 모험은 ‘몬스터’의 우라사와 나오키와 ‘페어리테일’의 마시마 히로가 보여준 스펙터클을 넘지 못했다. 오사무와 나오키의 전시는 마치 망가가 어떻게 발전했고 현재 어떤 위상을 지니고 있는지 베데의 사례를 제시하며 설명하는 것 같았다.
현재 5천6백억 원 규모로 추정되는 프랑스 만화 시장은 베데와 망가가 양분하고 있다. 이 시장에 한국만화가 처음 등장한 것은 1994년이다. 한국만화가협회(당시 회장 권영섭)가 이현세, 이두호 등 만화가 14명의 작품 24편을 들고 참가(한겨레, 1994.01.25.)했다. 1995년 정부 주도하에 제1회 서울국제만화페스티벌이 개최되면서 앙굴렘국제만화페스티벌의 역대 그랑프리 수상작 22점에 대한 전시가 열렸다. 이후 한국만화계와 앙굴렘의 교류는 지속됐다. 공식적으로 한국관 부스를 처음 연 것은 1999년 전시(경향신문, 1999.01.28.)에서였다. 획기적 전기가 된 것은 2003년이다. 일군의 한국 만화가들과 행정가들이 2002년 앙굴렘국제만화페스티벌을 찾았고 2003년 앙굴렘에서 대규모로 한국만화특별전을 개최했다. 당시 한국만화계는 일본식 망가가 주류를 이뤘고 IT기술의 발전과 함께 디지털만화가 등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한국적 정서와 작가주의적 성향을 지닌 이른바 문예만화가 한 장르를 형성하고 있었다. 당시 한국만화특별전은 이처럼 복잡다단하게 전개된 한국만화의 전체상을 그대로 재현했다.
이에 대한 프랑스 만화계의 시선은 독특했다. 코믹스라 불리기도 했던 한국의 일본식 망가에 대해서는 망가에 비해 표현이 순하고 절제되어 청소년에게 좋은 만화로, 디지털만화는 아카데믹한 실험이나 도전 정도로 평가했다. 반면, 문예만화에 대한 관심은 뜨거웠다. 한국의 문예만화는 작가의 고백 서사라는 베데의 내용과 망가의 장편 서사 형식이 혼재되어 있었다. 베데는 아니고 망가와는 다른 중간 수준의 콘텐츠를 한국 만화에서 발견한 것이다.
2003년 앙굴렘에서 한국만화특별전이 열리고 그 해 44종의 한국만화가 프랑스에서 출판됐다. 2006년에는 259종의 만화가 프랑스 만화팬들을 찾았다. 같은 기간 망가가 1,110종 발행된 것에 비하면 놀라운 수치다. 이 시기, 가장 환대를 받았던 작가가 김동화이다. ‘황토빛이야기’ ‘기생이야기’ 등 다수의 작품이 유럽에 수출되면서 기대 이상의 판매 실적을 올렸다. 김동화는 이를 계기로 만화가로서는 유일무이하게 한국 정부가 수여한 수출유공자 표창을 받기도 했다. 반면, 2016년 현재 프랑스에서 출판된 한국만화는 13종에 불과하다. 같은 기간 망가는 1,494종이 발행(스트라베이스, 해외만화시장연구, 한국만화영상진흥원, 2017. 참고) 됐다. 2006년 4배 차이였던 것이 10년 새 10배 차이로 벌어졌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물론, 이 수치는 출판만화를 비교한 것이다. 그간 한국만화는 출판만화가 쇠퇴하면서 디지털만화라 할 수 있는 웹툰을 중심으로 발전했다. 출판만화의 수출 종수는 대폭 줄었지만 프랑스어 웹툰의 서비스 종수는 증가하고 있다. 대표적인 프랑스어권 웹툰사이트 델리툰에 게재된 작품은 대부분 한국 작품이다.
한국만화계는 2000년 이후 빠른 속도로 디지털화를 받아들였다. 디지털화 되고 있는 내수 시장의 변화를 적극적으로 해외 만화계에 알리기도 했다. 지난 2013년 앙굴렘에서 두 번째 열린 한국만화특별전의 주제는 ‘만화 그 다음’이었다. 이 전시에서 한국만화계는 2003년과는 전혀 다른 다음 시대의 만화 즉 ‘웹툰’을 소개했다. 올 해 앙굴렘에서도 한국만화계는 웹툰에 집중했다.
25일에는 프랑스만화가협회(ADA BD)와 함께 ENJMIN(국립디지털게임미디어학교) 대강당에서 ‘한불 경험 교류’라는 주제로 웹툰컨퍼런스를 개최했고 27일에는 웹툰작가 전선욱의 드로잉쇼를 망가파빌리온에서 진행했다. 같은 날 델리툰과 함께 웹툰아뜰리에를 열었다. 컨퍼런스에서는 카카오페이지(포도트리)의 이소현 팀장이 웹툰을 중심으로 발전한 한국만화시장의 현황과 웹툰플랫폼의 운영방식 등에 대해 설명했다. 드로잉쇼에서는 액정태블릿을 이용해 웹툰을 창작하는 과정이 소개됐고 아뜰리에에서는 프랑스 예비만화가들을 대상으로 한 웹툰 교육이 진행됐다.
하지만 프랑스 만화계와 앙굴렘의 시선은 크게 달라지지 않아 보였다. 프랑스 만화계는 여전히 김동화를 찾았고 25일 망가파빌리온에서 초능력 같은 드로잉 쇼를 펼친 김정기를 연호했다. 우리가 보여주고 싶은 것과 그들이 보고자 하는 것이 아직까지는 달라 보인다. 일부에서는 프랑스 만화팬들이 노화 되고 있다는 표현을 하기도 하고 프랑스에서도 디지털만화의 등장은 전통적인 만화계와 다른 지점에서 도출됐기 때문에 아직 교차 지점이 형성되지 않았다고 추측하기도 한다. 분명한 것은 프랑스가 한국만화에 원하던 작품이 과거에는 있었지만 지금은 줄었다는 점이다. 웹툰이 한국만화계의 혁신을 가져온 것은 맞지만 어느 순간 한국 만화형식이 지녔던 다양성을 사라지게 하고 있는 건 아닌지 살펴봐야 한다. 웹툰으로 인해 한국만화가 풍요로워졌다면 웹툰이 만들어낸 시장으로 인해 한국만화의 다양성은 더욱 더 풍요롭게 유지되어야 하지 않을까? 앙굴렘국제만화페스티벌이 지금 한국 만화계에 던지는 질문이다.
3. 전 세계 만화인의 수도 앙굴렘 그리고 한국의 만화수도 부천
1월 26일. 참가단이 앙굴렘국제만화페스티벌(FIBD, Festival International de la Bande Dessinée)에서 수행해야할 대부분의 일정이 끝났다. 참가단은 앙굴렘의 이모저모를 확인하기 위해 관광객처럼 길게 늘어선 채 도시를 탐했다. 앙굴렘은 프랑스 남서부 지역에 위치한 작은 도시이다. 파리에서 442km 떨어져있고 와인 산지로 유명한 보르도에서 16km 떨어져있다. 로마시대 이전부터 있었던 고도로 앙구누아 지방의 역사적 중심도시이다. 제지업으로 번영을 누리기도 했지만 쇠락하고 있는 도시 중 하나였다. 만화와는 별 상관없는 도시였지만 세계 3대 만화축제로 손꼽히는 앙굴렘국제만화페스티벌이 열린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건축물이 남아있는 중세도시에 현대적 만화 이미지가 거리 곳곳을 매우고 도시 외벽은 대형 만화 벽화로 장식되어 있다. 대부분의 상점이 만화를 상품 진열에 활용한다. 서점이나 기념품 상점은 물론이고 여행사, 부동산, 병원, 약국 등 업종과 상관없이 만화가 함께한다. 앙굴렘에 유학 와 있는 한국 학생에게 물어보니 행사 기간만 이런 것은 아니란다. 앙굴렘시는 프랑스 정부가 운영하는 국제만화영상단지와 함께 작가의 집, 만화관련 전문학교와 석박사 과정이 있는 대학 등이 밀집해 있다. 도시 전체가 만화와 관계하고 있는 곳이다. 이 같은 변화는 프랑스 정부가 오래전부터 추진해왔던 수도권 과밀 방지와 지방분권화 정책으로부터 시작됐다고 한다.
물론, 프랑스 정부가 어느 날 갑자기 작은 도시 앙굴렘을 만화도시로 발전시킨 것은 아니다. 앙굴렘을 세계의 만화도시로 이끈 이는 이 지역 출신의 만화팬이자 시의원이었던 프랑시스 그루(Francis Groux, 1934~)이다. 연애시절부터 아내와 함께 만화를 즐겼던 그루는 1964년 SOCERLID(Société Civile d’Etude et de Recherche des Littératures Dessinées)를 결성했다. 그림문학시민연구회로 번역되는 이 단체는 일종의 만화애호가 모임으로 시민들이 그린 만화나 만화에 대한 글을 발표했다. 1969년 만화주간(Une Semaine de la Bande Dessinée) 행사를 열기도 한 그루는 1971년 앙굴렘 시의회 의장으로 선출됐다. 정책 결정권을 지니게 된 그루는 1972년 앙굴렘에서 천만 개의 영상(Dix Millions d’Images)이라는 전시회를 개최한다. 이 전시가 대성공을 거두자 그루는 만화평론가이자 편집자였던 클로드 모리테르니(Claude Moliterni)와 함께 이탈리아에서 열리는 루카만화축제를 참관한다.
큰 감명을 받은 그루는 1974년 앙굴렘시립박물관에서 국제만화살롱(Salon International de la Bande Dessinée)이라는 이름의 상설 만화 전시를 개최했다(한상정, 앙굴렘국제만화페스티벌을 탐하다, 부천만화정보센터, 2007). 이 전시가 지금의 앙굴렘국제만화페스티벌로 발전했다. 앙굴렘 시의 전폭적 지지와 80년대 프랑수아 미테랑 정부가 대중문화산업에 지원을 집중하면서 1984년 문화부 장관 자끄 랑은 앙굴렘에 국립만화영상센터(CBNBDI, le Centre National de la BD et de l'Image)를 건립한다는 계획을 발표한다. 이후 1991년 CNBDI가 설립되면서 앙굴렘은 세계인의 만화도시로 거듭 났다.
한국과 앙굴렘의 인연은 1983년 서울미술관과 앙굴렘미술관과의 교류전으로부터 시작됐다. 민정기, 임옥상 등 당대의 화가들이 앙굴렘에서 교류전을 열고 유학길에 오르기도 했다. 이후 재불화가들을 통해 앙굴렘의 존재가 만화계에 알려졌다. 1993년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면서 세계화 정책의 일환으로 문화산업발전방안이 마련됐다. 규제 중심의 만화정책이 이 시기부터 지원 중심으로 바뀌었다. 1994년 한국 만화가들이 앙굴렘을 찾았고 1995년 정부 주도하에 제1회 서울국제만화페스티벌을 개최하면서 앙굴렘국제만화페스티벌 수상작들이 한국을 찾았다. 앙굴렘과 한국만화계는 한 걸음 더 가까워졌다. 1996년 정부는 ‘만화육성발전발안’을 발표하면서 ‘역대 문체부의 사업가운데 흑자를 낸 사업은 만화페스티벌이 유일(경향신문, 1996.01.20.)’하다며 프랑스 앙굴렘 같은 만화산업 거점도시를 만들겠다고 했다.
정부의 선언에 가장 먼저 움직인 쪽은 민선2기 시장 체제 하에 있던 부천시였다. 원혜영 시장은 일종의 도시재생 사업 일환으로 부천을 문화도시로 만들겠다고 했고 그 모델로 프랑스 지방 분권화와 도시 재생 사업의 상징적 도시 중 하나인 앙굴렘을 꼽았다. 이 지역 출신 만화가 조관제의 역할도 컸다. 원혜영 시장과 조관제를 비롯한 만화가 일행도 앙굴렘을 찾았다. 현 한국만화영상진흥원 김동화 이사장도 그 시절을 함께한 만화가 중 한명이었다. 김동화 이사장은 그 시절의 기대와 희망을 소상하게 기억해 냈다. 1998년 CNBDI를 모델로 부천만화정보센터가 설립되고 FIBD를 모델로 부천만화축제가, 만화의 집을 모델로 만화창작스튜디오 등이 만들어졌다. 이 같은 정책 기조는 원혜영 시장이 국회의원 재직 시 보좌관을 지냈고 시장 재임 중에는 시의원으로 활동한 현 김만수 부천시장으로 이어졌다.
1998년으로부터 어느새 20년이 흘렀다. 만화계와 부천시는 소박했던 부천만화정보센터를 한국만화영상진흥원으로 키웠다. 진흥원이 보유한 만화비즈니스센터와 만화박물관 건물은 한국 최대 규모의 만화산업단지가 됐다. 한국만화영상진흥원은 부천시가 행정을 관리하고 만화계 인사들로 구성된 이사회가 수립한 정책을 49명의 조직원이 만화계와 시민의 참여를 통해 실행한다. 2017년 기준 예산은 175억 원. 국비 47%, 시비가 출연금과 보조금 포함 38%이다. 만화가와 관련 기업이 입주해 있는 만화비즈니스센터와 만화창작스튜디오에는 작가 75팀(295명), 기업 16개사(105명), 관련단체 3곳(24명)이 입주해있다. 만화박물관 수장고에는 만화원고 6천 여 장을 비롯해 2만1천점의 자료가 보관되어 있고 도서관에는 2십7만여 권의 장서가 수집되어 있다. 국가등록문화재 3점과 2십7만 건의 디지털아카이브도 구축됐다. 20회를 맞이한 부천국제만화축제는 매년 10만 여 명의 관람객이 찾고 있고 10여 개 국 이상에서 100여 업체가 참여해 다양한 전시, 페어, 컨퍼런스, 이벤트 등을 연다. 앙굴렘 처럼 유네스코 창의도시에 지정되기도 했고 도시 곳곳이 만화벽화와 이미지로 가득하다. 한국 최고의 만화도시임에 분명하다. 그런데 축제가 한창인 앙굴렘에 서있자니 인구 90만의 만화도시 부천이 인구 5만의 앙굴렘보다 작게 느껴졌다. 부족하지 않다 자부했지만 많지 않았다.
상대적으로 낮아 보이는 우리만화의 위상 때문일까? 유럽과 미주를 돌아 아시아 만화까지 끌어안고 있는 앙굴렘의 포용력 때문일까? 전통을 유지하면서도 현대를 수용하고자 하는 그들의 경고한 철학 때문일까? 모든 것이 컸고 모든 것들에서 작았다. 그중 가장 컸던 것은 만화도시 앙굴렘을 이끌고 있는 구조와 체계였다. 앙굴렘의 동력은 누가 뭐라 해도 정부의 만화육성기관인 국립만화영상센터이다. 국립만화영상센터는 오랜 기간 동안 앙굴렘시가 조성한 만화도시의 여러 기능과 요소들을 하나로 묶고 몇몇 기관을 통합했다. 명칭도 국제만화영상단지(CIBDI, Cité Internationale de la Bande Dessinée et de l’Image)로 바꿨다. 집중력이 생겼고 규모가 달라졌다. 하지만 축제조직위인 FIBD는 철저히 민간 중심으로 운영되도록 뒀다. 중앙정부의 지원과 지방정부의 중재, 민간(산업계, 학계)의 조화로운 발전 의지가 모일 수 있도록 했다. CIBDI 건물은 외형만으로도 차이에 대한 인정과 역할에 대한 존중, 옛것과 새것이 하나를 이루고 있었다. 함께하는 구조와 체계. 앙굴렘 참가단은 앙굴렘 도시 둘러보기를 끝으로 모든 일정을 마무리하고 파리에서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그리고 서로 또는 같이 앙굴렘을 이야기했다. 만화의 모든 것을 하나로 묶는 구조와 체계. 이를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존중’일 것이다. 한국의 만화도시 부천, 한국의 만화영상단지 한국만화영상진흥원에서 느끼고 싶은 품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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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석환(만화평론가, 한국영상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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