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석환, 윤태호, 미생 - 인사 청탁으로 들어 온 그 친구 장그래, 만화 속 세상 읽기, 2013.11.20

인사 청탁으로 들어 온 그 친구 장그래

-윤태호, 미생, 위즈덤하우스, 2012


 

그쪽 회사에는 잘 이야기 해 놓았어. 간단한 면접 정도만 하고 들어가게 될 거야./ 잘 적응하기 바라고…/ 자네에 대해선 평범한 이야기만 해 놓은 상태니까 우리 회사처럼 불편한 일은 없을 거야./ 더 이상…/ 바둑이 자넬 괴롭히는 일은 없을 거네. 가게 된다면,/ 저 불빛들 중 하나를 책임지게./ 한 명 한 명의 불빛이 모여/ 우리의 밤을 밝히는 거니까

샐러리맨들 사이에서 인기를 얻으며 최근 50만부 판매를 돌파한 만화 <미생>의 도입부이다. 말하고 있는 사람은 주인공의 후견인으로 등장하는 한 중소기업 사장이다. 작가는 이 장면을 시작으로 주인공 장그래의 ‘직장신화’를 전개해 간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주인공 장그래에게 펼쳐지는 사건사고에 빨려 들어가지 말고 후견인의 시선을 유지하면서 이 작품을 읽으면 어떨까.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바둑만 하며 산 친구가 있다. 나(후견인) 역시 바둑을 좋아해서 기원에 놀러갔다가 어린 친구가 바둑을 잘 두 길래 후견인이 됐다. 그런데 이 친구, 동기들은 줄줄이 입단하는데 번번이 실패하더니 바둑을 접는단다. 학교는 근처도 안 가봤고 검정고시로 고교 졸업 자격을 얻은 것이 전부이다. 변변한 기술도 없다. 그래도 그 간의 정이 있어서 내가 운영하는 회사에 말단으로 넣어줬다. 그런데 적응이 안 됐는지 뛰쳐나갔다. 몇 년이 지났을까? 그 친구의 홀어머니한테 전화가 왔다. 군대를 제대했는데 일자리 좀 부탁한단다. 어찌해야 하나? 우리 회사는 어려울 것 같고 지인의 회사에 인사 청탁을 했다. 누가 봐도 좋은 인재는 아니지만 내 눈에 띄었던 것처럼 어느 곳에선가 자기 역할을 하는 불빛이 되지 않을까? 하지만 걱정이다. 큰 회사 사장님께 각별하게 부탁한 것인데 정말 맹탕이라면 볼 낯이 안 선다. 예전 같지도 않아서 사람하나 맘대로 쓸 수도 없는 일인데 내가 사람 보는 안목이 이렇게 형편없는 걸까?

 

그렇다. 만화가 윤태호가 그려낸 <미생-아직 살아 있지 못한 자>는 바둑판을 중심으로 세상을 살았던 청년 장그래가 바둑판보다 작지도 크지도 않은 직장이라는 세상을 경험하며 나름의 성취를 이뤄가는 과정을 ‘누구에게나 자기만의 바둑이 있다’는 주제로 그려낸 만화이다. 하지만 이 만화를 CEO의 입장에서 본다면 결국 ‘인사청탁’, 좋은 의미에서는 ‘인재추천’으로부터 시작된 최고경영자의 안목과 조직의 인재선정 및 육성에 대한 만화로 볼 수 있다. 장그래의 후견인은 인사 청탁을 했고 후견인의 지인이자 장그래가 입사한 회사의 사장은 이를 받아들였다. 인턴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장그래의 의지와 능력에 맡긴 것이지만 후견인과 사장은 사사로운 감정과 청탁에 의한 판단으로 공적 기준을 어지럽혔고 결과적으로 ‘기회는 불공평’하게 주어졌다. 장그래라는 실패한 청춘에게 새로운 동기를 부여하기위한 극적 설정에 불과한 것이라 할 수 있지만 현실에서도 이 정도의 상황은 적지 않게 일어난다.

문제는 여기서 부터다. 후견인과 사장은 이제 인재추천과 인재선정에 대한 변을 내놓아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후견인은 장그래를 바둑에서처럼 온전히 죽지 않은 집이나 대마를 뜻하는 ‘미생(未生)’으로 봤다. 실패한 청춘이지만 ‘사석(死石)’이 아니라 ‘완생(完生)’할 여지가 있는 ‘돌’이라 여겼다. 하지만 사장은 지인이 넘겨준 돌이 요석(要石)인지 폐석(廢石)인지 골라야 한다. 청탁을 받지 않는 공정성도 필요하지만 청탁 역시 비즈니스의 일부라면 받아야 한다. 대신 빨리 골라야 한다. 폐석을 살리면 하수, 요석을 살리면 상수가 된다. 고작 인턴 하나 때문에 조직원들에게 ‘상수냐, 하수냐’라는 평가를 받기 싫다면 함부로 청탁을 받아서는 안 된다. 하지만 받았다면 그것이 경영적 판단이었고 인재영입의 초석이었으며 요석을 고를 수 있는 안목 높은 상수였음을 증명해야 한다. 요석인지 폐석인지는 돌 혼자서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판이 결정한다.


인재선정과 관련 진나라의 재상이요 진시황제의 아버지 여불위(呂不韋)는 사람의 됨됨이와 능력을 판단할 때 ‘육험론(六驗論)’을 중시했다고 한다. 육험론은 사람의 능력을 판단하는 여섯가지 기준이다. 첫째는 낙(樂)으로 그 사람을 즐겁게 해주고서 얼마나 빠져 드는가 봤고, 둘째는 희(喜)로 그 사람을 기쁘게 해주고서 얼마나 자제하는가를 봤고, 세째는 고(苦)로 그 사람을 괴롭게 하고서 얼마나 참아 내는가를 봤다. 네째는 공(恐)으로 그 사람을 두렵게 해놓고서 얼마나 참는지를 봤고, 다섯째는 비(悲)로 그 사람을 슬프게 해놓고서 얼마나 삭히는 가를 봤다. 마지막으로는 노(怒)로 그 사람을 성나게 해놓고서 얼마나 감정을 다스리는 가를 봤다고 한다. 즉 자극에 쉽게 동요하는 사람은 쓸모없는 사람이요, 자극에 쉽게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일수록 무슨 일이든 책임을 완수하는 쓸모 있는 사람이란 의미이다.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것이 없다’던 주인공 장그래는 바둑이라는 승부에 익숙한 친구이다. 바둑을 통해 배운 삶의 통찰이 뛰어나다. 반대로 ‘업무에 필요한 모든 것을 배우고 온’ 장그래의 경쟁자(인턴 동기)들은 어떤 일을 시켜도 할 수 있는 이른바 탁월한 스펙의 소유자들이다. 그리고 장그래의 동료이자 또 다른 경쟁자인 기존 직장 선배와 상사들은 현재의 조직을 일군 이들이다. 바둑판에 놓일 수 있는 돌은 361개, 모두가 돌이 될 수 있지만 판에 쓰이거나 남아 있을 수는 없다. 만화가 윤태호는 ‘미생’인 장그래의 완생 또는 새로운 인생을 위해 판을 벌이고 수를 놓고 있다. 그것이 지금 이 작품이 불안한 우리 시대를 살고 있는 청년들과 직장인들에게 선택 받는 이유이다. 하지만 이 판에서 사장은 요석과 폐석을 골라야 한다. 그리고 자신만의 바둑을 봐야하고 자기만의 <미생>을 읽어야 한다. 

 

글. 만화평론가 박석환(한국영상대학교 교수)  


미생 완간 세트

작가

윤태호

출판

위즈덤하우스

발매

2013.09.26

평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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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미생>은 2012년 1월 미디어다음 만화 속 세상에 연재를 시작한 웹툰이다. 책은 나오자마자 베스트셀러를 기록했고 2012년 대한민국콘텐츠어워드에서 만화부문 대통령상을 수상 했다. <미생> 프리퀼이 인터넷드라마로 제작되기도 했고 각종 영상화 작업과 캐릭터 머천다이징이 진행되고 있다. 만화가 윤태호(1969년 광주 출생)는 <각시탈> <식객> 등의 작품으로 유명한 허영만의 제자로 1993년 <비상착륙>이라는 작품으로 데뷔했다. <연씨별곡> <야후> <로망스> 등의 작품으로 주목받는 작가로 떠올랐고 <이끼>가 영화화 되면서 대중적 만화스타가 됐다. 현재는 <미생> 외에 한겨레에 <내부자들>이라는 사회비평 만화를 동시 연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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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석환(만화평론가, 한국영상대 만화콘텐츠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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