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아를 꿈꿨던 피겨스케이트 만화 - 은반 위의 요정, 차성진
[그림 1] 차성진, <은반 위의 요정>, 도서출판 소년소녀사, 1980
■ 작품에 대하여 : 영화를 각색한 피겨스케이트 소재 순정만화
차성진의 <은반 위의 요정>은 1980년 도서출판 소년소녀사의 미니북 레이블이었던 캔디코믹스에서 전3권으로 발행된 작품이다. 당시로서는 생소한 스포츠였던 피겨스케이트를 소재로 한 작품이다. 체조를 소재로 했던 후속 작품 <조막새의 꿈>과 함께 감성적인 순정만화의 화풍으로 동적인 스포츠 드라마를 가미한 차성진표 순정만화의 대표작이자 출세작이다. 이 작품은 순정만화로 출발했지만 로봇SF만화로 인기를 얻게 된 작가가 1978년 개봉한 미국영화 <사랑이 머무는 곳에(Ice Castles)>를 보고 감동을 받아 다시 순정만화의 화풍으로 각색하면서 화제가 됐던 작품이다.
[그림 2] 차성진, <은반 위의 요정>, 클로버문고 판
주인공 렉시는 전직 선수 출신인 비올라에게 피겨스케이트를 배운 시골 소녀이다. 지역 대회에서 재능을 발휘한 렉시는 유능한 여자코치 데보라에게 발탁된다. 아버지인 마커스의 반대를 무릅쓰고 데보라 코치와 함께 도시로 간 렉시는 강도 높은 훈련을 통해 단숨에 올림픽 유망주로 기대를 모으게 된다. 그러나 이는 데보라와 그의 남자친구인 방송기자 브라이언이 자신들의 야망을 채우기 위해 의도한 것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렉시의 남자친구인 니크가 렉시와 브라이언 사이를 오해하게 되고 렉시에게 이별을 통보한다. 실의에 빠진 렉시는 스케이트를 타다가 실명을 하게 되고 고향으로 돌아와 힘겨운 나날을 보낸다. 마커스와 비올라 그리고 니크는 절망에 빠진 렉시를 도울 수 있는 것은 은반뿐이라 생각하고 렉시의 재기를 돕는다. 렉시는 앞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은반 위에 올라 완벽한 연기를 펼친다.
[그림 3, 4] 피겨 연기를 펼치는 렉시와 리메이크 웹툰 <리턴>의 여주인공
재능 있는 시골 소녀의 도시 상경과 성공 판타지를 그린 그 시절의 ‘신데렐라 스토리’로 읽히는가 싶었으나 도시의 야욕과 좌절 그리고 이를 극복하는 인간드라마가 펼쳐진다. 원작 영화와 서사 라인을 동일하게 가져가고 있지만 만화에서는 비올라와 마커스의 관계, 렉시와 브라인언의 관계 등을 한국적 미풍양속에 기반하여 각색한 듯 보이고 주변의 헌신적 도움으로 제기에 성공한 렉시의 자기극복 요인을 생모에 대한 그리움으로 승화시켜 당대 소녀팬들의 가슴을 울렸다. 실제로 미국 피겨스케이트 선수권 대회에서 2위를 한 바 있는 린 홀리 존슨이 영화에서 렉시 역을 맡아 실감나는 피겨 연기를 펼쳤다면 만화에서는 차성진의 탁월한 작화가 렉시의 환상적인 피겨 연기를 살려냈다. SF만화의 공상적 요소와 환상적 배경을 수작업으로 완성해냈던 차성진의 작화능력은 순정만화의 장식적 요소와 감성적 연출에서도 빛을 발했다. 만화작품에 대한 사전심의가 있던 때라 피겨스케이트 선수 복장이 ‘노출이 심하다’는 지적을 받기도 했으나 ‘그럼 츄리닝 입고 하냐?’고 항의해서 심의에 통과됐다는 일화를 남기기도 한 작품이다.
[그림 5, 6] 시각장애인이 된 렉시의 제기를 돕는 아버지 마커스와 남자친구 니크
■ 작가에 대하여 : 한국 순정만화의 남성 작가 계보를 이은 차성진
[그림 7] 차성진(염진아 제공)
차성진(본명 차성재, 1947년 목포 출생)은 만화가가 되기 위해 상경하여 1968년 조원기‧엄희자 문하에서 수학했다. 사제지간으로 출발해서 부부사이가 된 조원기·엄희자 화실은 당대 최고의 만화가 패밀리로 소녀 독자들을 위한 감성적 만화의 형과 식을 제시한 곳이다. 차성진을 비롯하여 허영만, 이성운, 방재호, 김숙, 문성언, 엄미자 등 수 많은 만화가가 이곳에서 배출됐다. 차성진은 가장 많은 일이 몰렸던 화실에서 특출 난 재능을 소유한 문하생들과 우열을 가리며 실력을 쌓았고 1972년 <하양천사>를 발표하며 정식 데뷔했다. 권영섭, 조원기로 이어지는 남자 순정만화가의 계보를 이은 것이다. 약화체에 가까웠던 조원기의 만화와 달리 차성진의 작화는 먹색이 투명하게 빛 날 만큼 세밀했고 풍부한 감성이 느껴졌다. 하지만 차성진의 만화는 우연히 작업에 참여했던 거대로봇만화에서 더욱 빛을 발했다. 절친한 사이였던 김형배가 김청기 감독의 애니메이션 ‘로보트태권브이’를 만화로 출판하면서 기대 이상의 인기를 모으자 다양한 형식의 거대로봇만화 시리즈가 등장했다. 차성진도 이중 상당 부분의 작업을 수행했다. 지금도 올드팬들 사이에는 김형배가 그린 태권브이와 차성진이 그린 태권브이를 놓고 우열을 논하는 이들이 있을 정도로 당대 두 만화가의 작화는 매력적이었다.
[그림 8] <로보트태권브이와 황금마왕>의 원화
[그림 9] 영화감독 이규형의 <청춘스케치>를 각색한 <늑대와 여우>
재능이 발휘됐던 SF만화를 놓고 본연의 작업이었던 순정만화로 돌아간다는 것은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이다. 애써 결집한 남성독자를 두고 새로 여성독자를 결집해야 하는 일이었지만 차성진은 SF를 하면서도 순정만화의 끈을 놓지 않았고 결국 <은반 위의 요정>(1980), <두 개의 작은 별>(1980), <청춘의 은빛 날개>(1987) 등의 작품을 발표하며 여심을 잡는데 성공한다. 피겨스케이팅, 발레, 무용 등의 스포츠를 소재로 비극적 여성보다는 자주성이 강한 여성의 로망을 그렸다는 것도 이색적이었다. 차성진 문하에서는 <아르미안의 네 딸들> <리니지>로 유명한 순정만화가 신일숙이 배출됐다. 90년대 이후로는 시대극화, 트렌디 드라마, 아동교양만화, 성애극화 장르의 작품을 발표하기도 했다. 특히 역사 이데올로기 만화로 볼 수 있는 <장백산의 비밀>(1990)은 차성진 만화의 색다른 지평으로 읽힌다. 진보적 만화가 단체인 (사)우리만화연대의 회장으로 현재도 창작 일선에 있다.
■ 명장면 명대사 : 난 아무래도 좋아. 너만 내 곁에 있어준다면
영화 속 관중은 눈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완벽한 연기를 펼친 렉시의 도전에 기립박수를 보냈고 영화 밖 관중들은 연기 후 출입구를 찾지 못하고 은반 위에 쓰러져 어쩔 줄 몰라 하는 렉시의 숭고한 도전과 그를 향해 달려가는 남자친구의 지고지순한 사랑에 눈물을 쏟았다. 차성진은 관중의 꽃다발에 걸려 넘어진 렉시와 이를 지켜보다 렉시가 있는 빙판 위로 올라가 렉시를 일으켜 세우는 니크를 순정만화 특유의 몽타주 기법과 교차편집 등을 통해 감성적으로 연출해냈다. 니크의 손을 잡고 보이지 않는 눈을 들어 니크와 눈맞춤을 시도하는 렉시는 ‘난 아무래도 좋아. 너만 내 곁에 있어준다면’이라고 속삭인다. 극도의 근성을 보여준 시각장애인 스포츠 선수의 엔딩멘트 속에서 소녀적 감성이 터져 나오도록 이끌어낸 남성 작가 차성진의 감성이 빛나는 대목이다.
[그림 10, 11] 피겨 연기를 펼치는 렉시와 렉시를 지키는 니크
<은반 위의 요정> 발표 30주년이 되는 2009년, 한국의 피겨스케이트 선수 김연아가 세계피겨스케이팅 챔피언십 여자 싱글 부문에서 1위를 차지하면서 ‘렉시’를 통해 피겨스케이팅이라는 환상을 접했던 올드팬들 사이에서 이 작품에 대한 추억담이 등장해 인터넷을 뜨겁게 하기도 했다. 렉시를 통해 꿈꿨던 오랜 열망이 드디어 실현됐고 만화작품이 그 같은 꿈꾸기의 밑받침이 됐다는 것에 공감한 만화기획자 황재오와 후배 만화가 송래현은 <은반 위의 요정>을 <리턴>이라는 제목으로 리메이크해 웹툰으로 선보이기도 했다.
참고자료
네이버블로그, 차성진 블로그
http://blog.naver.com/dergoogee49/30040444572
네이버N스토어, 차성진 만화 보기
http://nstore.naver.com/search/search.nhn?t=comic&q=차성진
네이버카페, 클로버문고의 향수, 크림치즈님의 은반 위의 요정 리뷰
http://cafe.naver.com/clovercomic/9765
네이버카페, 만화내사랑, 은반위의 요정 주요 이미지
http://cafe.naver.com/sas7273/3884
네이버영화, 사랑이 머무는 곳에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10983
코베이, 차성진, 은반 위의 요정, 도서출판 소년소녀사(오뚝이문고), 1980년 판
http://www.kobay.co.kr/servlet/wsauction/item/itemView;jsessionid=ENOKDOIOCDFG?item.itemseq=1104XEKU11H
네이버만화, 송래현, 은반 위의 요정 리메이크 웹툰 ‘리턴’ 보기
http://comic.naver.com/webtoon/list.nhn?titleId=277235&weekday=fin&page=2&mobile=y
네이버뮤직, 은반위의 요정 리메이크 웹툰 ‘리턴OST’, 조은선율 곡, 슬아 노래
http://music.naver.com/album/index.nhn?albumId=190742
유튜브, 차성진 인터뷰 동영상
http://www.youtube.com/watch?v=2V0LY7s6RFg
글. 만화평론가 박석환(한국영상대학교 교수)
유년시절 이두호의 만화로 한글을 깨우치고 이상무의 만화로 울지 않는 법을 배우며 성장했다. 이현세의 만화를 보며 도전하는 남자의 매력을 알았고 허영만의 만화를 통해 현명한 어른으로 사는 방법을 찾았다. 스포츠서울 신춘문예로 등단해 만화평론가로 활동하고 있고 대학에서 만화를 가르친다. 저서로는 <코믹스만화의 세계>, <만화리뷰쓰기> 등이 있다. 홈페이지는 www.parkseokhwan.com 이다.
자료협조 한국만화영상진흥원(www.komaco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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